간빙기 - 시와소금 시인선 190

간빙기 - 시와소금 시인선 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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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김진길

저자:김진길
1969년강원도영월에서출생하였으며,2006년《부산일보》신춘문예로등단한이후『거미의협상술』,『화석지대』,『밤톨줍기』,『집시,은하를걷다』를출간하였고,아르코창작기금(발표부문)및경기·대전문화재단창작지원금을받았다.한국시조시인협회신인상과단수시조대상(나래시조),송림문학상,나래시조문학상,천강문학상,전영택문학상,리강룡문학상을수상했다.시에그린한국시화박물관·고래문화재단아트스테이에서입주작가로활동하였고,동명대학교초빙교수로재직한후현재국립군산대학교에출강중이다

목차

시인의말

제1부후숙과일
길치13/빙화14/오도카니앉아서문득드는생각15/양파16/염전무자위17/참매인생18/후숙과일19/준설기20/하늘우물21/아버지의바다22/노을이미지23/운탄고도24/

제2부나이스캐치
슬도瑟島에서27/스미싱주의보28/나이스캐치29/맹꽁이서식지30/바벨31/엠바고32/홍도원추리33/에코사이드34/산양,뼈의보고서35/겨울,순천만36/따개비마을202538/퍼스트펭귄39/악덕사채업자40/

제3부취권
취권43/큰칼잡이의노래44/반구대암각화46/환절기47/간빙기48/낙조전망대49/火의다비50/늙은옥수수51/가택연금52/량이할매53/新정읍사54/공소권없음55/스틸컷-新고려장에관한56/

제4부독립선언문
청령포관음송59/천마도기행60/다시,삼전도61/남한강에게62/탄금彈琴의강63/정전停戰,그후64그라믄쌀맞심니더65/해조음에대한망상66/한강67/남대천개화68/꿈꾸는석불69/쉰,70/호르무즈71/독립선언문72/

작품해설:김보람
간빙기를건너는나이테75

출판사 서평

한이틀뒀다먹어야제맛이난다며
오랜친구민수가준파인애플한송이
봉지째식탁에두고나들이를다녀왔다

고녀석깜박잊고현관문을열었는데
그사이집안에는열대숲이울울창창
단단한껍질을뚫은과육향이그득하다

뾰족한나를보듯긴창으로무장한
저야성의날것에서단물이오르다니!
구석진작은방으로나를밀어넣는다
―후숙과일전문

인간의시야바깥에서이미익어가는것들은얼마나많은가.후숙과일은일상의사소한풍경을빌려완성되어가는비가시적인흐름을예민하게포착한다.“한이틀뒀다먹어야제맛이난다며”건네진“파인애플”은그자체로‘아직-아님(not-yet)’의상태,곧가능성의그늘에서제몸을익히는과정을가리킨다.“단단한껍질”이라는폐쇄된공간속에서“과육”이은밀히향을밀어올리듯,인간의존재또한즉각적인드러남이나표면적성취로환원되지않는다.외출후돌아와현관문을여는순간집안을점령한“울울창창”한향기는후각적경험을넘어,주체의부재동안축적된변화를환기한다.특히“저야성의날것에서단물이오르다니!”라는감탄은삶의역설을함축한다.날카로운“긴창”으로자신을“무장”하던생이깊어진시간을통과하며타인에게건넬“단물”을품게되는것이다.주체는이지점에서스스로를“구석진작은방”으로“밀어넣”으며성찰에잠긴다.세월의풍화를견디고내면의농도를더해갈때,껍질을뚫고터져나오는본연의향기가마침내자신에게가닿는다.

저것은빛의행성,
흙에서온알전구다
태양을향하여
푸른푯대를세우고
묵묵히어둠속에서
자전하는집열의구球.

바닥보다낮아져본
사람들은안다
견딜수록더캄캄한
지하의계界에서는
슬픔이제몸을태워야
빛이된다는것을.

칠흑을벗겨내는
촛대같은눈물의시간,
그아린날들이
하얗게곰삭으면
마침내지상에올라
과육의별을점등한다.
―양파전문

성숙은양파에이르러처절하면서도숭고한자기연소(self-combustion)의이미지로심화된다.시적주체에게양파는“빛의행성”이자“흙에서온알전구다”.이는땅속어둠에갇힌비천함과내면에빛의씨앗을품은신성이공존하는이중적표상이다.“묵묵히어둠속에서/자전하는집열의구球”라는묘사는외부의조력없이,오직자신의슬픔을동력삼아스스로를단련하는자정(自淨)의과정을비춘다.그러나이시는성장의예찬에만머물지않는다.“바닥보다낮아져본/사람들은안다”라는선언은생의심연을통과한자만이길어올릴수있는비의(秘儀)를수면위로끌어올린다.‘바닥보다낮아짐’은삶의처절한국면이다.견딜수록더캄캄해지는지하에서빛을만들어내는유일한방식은“슬픔이제몸을태”우는것뿐이다.이때비애는삶의구조를근본적으로변형시키는연금술적에너지로작용한다.이러한변화는어둠에서빛으로,아래에서위로이동하는일종의‘자리옮김(deplacement)’이다.견디며타오른“촛대같은눈물의시간”이하얗게곰삭을때,양파는지상으로올라와“과육의별을점등한다”.그눈부신속살은아린시간을통과해얻어낸순전하고찬란한훈장처럼남는다.

