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모로 산다는 것 : 왕권과 신권의 팽팽한 긴장 속 조선을 이끌어간 신하들의 이야기

참모로 산다는 것 : 왕권과 신권의 팽팽한 긴장 속 조선을 이끌어간 신하들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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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KBS 〈역사저널 그날〉, 〈차이나는 클라스〉 출연
조선 전문가 신병주 교수가 참모의 리더십과 팔로워십을 말하다

킹메이커 정도전·하륜부터 실학자 김육·정약용까지
각자의 개성으로 조선을 받쳤던 대들보, 신권에 대하여
조선왕조는 500년 이상의 긴 세월 동안 어떻게 존속했을까? 조선의 역사에서 왕이 최고의 권력자로서 국정 운영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왕 못지않게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또 다른 축은 왕을 보좌한 참모들이었다. 조선은 기본적으로 왕권과 신권이 균형을 이루면서 정치가 이루어졌고, 참모의 적절한 발탁과 활용은 그 시대의 성공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조선의 왕은 고대나 고려의 왕들에 비해 절대적인 권력을 누리지는 못한 대신, 참모들을 최대한 활용하여 국정을 운영하였던 만큼 ‘참모’라는 키워드로 조선의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왕조 시대가 끝나고 국민이 주인이 되는 민주사회가 도래했지만, 반복이라는 역사의 속성 앞에 조선시대 명참모들이 갖추었던 덕목들은 의미를 지닌다. 과학자 장영실·예술가 성현·일본에서 귀화한 장군 김충선·달필가 허목·수학자 최석정·실학자 김육과 정약용까지, 조선의 참모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나라를 빛냈다. 시대를 치열하게 살아낸 42명의 인물로 조선왕조 흥망성쇠의 역사를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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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신병주

서울대학교인문대학국사학과및대학원을졸업했다.서울대규장각학예연구사를거쳐현재건국대학교문과대학사학과교수로재직중이며조선시대사학회회장,한국문화재재단이사,문화재청궁능활용심의위원,외교부의전정책자문위원등으로활동했다.조선시대역사와문화를전공하고있으며,역사를쉽게전달하기위해노력하고있다.KBS<역사저널그날>,KBS라디오<글로벌한국사,그날세계는>을진행했으...

목차

들어가며

1장새왕조를설계하다
정도전,혁명가에서왕조의설계자로
하륜,태종의킹메이커
황희와태종,그리고세종
세종의믿음에보답한과학자,장영실
성삼문,죽음으로단종을지키다
신숙주,변절한지식인vs정치·문화정비의주역

2장국가의기틀을다지다
세종에서성종대까지‘문병’을장악했던학자,서거정
서거정과쌍벽을이룬조선전기문장가,강희맹
한명회,세조에서성종까지권력의핵심으로자리잡다
영남사림파의영수이자문장가·관료,김종직
‘직필의사관’김일손,사화로희생되다
성종의학술·예술참모,성현

3장폭군의실정에흔들리다
연산군의마음을뒤흔든실세참모,장녹수
연산군의최측근임사홍,반정으로날아가다
중종의대리인남곤,영원한간신으로기억되다
조광조,개혁가의꿈과좌절
16세기호남사림의자존심,김인후
나아감과물러남을실천한퇴계이황
명종에게올린조식의상소문,정국을흔들다
쉬어가는페이지_연산군의잔인한악행

4장임진왜란,조선의위기를겪다
선조에게위기상황을역설한참모,이이
선조와정철,그애증의관계
문신이자유학자이자돌격적인의병장,조헌
일본군선봉장에서조선장군이된김충선
북인의영수이자실용의관료학자,이산해
위기극복의참모,유성룡과《징비록》


5장광해군의그늘속참모들
선조·광해군시대,외교의최전선에서활약한이덕형
허균과광해군,총애와배신사이
의병장이자광해군의남자,정인홍
광해군의참모,김개시의국정농단
영원한영의정,이원익
쉬어가는페이지_광해군,정상에서벼랑까지

