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음을 쥐고 있는 뜨거운 손끝 - 현대시세계 시인선 158

붉음을 쥐고 있는 뜨거운 손끝 - 현대시세계 시인선 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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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시간의 상자’ 안팎의 시차와 감정, 기억과 은밀하게 내통한 고백의 시들
2013년 『시에』로 등단하고 2015년 첫 시집 『만 개의 골목』을 출간했던 유성임 시인이 8년 만에 두 번째 시집 『붉음을 쥐고 있는 뜨거운 손끝』을 현대시세계 시인선 158번으로 출간했다.
유성임 시인은 ‘시간의 상자’ 하나를 가지고 있다. 혼자만의 공간에 꼭꼭 숨겨둔 상자 속에는 기억, 추억, 사랑, 상처, 시, 비, 저녁 등이 들어 있다. 시인은 곁에 사람이 없을 때마다 상자를 열고는 가만히 안을 들여다본다. 상자 속의 시간은 우리의 생각처럼 흐르지 않는다. 서서히 흐르거나, 고여 있거나 역행하기도 한다. 하지만 상자 밖의 시간은 시시각각 변하면서 빠르게 앞으로 흘러간다. 상자 밖에서 상자 안을 들여다보는 시인도 차츰 변해간다.
상자 밖의 ‘흐름’과 상자 안의 ‘지체 혹은 멈춤’, 그 시간의 간극과 파장에서 ‘시적인 것’이 생겨난다. 상자 안과 밖의 시차와 감정이 ‘시적인 것’과 결합해 펼쳐 보이는 세계는 현실 이전의 기억과 내통하는 은밀한 고백이다. 상자 밖으로 나온 고백은 급작스러운 환경 변화에 현실과의 결합을 망설이다가 이내 사물을 소환한다. 사물과 ‘시적인 것’이 잠시 멈췄던 시간을 되돌리며 시를 탄생시킨다.
사진이 ‘빛의 예술’이라면 시는 ‘언어의 예술’이라 할 수 있다. 시는 짧은 순간에 포착한 이미지와 기억(경험), 상상을 언어로 형상화한 것이다. 유성임 시인에게 시는 무엇일까. 「시간의 진심」에 의하면 시를 쓸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진심”이고, 시작(詩作)은 시의 마트에서 잘 숙성된 시어를 골라 “발효된 시간”을 거치는 것이다. 발효에서 숙성에 이르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착상에서 전개, 상상 그리고 사유하는 시간을 거쳐야 한 편의 시가 완성된다는 사실을 시인은 “작은 젓갈 병”에 붙어 있는 “회사 상호의 부제목”을 통해 확인한다.
“회사 상호”를 믿고 젓갈을 구매하듯, 시인의 이름을 믿고 시를 읽고 시집을 산다는 것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숙성되지 않은 시는 시행착오를 겪는다. 숙성도 아닌 발효되기 전에 시작하면 “문이 열리지” 않아 “순간 아득한 벼랑으로 떨어”지기도 한다. 쉽게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오래 서성대면 목적조차 잊어버리고 삼천포로 빠질 수도 있다. “개운하지 않”지만, 그래도 잠이라는 발효의 시간이 경과하면 “암흑 같은 나의 머릿속에 단비”가 내려 한 편의 시를 쓸 수 있을 것이다.
김상미 시인은 “유성임 시인이 8년 만에 두 번째 시집을 출간했다. 반갑고, 고맙다. 『붉음을 쥐고 있는 뜨거운 손끝』으로 시의 상승 음계를 한 뜸 한 뜸 시침질하고 감침질하고 박음질해낸 시편들을 어둠이 오기 전의 저녁, 비 오는 저녁의 그리움처럼 펼쳐놓았다. 훌쩍 불혹을 넘긴 세월. 그 사이 많은 일이 있었고, 많은 날이 지나갔고, 사는 방식도 조금씩 달라졌지만, 시인은 시를 놓치지 않기 위해 피톤치드 가득한 시어를 찾아, 시를 찾아 마트에도 가고 노량진 학원가, 고속도로 휴게소, 36번도로와 50번도로, 논골담길, 몰운대, 남영역, 한여름의 바닷가, 지하동굴… 갈 수 있는 곳은 어디든 가고 또 갔다. 그때마다 품 안에 숨긴 회한의 시계는 가차 없이 밤 11시 59분에서 멈추었지만, 기운 내! 시인은 붉음을 쥐고 있는 뜨거운 손끝을 놓지 않고 500년을 버틴 못난이 소나무처럼 그 시간 속에, 그 일상 속에 가감 없이 자신의 시를 풀어놓았다. 멈추었던 노고의 시계가 돌아가고 시인에게 새 아침이 밝아오길 기대한다”며 축하의 말을 전했다.
저자

