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사유하고 시를 쓰고 끝없이 탈주하는 운명을 드러낸 신종호의 시들
1997년 『현대시』로 등단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한 신종호 시인이 2017년 두 번째 시집 『모든 환대와 어떤 환멸』을 출간한 후 만 7년 만에 세 번째 시집 『해부되는 정신의 과잉』을 현대시세계 시인선 160번으로 출간했다. 그의 두 번째 시집 『모든 환대와 어떤 환멸』에 대해 성귀수 시인은 “보통의 시인들이 좇게 마련인 청각영상이나 비유의 조화로움이라고 하는 보편적 미덕의 강박에서 완전히 벗어난 듯” 보이며, 시집에 실린 각각의 시편들이 “성벽(城壁)을 때리는 투석용 화강암 덩어리 같다”라고 비유했다. 나아가 신종호 시인은 파편화된 상처들을 역치(易置)하거나 전치(轉置)함으로써, 독특하게 자각된 세계의 모순을 결코 잊을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 앞에 제시하고 있다고 평했다. 이러한 점은 세 번째 시집 『해부되는 정신의 과잉』에도 드러나고 있다.
신종호의 시집 『해부되는 정신의 과잉』을 보면 우선 시집 제목이 난해하다 느껴질 것이다. 그렇지 않겠지만 말 그대로 따라가면 정신은 과잉되어 있고 과잉된 정신은 해부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과잉된 정신을 해부하는 것이야말로 시의 한 축이라 해도 그럴듯하다는 데에 이른다. 예술이 표상 혹은 재현으로서의 세계와 단절했을 때 필연적으로 어둠, 무의식, 죽음 등에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다. 신종호의 시는 그 운명을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시종일관의 태도를 보여준다.
시인의 살아온 내력으로 회한, 옛날, 귀로를 말하는 경우에도 보편적 감성으로서의 그것이 아니라 생경한 어떤 측면이 늘 배치되어 있다. 범박하게 이야기하면 기표와 기의 세계에서 누락된 존재에 대한 탐구는 그의 시를 어렵게 만든다. 그는 이미 합의된 기호로서 아름다움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다. 신종호 시인의 시에 끝없이 나타나는 그와 그녀, 나와 당신의 복잡한 수식적 관계는 기호의 혼돈에서 비롯된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기표와 기의의 합의에 포획되지 않은 존재에 대한 탐구의 형식이 그에게는 ‘시’라는 말이다.
시집 1부는 ‘사랑의 회고록’이라는 부제의 연작이다. 어쩌면 사랑 그리고 회고록 둘 다 낡은 인상의 단어들이다. 그러나 이 시어들이 품은 일상의 정념을 그리는 것이 이 연작의 목표가 아님은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 사랑의 부재(不在)는 사랑이라는 관념 혹은 행위에 대해 비극적 포즈를 보여주기도 한다. 시적 화자에게 사랑이란 사랑이라는 표상의 외부라는 것이다. 표상에 가려진 어떤 것 즉 들뢰즈가 말한 감각할 수 있지만, 감각밖에 할 수 없는 그러나 강밀하게 밀려들어오는 실체가 사랑인 셈이다. 표상 너머의 사랑에 대한 탐구가 사랑의 회고록이라 할 수 있다.
이와 함께 『해부되는 정신의 과잉』에는 기호에 관한 관심과 탐구는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구조주의적 관점 특별히 롤랑 바르트의 기호론의 관점에서 보면 언어라는 1차적 기호는 신화의 기표로 작용하며 특정한 계층의 세계관과 이데올로기를 보편화하게 된다. 그것은 롤랑 바르트의 말로 하자면 거짓된 자연스러움으로 권력을 행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럴 때 언어는 다만 의사소통의 수단을 넘어 우리의 삶을 규율하는 보이지 않는 강력한 기제로 작동하게 된다. 예술가들이 언어 기호에 끊임없이 의심을 눈길을 보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한 점을 잘 보여주는 시가 「르네 마그리트 그림처럼」이다.