아는길,모르는길
번번이허탕친뒤
길눈이어둡다고자책이라도하는날엔
캄캄한적막앞에서나는적막이되지

쩡,하고깨질만큼
내슬픔이여물기도전
매일뜨는해의길도저녁이면엎드린다며
축처진어깻죽지를왜바람이툭툭치지

풀죽은이불솜이두드리면일어나듯
늘어졌다팽팽해지는
고무줄같은나의길,
날렵한학꽁치떼가그길에서캉캉뛰놀지

비릿한삶의비늘,
잔뼈까지털고나면
허방을연신짚던탁한눈은맑아지고
단단한적막의벽에실금을내며나는걷지
―길치전문

길을잃는다는것은견고한질서밖으로밀려난자신을다시마주하는일이다.길치는방황이라는우회가빚어낸굽이진생의거리를보여준다.주체는“아는길,모르는길/번번이허탕친뒤”스스로를자책하며막다른골목에선다.그러나“캄캄한적막앞에서나는적막이되지”라는구절에이르면,그는미로를헤매는데그치지않고세계의적요와한몸이된다.이는소란스러운목적지를지우고존재의민낯과조우하게한다.“늘어졌다팽팽해지는/고무줄같은나의길”은삶의탄성을감각적으로형상화한다.그길은효율을위해직선으로뻗은경로와는거리가멀다.늘어났다되돌아오기를거듭하며제자리로회귀한듯보이지만,실상은이전과는다른위치에스스로를정박시키는‘재귀순환(recursion)’의리듬이다.이고통스러운탐색위에서“학꽁치떼”가뛰노는생동이출현한다.주체는“비릿한삶의비늘”과고단한“잔뼈”를털어내고서야맑아진눈을얻는다.이제그는“단단한적막의벽에실금을내며”걷는다.단번의돌파가아니라지속적인걸음으로미세한잔금을남기는이움직임은끊임없이자신을변주하려는의지의발현이다.
김진길의시에서삶은거창한극복의서사로과장되지않는다.오히려그시선은돌파를서두르지않는‘하지않기(undoing)’의태도,견디고표류하며겪어낸시간의정직함을신뢰한다.오래견딘세월은세계의표면을조금씩흔들고,그퇴적위에서다른방향으로나아갈여지를만든다.경계의외곽을등에진채가느다란틈으로자신의영토를여는것,이정밀한균열이무르익음의도달점이다.

원에서타원으로타원에서원형으로
태양을향해도는원근의공전궤도
거대한얼음왕국이얼었다풀렸다한다.

빙기와간빙기의순환설이견고하다면
氷國의부신결정이맥없이풀릴즈음
고위도어디쯤으로빙하는퇴각한다.

영원의상징같은고체의위엄을벗고
협곡을흘러닿은푹하고깊은바다
화려한이색어종이출몰을거듭한다.

난개발그열풍이지상에서불때마다
지도가바뀐다는고수위의뉴스레터,
한여름이상기온에도시하나급랭한다.
―간빙기전문

이제시인의시선은문명사의인과를넘어선다.별들의공전과빙하의퇴각이이루는우주적순환의회로로진입한다.간빙기에서시간은인간의협소한경험에포섭되지않는다.“원에서타원으로타원에서원형으로”이어지는공전의궤도는세계가스스로를되풀이하며변형하는물리적율동이다.“거대한얼음왕국이얼었다풀렸다한다”라는구절은인간의의지나성취와는무관하게작동하는자연의섭리를방증한다.이순환속에서인류문명은중심이아닌일개양상에불과하다.“氷國의부신결정이맥없이풀릴즈음”이라는대목은견고한구조가얼마나덧없이무너지는지를증명한다.“영원의상징같은고체의위엄을벗고”흘러내린자리에서낯선“이색어종”이모습을드러낸다.세계는인간의해석바깥에서스스로를이질적인형상으로채워간다.그러나주체는이초월적궤도속에인간의위태로운개입을끌어들인다.“난개발그열풍이지상에서불때마다/지도가바뀐다는”언술은자연의질서속에인간이불안정한변수로작용해파국을재촉하고있음을보여준다.특히“한여름이상기온에도시하나급랭한다”라는마무리는열기와냉각의대비로통제가무너진체계의균열을노정한다.
시인이감각하는파열은팽창한시대의지층을벗어나고있다.그것은진보라는이름으로자행된속도의폭력성을고발하는동시에,가속속에유실된존재의본질을되찾으려는시적저항이다.“겹겹의나이테가/긴잠을터는사이”(천마도기행),틈아래잠든시간의무늬가떠올라세계는낮은온도로가라앉는다.이정적속에서시인은역사의강물과집합적유산을향해걸음을옮긴다.시의언어는유행하는구호의가벼움을걷어내고,지층깊숙이박힌비문처럼묵직한하중을감당한다.

