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내면의 생명성과 다양한 관계성, 농경사회의 풍속 등 펼치는 배정숙의 시집
2010년 계간 『詩로 여는 세상』으로 등단하여 두 권의 시집을 선보였던 배정숙 시인이 세 번째 시집 『불친절한 오후가 향기로울 때』를 현대시세계 시인선 144로 출간했다.
배정숙 시인의 『불친절한 오후가 향기로울 때』는 자기 서사, 혹은 가족사를 농밀하고도 정밀한 언어로 다듬는다. 유안진 시인이 언급한 것처럼 “놓치고 버리고 잃고” 써왔던 “얼마나 좋은, 정겨운, 적절한 언문적인 시어들”을 적극 발굴해서 활용하고 있다. 가령 글씨를 아무렇게나 함부로 쓴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개발새발’, 잡초의 방언인 ‘지슴’, 주저하지 않고 얼른 하는 동작의 ‘든손’, 쭉정이나 잡것이 섞이지 아니한 곡물 ‘알곡’, 돌로 만든 절구 ‘돌확’, 덜 마른 장작 ‘희나리’(희아리의 방언인 희나리는 조금 상한 채로 말라서 군데군데 흰 빛깔의 얼룩이 진 고추), 괴어 있는 물을 빠지게 하거나 어떤 경계를 짓기 위하여 얕게 판 작은 도랑 ‘갈개’ 등 점차 사라지고 있는 “발음하고 나면 혀끝이 촉촉”해지는 우리 고유어를 되살려 쓰고 있다.
특히 “할머니께서 자주 쓰시던 따스한 말” ‘양알’은 사전에서 찾을 수 없지만, 얌치(마음이 맑고 깨끗하거나 부끄러움을 아는 태도)의 방언인 얌통머리의 반대쪽에 놓인, “타인의 안부”를 묻는, “누군가를 배려하는”, “봄처럼 따뜻한” 말이다. 시인은 이에 그치지 않고 ‘with’, ‘SNS와 SOS’, ‘NEED’, ‘DJ’와 같은 외래어의 접목도 시도하고 있다. 이 둘의 동거는 서먹하거나 불화하지 않고 그윽한 풍경을 자아낸다. 언어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나 생성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이나 행동, 사유의 세계를 객관화하고 보존하려 한다는 것은 시인은 ‘언어의 시각’ 연작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마르틴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언어라는 가옥 안에 인간은 거주한다. 사유가와 시인은 이러한 가옥의 파수꾼이다. 언어는 존재 진리의 집인데도 불구하고, 언어는 우리에게 아직도 자신의 본질을 거절하고 있다”고 말했다. 언어가 없다면 우리는 존재에 대해 말할 수 없고, 사유와 행동의 기록도 불가능하다. 언어는 존재나 사유를 위한 도구가 아니라 세계와 사물을 인식하는 통로다. 그 통로를 통해 존재는 언어로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 그 말을 경청하고 사유하는 것이 시인이다.
배정숙 시인의 언어에 대한 시각은 사물보다 진술과 행동과 더 밀접한 연관을 가진다. ‘언어의 시각’ 연재 중 첫 번째 시 「먼」은 “선도 안 보고 혼인이 이루어지던 시절”의 뒷간과 사돈네는 먼 것이 좋다는 말에 속아 덜컥 혼사를 승낙한 상황을 다루고 있다. 삭임-인내의 시작이지만, 시인은 이에 머물지 않고 ‘억척’이라는 기질을 투척한다. ‘먼’은 단지 물리적 심리적 거리만을 의미하지 않고, 의존 대상에서의 분화와 미래에 대한 불안 등을 함축한 시어다. 사전 정보가 부재하고, 깊게 생각할 여력도 없는 혼사는 맹점을 드러낸다. “발설하기 민망한” “무서운 민낯”을 마주한 삶은 “슬픔을 호명”한다. 그나마 나은 것은 “까마득 먼 사랑”이 차츰 가까워지고, “하루를 늘려주는 착한 노동” 덕분에 배고픔을 면했다는 것이다. 시인은 “개발새발의 필법”과 “무모한 흘림체”를 거쳐 새로운 필체를 완성한다.
언어의 집에 거주하는 시인은 고유 시어뿐 아니라 내면의 생명성과 다양한 관계성, 농경사회의 풍속 등을 농밀하고도 선명한 문장으로 펼쳐놓는다. 화려하게 수놓은 문장의 만찬을 한껏 즐기다보면 “우주가 숨을 멈추고 잠시 묵상”(「야단법석(野壇法席)」)하는 듯하다. 다투어 화려한 들꽃의 문장에 현혹되지 않고 “비움으로 부레를 채우는 물옥잠”의 지혜와 서로 시비의 실마리로 끌어 일으키는 야기요단(惹起鬧端)의 한 말씀으로 채워놓는 것을 시인은 잊지 않는다.