시 「르네 마그리트 그림처럼」의 배경은 ‘재래시장’이다. 족발집, 정육점, 해장국집, 방앗간 등의 풍경은 현실의 재현에 가까운 시적 소재들이다. 그로테스크한 동물의 육체성에 대한 묘사를 통한 보이는 연민은 다만 시 전면의 의미망일 뿐이다. 시적 화자가 내세운 르네 마그리트는 애초에 재현의 공간과 원리를 파괴한 클레나 칸딘스키와는 다르게 재현의 낡은 공간을 그대로 수용하고 재현의 원리를 구현한 듯 보이게 회화를 구성하고 있다. 두 화가가 보이지 않는 것을 그리기 위해 보이는 것에 대한 묘사를 포기했다면, 르네 마그리트는 보이는 것과 보이는 것 속에 내재한 보이지 않는 것에 관심이 있었다고 푸코는 말하고 있다. 재현의 원리에 해당하는 ‘유사’는 사물에 대해 고정된 인식을 우리에게 부여하지만 ‘상사’는 원본 없는 복제의 무한한 반복을 통하여 사물 속에 내재된 형상을 우리에게 새롭게 보여준다.
표제시 「해부되는 정신의 과잉」처럼 정신의 과잉을 해부하고자 하는 욕망도 동일성의 세계를 살아가도록 암암리에 강요받는 현실에 대항하는 혼돈스러운 정신의 자기 검열이라 할 수 있을 터이다. 신종호의 시를 읽으면 인간은 왜 투쟁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골똘히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이 시대에 우리의 싸움은 시의 운명과도 유사하게 패배의 운명을 타고난 것이 아닌가 한다. 사유하고 시를 쓰고 끝없이 탈주하는 것이 시인의 운명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한다.
이번 시집의 해설을 쓴 우대식 시인은 이 세계의 모순에 맞서 시인이 지향하고자 하는 정신의 향방을 “동일성의 세계를 살아가도록 암암리에 강요받는 현실에 대항하는 혼돈스러운 정신의 자기 검열”이라고 설명하면서 합의된 언어로 포착되지 않는, 즉 기표와 기의가 포획하지 못한 실존의 누락된 영역을 탐구하는 탈주의 사유가 이번 시집에 실린 시편들의 기류라고 설명한다.
신종호 시집 『해부되는 정신의 과잉』은 사랑의 부재와 불가능성, ‘나’라는 존재의 분열, 차이를 무화시키고 동일성 안으로 편입시키려는 자본의 논리에 대한 성찰, 삶과 죽음의 교착에 대한 실존적 사유를 통해 자기 긍정과 자기 계발에 몰두하는, 시인의 표현을 빌자면 “모멸의 바람이 유령처럼 부는”(「꼬리의 모노드라마」) 이 시대의 어두운 뒤편을 포괄적으로 탐색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러한 점은 시의 난해함이 난해함으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난해함이 한 시인의 시적 개성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 제기이다.
신종호의 시집 『해부되는 정신의 과잉』을 보면 우선 시집 제목이 난해하다 느껴질 것이다. 그렇지 않겠지만 말 그대로 따라가면 정신은 과잉되어 있고 과잉된 정신은 해부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과잉된 정신을 해부하는 것이야말로 시의 한 축이라 해도 그럴듯하다는 데에 이른다. 예술이 표상 혹은 재현으로서의 세계와 단절했을 때 필연적으로 어둠, 무의식, 죽음 등에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다. 신종호의 시는 그 운명을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시종일관의 태도를 보여준다.
시인의 살아온 내력으로 회한, 옛날, 귀로를 말하는 경우에도 보편적 감성으로서의 그것이 아니라 생경한 어떤 측면이 늘 배치되어 있다. 범박하게 이야기하면 기표와 기의 세계에서 누락된 존재에 대한 탐구는 그의 시를 어렵게 만든다. 그는 이미 합의된 기호로서 아름다움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다. 신종호 시인의 시에 끝없이 나타나는 그와 그녀, 나와 당신의 복잡한 수식적 관계는 기호의 혼돈에서 비롯된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기표와 기의의 합의에 포획되지 않은 존재에 대한 탐구의 형식이 그에게는 ‘시’라는 말이다.