나는돌장이다,
하여돌을쫀다
정끝에서내는길은극통의꽃이려니
짓찧어생살떼어낸돌화판에피가돈다.

돌망치해진손을숙명으로받아들면
정끝에서나는길은기백년쯤예사려니
한땀씩선사先史의날을
사관인듯쪼아문다.

사슴의뼈를갈아야생을꿰어오고
키작은고깃배로고래를끄는오늘
천상에제를올리는
그풍광도새겨둔다.

문자보다더선명한돌화판의그림한폭,
행여세월타면
여백의편이려니
파고여,보일듯말듯애탈만큼만일어라.
―반구대암각화전문

사라짐은역설적으로다른방식의현존이다.퇴적된층위아래잠겨있던것들이하나의윤곽으로떠오를때,그것은박제된유물이아니라생생한실존으로되살아난다.가령반구대암각화는문자이전의기록이어떻게지속적인생명력을획득하는지를보여준다.“나는돌장이다,/하여돌을쫀다”라는선언에서주체는단순한석공을넘어생을역사에새기는사관(史官)이된다.“정끝에서내는길은극통의꽃”으로형상화된다.“짓찧어생살떼어낸돌화판에피가돈다”라는구절은무기질의바위에인간의살결과세월이새겨지는찰나를포착한다.이자국은개인의노동을넘어서지속적인생명력을얻는다.“돌망치해진손을숙명으로받아들면”주체의행위는고통을지나반복과지속속으로스며든다.“기백년쯤예사려니”라는대목에서는한생애의한계를넘어선존속을획득한다.
나아가“한땀씩선사(先史)의날을/사관인듯쪼아문다”라는진술은문명이전의시간을현재의기록으로불러오는돌장이의자의식을드러낸다.이과정에서사냥과제의,노동과신앙이한표면위에중첩되어지형을이룬다.그러나이러한각인은완고한붙들기나완전한보존만을지향하지않는다.“행여세월타면/여백의편이려니”라는인식에서드러나듯,주체는남겨진자국의마모를받아들인다.“보일듯말듯애탈만큼만일어라”라는간구는세월의침식속에서도살아남고자하는단독자의경배다.
결국김진길시인에게시를쓰는일은흩어진시간의편린을모아유의미한존재의서사로복원하는행위에다름없다.그의시학은사라지는것들을향한애틋한추도사이면서지금을호출하는끈질긴탐사다.내면의시간을다스리고타인의상처에가닿으며,우주적순환속에서인류의오만을직시하는그의시선은정직하면서도매섭다.지상의강물을따라흐르는기억을건져공동체의얼굴을복원하는일은그자체로엄숙한숨고르기다.시인은“몽글몽글한/슬픔의외피”(오도카니앉아서문득드는생각)를더듬고,“걸음이흔들릴땐그바다를물질”(아버지의바다)하듯흩어진시간의자취를길어올린다.그의문장들은돌을쪼는정끝에서마멸되지않는비명(碑銘)을새기고,가야금의울음을강물에풀어놓으며휘발되는시간을붙든다.이러한시적실천은위태로운시대의끝자락에선우리에게속도의질주가아니라깊이를,외면이아니라직시를요청한다.
그런점에서시집간빙기가건네는전언은명확하다.척박한추위가잠시물러난짧은유예속에서서로의체온을확인하며무너진자리를다시세운다.존재는타인의고통과역사의강물에기꺼이합류할때비로소제빛을얻는다.차갑게식어가는세계를단단한사유로데우는시인의시선은과거에머물지않고도래할시간을예비한다.긴잠에서깨어난나이테가나무의생을새기듯,김진길의시는우리삶의거칠어진그늘을걷어내또렷한눈으로세상을마주하게한다.그의시는‘간빙기’를통과하며,얼어붙은진실이녹아내리는미세한소리에귀를기울인다.그떨림은이제막우리생의수면위에서눈부신윤슬로떠오를채비를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