6장명분과실리사이,인조반정
위기의시기,국방의최일선에섰던장만
인조반정의공신,‘인조의남자’이귀
광해군·인조시대국방과경제전문가,김신국
17세기소신과원칙,직언의정치인조경
최명길,실리론으로나라를구하다

7장당쟁의시대와실학
실물경제감각으로성과를보인학자관료,김육
‘남인의영수’허목,고학에심취하다
숙종시대정치공작의달인,김석주
실록에삼천번넘게등장하는인물,송시열
현실가능한정책을제시한소론정치가,최석정
이건창,조선시대당쟁의역사를정리하다
정조의참모정약용,관료와실학자두길을걷다

출판사 서평

책속에서

1383년(우왕9)가을정도전은함주막사로들어가동북면도지휘사로있던장군이성계를찾았다.이성계는거듭되는외침속에서홍건적과왜구의침입을물리치는혁혁한무공을세우면서신흥무인세력으로명성을떨치고있었다.특히1380년소년장수아지발도가이끄는왜구를전라도지리산일대운봉지역에서섬멸한황산대첩은그의명성을보다높인사건이었다.정도전은이성계의휘하군대를보고,“이군대로무슨일인들성공하지못하겠습니까?”라는말을던졌다고한다.이성계가재차무슨일이냐고묻자,정도전은“왜구를동남방에서치는것”이라고얼버무렸지만,이순간정도전은이성계의군사력에서혁명의성공을보았을것같다.결국정도전과이성계의만남은정도전의‘문文’과이성계의‘무武’가조화되면서새로운혁명의길로가는역사를만들고있었다.
_'정도전,혁명가에서왕조의설계자로'중에서

특히장영실의아버지가중국의항주사람이고어머니가신분이천한동래현의관기였다는사실을고려하면,인간장영실을발탁해서힘을실어준세종의애정이얼마나컸는지느낄수있다.(……)세종은장영실에대해,“영실의사람됨이비단공교한솜씨만있는것이아니라성질이똑똑하기가보통에뛰어나서,매양강무할때에는나의곁에가까이모시어서내시를대신하여명령을전하기도하였다”고하여장영실이실질적으로세종의참모역할을했음을알수있다.(……)장영실의당시임무는가마의제작감독이었다.가마는세종이타기도전에부서졌는데,사헌부에서는왕이다친것은아니었으나안위와관련된일이므로장영실을비롯한참여자들을불경죄로관직에서파면했고,장영실은곤장까지맞아야했다.1442년대호군직책에서파면된이후그의만년의생애에대해서는알려진바가없다.한때는세종에게그토록총애를받았던장영실의갑작스러운해임과처벌은아직도풀리지않은의문투성이다.일설에는장영실의과학적재능을견제한명나라로부터장영실을보호하기위한세종의배려라는해석도나오지만구체적인정황은확인되지않는다.천문과학기구프로젝트가끝나고세종이다른사업에역점을두면서장영실이더이상필요없게되어사라졌다는주장도있지만정확한근거는없다.
_‘세종의믿음에보답한과학자,장영실’중에서

예방승지는성삼문에게가혹한운명을예고하는직책이었다.1455년윤6월수양대군의압박속에서단종이상왕으로물러나던날성삼문은바로수양대군에게왕위를상징하는옥새를전해주는비서의자리인예방승지의직책에있었던것이다.훗날죽음으로대항한상대에게옥새를주는임무를수행했던것은성삼문의기구한운명으로밖에풀이할수없을것같다.《연려실기술》은“세조가선위를받을때에,자기는덕이없다고사양하니,좌우에따르는신하들은모두실색하여감히한마디도내지못하였다.성삼문이그때에예방승지로서옥새를안고목놓아통곡하니,세조가바야흐로부복하여겸양하는태도를취하다가머리를들어빤히쳐다보았다”고하여두사람의갈등을예고하고있다.
_‘성삼문,죽음으로단종을지키다’중에서

