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속에서
<그림을그린이>
가을날그림한점
몇해동안오롯이그곳에걸려있었다
마지막해가머물다사라진들판은
잠시핏빛으로물들었고
다시드러난풍경은명암이엇갈리고있다
문지르며만들어내던파스텔
붉음과어둠을쥐고있는손끝이뜨거웠다
작은집에불이켜졌다
그림을그린이가창밖을바라보고있다
어둠을밀어내는빛
소파에앉아
나의그림속에살고있는나를만났다
<시간의진심>
시어를찾으러마트에갔다
이른시간이라아직문이열리지않았다
엊그제시어는진열대에놓여있었다
잊지않으려몇번이고외웠는데
순간아득한벼랑으로떨어졌다
마트문앞에서서성이고있는데
오랜만에만난지인
반가워서카페에서신나게수다를떨고집으로돌아왔다
잠을자면서도개운하지않은생각
순간시어를두고왔다는게생각났다
다시시어를찾으러갔다
요즘암흑같은나의머릿속에단비같이눈에띄던큰글자는
진열장어디에도없다
몇번이고진열대를이잡듯뒤졌다
막포기하고돌아서는순간7㎝나될까
작은젓갈병이눈에들어왔다
오징어젓갈,낙지젓갈상표보다더작은회사상호의부제목
숙성된젓갈처럼나에게진심을반쯤내어준상표
누군가발효된시간을진심으로꾹꾹담아두었다
<저녁의위치>
저녁은늘뒤를따라오고있었다
골목에서술래잡기를할때도
밥먹으라고부를때도
5학년때처음엄마의피가붉은색이아닌
검은색이라느꼈을때도
대문앞에서쪼그려앉아
병원에서늦도록돌아오지않는
엄마를기다리던날에도
아직엄마가많이필요한데
사춘기가다지나가도록
저녁없는밤으로연결되었다
첫아이를낳던여름날저녁
홀로긴터널을빠져나올때도
저녁이뒤를따라오고있었다
하나둘가족이돌아오고
어느틈엔가나는
뒤를따라가는저녁이되고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