시집 1부는 ‘사랑의 회고록’이라는 부제의 연작이다. 어쩌면 사랑 그리고 회고록 둘 다 낡은 인상의 단어들이다. 그러나 이 시어들이 품은 일상의 정념을 그리는 것이 이 연작의 목표가 아님은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 사랑의 부재(不在)는 사랑이라는 관념 혹은 행위에 대해 비극적 포즈를 보여주기도 한다. 시적 화자에게 사랑이란 사랑이라는 표상의 외부라는 것이다. 표상에 가려진 어떤 것 즉 들뢰즈가 말한 감각할 수 있지만, 감각밖에 할 수 없는 그러나 강밀하게 밀려들어오는 실체가 사랑인 셈이다. 표상 너머의 사랑에 대한 탐구가 사랑의 회고록이라 할 수 있다.
이와 함께 『해부되는 정신의 과잉』에는 기호에 관한 관심과 탐구는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구조주의적 관점 특별히 롤랑 바르트의 기호론의 관점에서 보면 언어라는 1차적 기호는 신화의 기표로 작용하며 특정한 계층의 세계관과 이데올로기를 보편화하게 된다. 그것은 롤랑 바르트의 말로 하자면 거짓된 자연스러움으로 권력을 행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럴 때 언어는 다만 의사소통의 수단을 넘어 우리의 삶을 규율하는 보이지 않는 강력한 기제로 작동하게 된다. 예술가들이 언어 기호에 끊임없이 의심을 눈길을 보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한 점을 잘 보여주는 시가 「르네 마그리트 그림처럼」이다.
시 「르네 마그리트 그림처럼」의 배경은 ‘재래시장’이다. 족발집, 정육점, 해장국집, 방앗간 등의 풍경은 현실의 재현에 가까운 시적 소재들이다. 그로테스크한 동물의 육체성에 대한 묘사를 통한 보이는 연민은 다만 시 전면의 의미망일 뿐이다. 시적 화자가 내세운 르네 마그리트는 애초에 재현의 공간과 원리를 파괴한 클레나 칸딘스키와는 다르게 재현의 낡은 공간을 그대로 수용하고 재현의 원리를 구현한 듯 보이게 회화를 구성하고 있다. 두 화가가 보이지 않는 것을 그리기 위해 보이는 것에 대한 묘사를 포기했다면, 르네 마그리트는 보이는 것과 보이는 것 속에 내재한 보이지 않는 것에 관심이 있었다고 푸코는 말하고 있다. 재현의 원리에 해당하는 ‘유사’는 사물에 대해 고정된 인식을 우리에게 부여하지만 ‘상사’는 원본 없는 복제의 무한한 반복을 통하여 사물 속에 내재된 형상을 우리에게 새롭게 보여준다.
표제시 「해부되는 정신의 과잉」처럼 정신의 과잉을 해부하고자 하는 욕망도 동일성의 세계를 살아가도록 암암리에 강요받는 현실에 대항하는 혼돈스러운 정신의 자기 검열이라 할 수 있을 터이다. 신종호의 시를 읽으면 인간은 왜 투쟁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골똘히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이 시대에 우리의 싸움은 시의 운명과도 유사하게 패배의 운명을 타고난 것이 아닌가 한다. 사유하고 시를 쓰고 끝없이 탈주하는 것이 시인의 운명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한다.
이번 시집의 해설을 쓴 우대식 시인은 이 세계의 모순에 맞서 시인이 지향하고자 하는 정신의 향방을 “동일성의 세계를 살아가도록 암암리에 강요받는 현실에 대항하는 혼돈스러운 정신의 자기 검열”이라고 설명하면서 합의된 언어로 포착되지 않는, 즉 기표와 기의가 포획하지 못한 실존의 누락된 영역을 탐구하는 탈주의 사유가 이번 시집에 실린 시편들의 기류라고 설명한다.
신종호 시집 『해부되는 정신의 과잉』은 사랑의 부재와 불가능성, ‘나’라는 존재의 분열, 차이를 무화시키고 동일성 안으로 편입시키려는 자본의 논리에 대한 성찰, 삶과 죽음의 교착에 대한 실존적 사유를 통해 자기 긍정과 자기 계발에 몰두하는, 시인의 표현을 빌자면 “모멸의 바람이 유령처럼 부는”(「꼬리의 모노드라마」) 이 시대의 어두운 뒤편을 포괄적으로 탐색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러한 점은 시의 난해함이 난해함으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난해함이 한 시인의 시적 개성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 제기이다.
해부되는 정신의 과잉 - 현대시세계 시인선 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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