성삼문과신숙주는사후에도엇갈린행보를보였다.죽음으로의리를지킨성삼문이충신의대명사로현재까지추앙을받은반면,신숙주는뛰어난학문적자질에도불구하고수양대군에게협조했다는이유로변절한지식인이라는꼬리표가늘상따라다니고있다.원래녹두의싹을내어먹는나물로서,두아채豆芽菜란이름으로불렸던나물이조선후기이후‘숙주나물’로바뀐것에도신숙주의행적을응징하고자하는백성들의증오가담겨있다는이야기도전해진다.만두속을만들때이나물을짓이기기때문에신숙주에대한분노를풀어보고자한다는것이다.
_‘신숙주,변절한지식인vs정치·문화정비의주역’중에서

1506년(연산군12)8월23일,연산군은후원에서나인들과잔치를하다시한수를읊었다.“인생은풀에맺힌이슬같아서만날때가많지않은것”이라며읊기를마치자연산군은갑자기눈물을두어줄흘렸다.다른여인들은몰래서로비웃었으나,장녹수와전비는슬피흐느끼며눈물을머금었다.연산군은장녹수의등을어루만지며“지금태평한지오래이니어찌불의에변이있겠느냐마는,만약변고가있게되면너는반드시면하지못하리라”하였다.두사람은앞날을예견하였던것일까?이날은바로1506년9월2일중종반정이일어나기열흘전이었다.
_‘연산군의마음을뒤흔든시세참모,장녹수’중에서

남곤이자신의죄악을이미파악하고있던정황도나타난다.남곤은옥사를주도한후에친척과후배들에게남들이자신을어떻게보느냐고여러차례질문을던졌다.남곤은“응당소인이됨을면치못할것입니다”라는답을듣고는하인을시켜서평생에쓴초고를모두불태워버렸다고한다.중종시대제일의문장가였지만그의작품이대부분사라져버린이유이기도하다.그러나이에대해이수광은《지봉유설》에서,“남곤이이미사림을얽어서해치고서스스로만세뒤에죄를받을줄을알고,자기문장이세상에나오면거듭사람들의치욕을받으리라여겨,죽을때자기의원고를모두불살라없앴으니,그죽은뒤의계획도또한간교하다하겠다”라고하여,남곤이원고를스스로불태운모습을더강하게비판하였다.(……)
남곤은마음이행실과어긋났다고스스로후회했다고한다.그러나사림파학자들을어육으로만들어놓은엄청난결과에대해후회한들무슨소용이있겠는가?남곤의모습이낯설지않는것은현대정치권이나고위공직자중에도재주는넘치지만그재주를부정적인곳에쏟는인물이곳곳에등장하고있기때문이다.왕의총애와권력때문에자신의명성과그원고까지모든것을잃어버린남곤의사례를경계로삼았으면한다.
_‘중종의대리인남곤,영원한간신으로기억되다’중에서

이황은69세에이조판서에임명되었으나사양하고고향에돌아와학문에전념하다가70세되던해11월종가의시제때무리를해서인지병환이악화되었다.그달8일아침평소사랑하던매화나무에물을주고침상을정돈했다.그리고단정하게앉은자세로숨을거두었다.조선성리학최고인물의마지막모습이었다.
_‘나아감과물러남을실천한퇴계이황’중에서

조식은잘못된정치현실에대한비판의목소리를있는그대로전달하는것을선비의책무로여겼다.왕에게불경한표현이될지언정직선적인상소문을올린것은이러한생각에서였다.이상소문으로조정은발칵뒤집혔다.특히문정왕후를과부로,명종을고아로표현한대목에대해서는명종이‘군상불경죄君上不敬罪’로역정을낼만큼큰파문을일으켰다.문정왕후에대한불만이벽서의형태로나타난경우는있었지만,조식처럼직언하는상소문으로비판하는경우는없었다.조식에대한처벌주장이제기되고,목숨까지위태로운상황이발생하였다.그러나상당수의대신이나사관들이“조식이초야에묻힌선비여서표현이적절하지못한것이지그우국충정은높이살만하다”거나,“조식에게죄를주면언로가막힌다”는논리로조식을적극변호함으로써파문은가라앉을수있었다.(……)
조정의대신들과언관,성균관유생들까지나서며조식을처벌한다면왕이언론을탄압하는것이라며비호하였고,결국명종은조식을처벌할수가없게되었다.조식의상소문파문은명종시대에재야의언론까지수용하는정치문화가살아있음을보여준대표적인사건이었다.
_‘명종에게올린조식의상소문,정국을흔들다’중에서