배정숙 시인의 『불친절한 오후가 향기로울 때』는 자기 서사, 혹은 가족사를 농밀하고도 정밀한 언어로 다듬는다. 유안진 시인이 언급한 것처럼 “놓치고 버리고 잃고” 써왔던 “얼마나 좋은, 정겨운, 적절한 언문적인 시어들”을 적극 발굴해서 활용하고 있다. 가령 글씨를 아무렇게나 함부로 쓴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개발새발’, 잡초의 방언인 ‘지슴’, 주저하지 않고 얼른 하는 동작의 ‘든손’, 쭉정이나 잡것이 섞이지 아니한 곡물 ‘알곡’, 돌로 만든 절구 ‘돌확’, 덜 마른 장작 ‘희나리’(희아리의 방언인 희나리는 조금 상한 채로 말라서 군데군데 흰 빛깔의 얼룩이 진 고추), 괴어 있는 물을 빠지게 하거나 어떤 경계를 짓기 위하여 얕게 판 작은 도랑 ‘갈개’ 등 점차 사라지고 있는 “발음하고 나면 혀끝이 촉촉”해지는 우리 고유어를 되살려 쓰고 있다.
특히 “할머니께서 자주 쓰시던 따스한 말” ‘양알’은 사전에서 찾을 수 없지만, 얌치(마음이 맑고 깨끗하거나 부끄러움을 아는 태도)의 방언인 얌통머리의 반대쪽에 놓인, “타인의 안부”를 묻는, “누군가를 배려하는”, “봄처럼 따뜻한” 말이다. 시인은 이에 그치지 않고 ‘with’, ‘SNS와 SOS’, ‘NEED’, ‘DJ’와 같은 외래어의 접목도 시도하고 있다. 이 둘의 동거는 서먹하거나 불화하지 않고 그윽한 풍경을 자아낸다. 언어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나 생성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이나 행동, 사유의 세계를 객관화하고 보존하려 한다는 것은 시인은 ‘언어의 시각’ 연작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마르틴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언어라는 가옥 안에 인간은 거주한다. 사유가와 시인은 이러한 가옥의 파수꾼이다. 언어는 존재 진리의 집인데도 불구하고, 언어는 우리에게 아직도 자신의 본질을 거절하고 있다”고 말했다. 언어가 없다면 우리는 존재에 대해 말할 수 없고, 사유와 행동의 기록도 불가능하다. 언어는 존재나 사유를 위한 도구가 아니라 세계와 사물을 인식하는 통로다. 그 통로를 통해 존재는 언어로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 그 말을 경청하고 사유하는 것이 시인이다.
배정숙 시인의 언어에 대한 시각은 사물보다 진술과 행동과 더 밀접한 연관을 가진다. ‘언어의 시각’ 연재 중 첫 번째 시 「먼」은 “선도 안 보고 혼인이 이루어지던 시절”의 뒷간과 사돈네는 먼 것이 좋다는 말에 속아 덜컥 혼사를 승낙한 상황을 다루고 있다. 삭임-인내의 시작이지만, 시인은 이에 머물지 않고 ‘억척’이라는 기질을 투척한다. ‘먼’은 단지 물리적 심리적 거리만을 의미하지 않고, 의존 대상에서의 분화와 미래에 대한 불안 등을 함축한 시어다. 사전 정보가 부재하고, 깊게 생각할 여력도 없는 혼사는 맹점을 드러낸다. “발설하기 민망한” “무서운 민낯”을 마주한 삶은 “슬픔을 호명”한다. 그나마 나은 것은 “까마득 먼 사랑”이 차츰 가까워지고, “하루를 늘려주는 착한 노동” 덕분에 배고픔을 면했다는 것이다. 시인은 “개발새발의 필법”과 “무모한 흘림체”를 거쳐 새로운 필체를 완성한다.
언어의 집에 거주하는 시인은 고유 시어뿐 아니라 내면의 생명성과 다양한 관계성, 농경사회의 풍속 등을 농밀하고도 선명한 문장으로 펼쳐놓는다. 화려하게 수놓은 문장의 만찬을 한껏 즐기다보면 “우주가 숨을 멈추고 잠시 묵상”(「야단법석(野壇法席)」)하는 듯하다. 다투어 화려한 들꽃의 문장에 현혹되지 않고 “비움으로 부레를 채우는 물옥잠”의 지혜와 서로 시비의 실마리로 끌어 일으키는 야기요단(惹起鬧端)의 한 말씀으로 채워놓는 것을 시인은 잊지 않는다.
불친절한 오후가 향기로울 때 (배정숙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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