유성임

서울에서태어났다.
한국방송통신대국어국문학과를졸업했다.
2013년『시에』로등단했다.
2015년첫시집『만개의골목』을출간했다.

목차


1부
바람의공양·13
달리고싶다·14
저녁의위치·15
분위기가그랬다·16
쉼표·17
11시59분에대하여·18
비오는저녁의그리움·19
경복궁별빛야행·20
시간의진심·22
슬픔을만나다·23
포맷or백업·24
버킷리스트·26
치열과희열·27
같은또다른·28
카페신양리·29

2부
작은빛마저간절했던날들·33
아스팔트의살인·34
순간이우울한하루가되었다·35
초원의전설·36
지금은동굴탐험중·37
수향마을·38
부팅·40
퇴직·42
달력1·43
달력2·44
고독사·45
메모리·46
갱년기·47
경계·48
기운내·50

3부
건너편여자·53
숲을걷다·54
어둠이오기전의저녁·56
당신의사랑은알수없어요·58
논골담길·59
이모·60
김택진할아버지의명언·62
힘든말·63
경로이탈·64
사는방식·66
꽃물·67
몰운대·68
돌아가고싶은곳·69
작은행복·70
바늘꽃·71

4부
남영역에서·75
공범·76
계절의기억·77
조우·78
두부·79
흑백사진·80
회전초밥·82
애국가·83
어느기관사이야기·84
폐허·85
여름의민낯·86
그림을그린이·87
지하철악사·88
바람이불면·89
처음으로돌아간다면·90

해설‘시간의상자’엿보기/김정수·91

출판사 서평

책속에서

<그림을그린이>

가을날그림한점
몇해동안오롯이그곳에걸려있었다
마지막해가머물다사라진들판은
잠시핏빛으로물들었고
다시드러난풍경은명암이엇갈리고있다
문지르며만들어내던파스텔
붉음과어둠을쥐고있는손끝이뜨거웠다

작은집에불이켜졌다
그림을그린이가창밖을바라보고있다
어둠을밀어내는빛
소파에앉아
나의그림속에살고있는나를만났다

<시간의진심>

시어를찾으러마트에갔다
이른시간이라아직문이열리지않았다
엊그제시어는진열대에놓여있었다
잊지않으려몇번이고외웠는데
순간아득한벼랑으로떨어졌다

마트문앞에서서성이고있는데
오랜만에만난지인
반가워서카페에서신나게수다를떨고집으로돌아왔다
잠을자면서도개운하지않은생각
순간시어를두고왔다는게생각났다
다시시어를찾으러갔다
요즘암흑같은나의머릿속에단비같이눈에띄던큰글자는
진열장어디에도없다
몇번이고진열대를이잡듯뒤졌다
막포기하고돌아서는순간7㎝나될까
작은젓갈병이눈에들어왔다
오징어젓갈,낙지젓갈상표보다더작은회사상호의부제목
숙성된젓갈처럼나에게진심을반쯤내어준상표
누군가발효된시간을진심으로꾹꾹담아두었다

<저녁의위치>

저녁은늘뒤를따라오고있었다

골목에서술래잡기를할때도
밥먹으라고부를때도
5학년때처음엄마의피가붉은색이아닌
검은색이라느꼈을때도
대문앞에서쪼그려앉아
병원에서늦도록돌아오지않는
엄마를기다리던날에도

아직엄마가많이필요한데
사춘기가다지나가도록
저녁없는밤으로연결되었다

첫아이를낳던여름날저녁
홀로긴터널을빠져나올때도
저녁이뒤를따라오고있었다

하나둘가족이돌아오고
어느틈엔가나는
뒤를따라가는저녁이되고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