사야가는넓디넓은천하에서어찌하여오랑캐의문화(좌임향,격셜풍)를가진일본에태어났는가에대해탄식했으며,그래서아름다운문물을보기를원했다.그러던중가토기요마사가조선을정벌하러가게되면서그를선봉장으로임명하였다.사야가는이전쟁이의롭지못한것임을알고있었지만,예의지국조선을한번구경하고자선봉장이되어조선에오게되었다.이때,그는맹세코다시일본으로돌아오지않을것을마음속으로결단했다고표현하고있다.즉,예의의나라조선을흠모하다가가토의선봉장이되어출정함에귀화의결단을내리게되었음을말하고있는것이다.후에그가조선의예의와문물을사모하여당호를‘모하慕夏’라고한것도같은맥락에서이해할수있다.
_‘일본군선봉장에서조선장군이된김충선’중에서

강화도로피난을가면서인조는이원익을도체찰사로삼았다.고령으로사양하는이원익에대해인조는“누워서장수들을통솔해도될것”이라며부탁했다.이미80세가넘어도그는여전히국가에서필요로했던재상이었다.1634년1월88세를일기로이원익은사망했다.마지막까지그의삶은소박했다.“금천에돌아가비바람도가리지못하는몇칸의초가집에살면서떨어진갓에베옷을입고쓸쓸히혼자지냈으므로보는이들이그가재상인줄알지못했다”는기록은최후까지청백리의삶을살았던그의모습을증언한다.
_‘영원한영의정,이원익’중에서

김신국의경제정책은양전의철저한시행으로농업경제의기반을튼튼히한바탕에서국가의비용을절감하는절제와생산확대를통한국부증대라는‘두마리토끼’를잡는방안이었다.이것은화폐유통과함께국용을절제하고,어업과염업과같은바다에서생산되는이익을국가재정으로적극확보하려는정책에서도두드러진다.김신국은고려성종대이래로화폐를사용한역사에대해설명을한후,외국과는달리우리만쌀이나옷감으로유통한다면백성이곤궁하고국가가가난해진다고파악하였다.그는‘주식환무지법酒食換貿之法’을제정하여배고픈사람들이동전을가지고시장에서쉽게술마시고먹을수있게하고사람들이그것을즐길때동전사용의묘미를알것이라하였다.김신국의건의는인조에의해서수용되어그해11월에호조의요청으로인경궁에주전청을설치하고동전의주조사업에착수하였다.김신국은성중에가게를설치하고술과음식을동전으로사고팔게하는등동전유통의현실성까지미리검토하였다.17세기중엽에는강화·교동·연백등개성을중심으로중국동전이원활히유통되고의주와안주등중국접경지역에서도동전이유통되었다.숙종대에이르러상평통보가전국에널리유통되는데,이러한유통의기반에김신국과같은선구적인관료가있었음을기억해야할것이다.
_‘광해군·인조시대국방과경제전문가,김신국’중에서

차가운겨울추위속에전세도계속불리해지자인조는마침내최명길로하여금항복을청하는국서의작성을명했다.최명길의국서를본김상헌은그자리에서이런치욕을당할수없다면서국서를찢어버리면서실성통곡을하였다.최명길은“대감이찢었으니우리들은마땅히주워야한다”하고,오랑캐에게보내는답서를주워모아붙였다.
_‘최명길,실리론으로나라를구하다’중에서

한강이바라다보이는곳에정약용과부인의무덤이있다.실학박물관도바로옆에조성되어조선시대실학의흐름을한눈에접할수있다.생가쪽을조금나와강변가에조성된수변공원일대는정약용이거닐면서사색을하고,배를타면서벗들과교유했던곳이다.2018년은정약용이해배된지정확히200주년이되는해였다.정약용이지금시대에재평가되고있는것은그가《목민심서》등에서제시한민생경제의어려움과관리들의부정과부패,하향식조직문화등이여전히해소되지않았기때문은아닐까?
_‘정조의참모정약용,관료와실학자두길을걷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