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제일 높은 의자

세상에서 제일 높은 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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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죽음과 이별, 실직과 건강 이상 등 좌절에서 희망 길어올린 이현의 시들
2021년 계간 『다시올문학』에 시를 발표하고 2022년에는 월간 『우리詩』 평론 부문 신인상을 받으면서 평론가로서도 활동 중인 이현 시인이 첫 시집 『세상에서 제일 높은 의자』를 현대시세계 시인선 184번으로 출간되었다.
이현의 시는 ‘상실’에서 온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나 이별, 오래 다니던 직장에서의 갑작스러운 퇴직이나 경제적 어려움, 꿈꾸던 일의 좌절이나 건강 문제 등 상실의 원인은 다양하다. 이런 일을 겪으면 ‘나’라는 존재는 사라지고, 굳게 믿고 있던 ‘관계’와 ‘세계관’은 무너지기 시작한다. 또 이현에게 길 위의 유배는 익숙한 공간과 세계의 탈출, 자아를 찾는 과정, “나를 떠나/ 나에게 돌아오는”(「짧은 여행의 기록」) 반성의 시간이다. 또한 잠시 곁길로 들어섰다가 돌아오는 동시에 ‘시 쓰기’의 길로 들어서는 계기와 다름없다. 길 위에서 다시 끄집어낸 시는 “오랜 유배는 끝날 것”(「땅끝 2」)이라는 희망의 발견과 다름없다.
이현 시인에게 상실은 ‘바닥’을 확인하는 작업이다. 시 「바닥이 환하다」에서 보듯 바닥에 이르기 전에는 바닥인 줄 모른다. 한없이 추락하다가 바닥에 이르고 나서야 겨우 바닥인 줄 인식한다. 바닥을 대하는 방식과 반응은 저마다 다르게 드러난다. “버려진 사람들”(「마음에 심는 불씨」)은 외로움으로, “끝내는 자신마저 바닥으로 내던지”(「넝쿨」)는 사람은 절망과 증오로, “네 생을/ 허옇게 눌어붙은 (설렁탕 국물) 바닥까지 마시”(「한겨울의 고해성사」)는 사람은 반성하는 마음으로, “생의 어둠도// 끝 모를 심연/ 바닥의 안에서 시작”(「후포」)됐음을 아는 사람은 새로운 기분으로, 꽃이 “떨어져도 피는 것”(이하 「자목련」)임을 아는 사람은 “물빛 바닥”에서 흐드러지게 피는 꽃을 보는 것으로, “바닥을 딛고 성공한”(「목숨의 진화론」) 사람은 감격의 눈물로…. 외로움과 절망, 증오를 내려놓고 내 삶을 반성하는 사람은 “낮은 바닥 평평하게 나이 들어가는 일”(「납작하다는 말」)임을 자각한다.
표제시 「세상에서 제일 높은 의자」는 우연히 마주친 “연인”을 관찰하면서, 그 다정하고도 따스한 모습에 위안을 얻는다. “눈발이 굵어지는” 한겨울에 콩나물국밥을 먹고 있는데 식당 문이 열리며 “다리를 저는 남자와 아주 작디작은 여자”가 들어선다. 먹는 것도 잊어버리고 연인을 추적한다. “구석 자리에 앉”은 여자의 키가 너무 작아 제대로 먹을 수 없다. 그러자 같이 온 남자는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방석처럼 접고는 여자를 안아 그 위에 앉힌다. 내 옷을 방석으로 내어준다는 건 배려의 차원을 넘어 상대를 존중하고 존경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내 분신과도 같은 옷을 가장 낮은 자리에 깔고 그 위에 상대를 앉히기 때문이다. 나를 낮춰 상대를 올리는 행동은 “사랑을 잃고 떠돌던” 내 눈에 한 편의 “동화”처럼 비친다. 진실한 사랑은 신체적 결핍이나 경제력보다 상대를 먼저 생각하고 배려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현은 일찍이 기형도가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빈집」)라고 노래한 바로 그 자리에 지금 서 있다. “평소 오고 가던 출퇴근 길”(이하 「해장국을 먹다 보면」)이나 “늘상 마주쳐 익숙하던 집”, “당신 기다리던 골목” 같은 익숙한 것과 작별하고, 낯선 “풍경 너머 다른 세상(의) 문”을 열고 있다. “아무 시나/ 쓰고 싶지 않아” 뒤에 밀려두었던 시인의 길을 걸으려는 것이다. 소시민들의 소소한 삶과 행복을 목도하고, 길 위에서 나를 내려놓은 덕분이다. “아무 시도/ 쓸 줄 모르게 되었다” 겸손해하지만, 첫 시집 『세상에서 제일 높은 의자』는 ‘나’를 지켜 ‘당신’의 마음을 얻으려는 영혼의 고백록으로 부족함이 없다.
저자

이현

저자:이현
1965년경기도포천출생.중앙대학교국어국문학과및동대학원에서현대문학을전공했다.군입대전풀잎동인에참여하여동인지『풀잎』에,제대후에는세평(세석평전)동인을통해『그리움이나사랑은』,『별자리가보이지않는광장』등동인시집에시를발표하며시작활동을했다.이후오랫동안개인적인사정으로인하여침묵의시간을가졌다.그러다가2021년계간『다시올문학』에시를발표하고작은시집『행성으로떠도는달』을내놓으며작품활동을다시시작했다.2022년에는월간『우리詩』평론부문신인상을받으면서평론가로서도활동중이다.

목차

시인의말·5

1부물의날들
수선화·13
무게·14
홍시하나·15
조신몽·16
서해에서·18
민들레꽃·20
미생지신(未生之信)1·21
미생지신(未生之信)2·22
겨울엽서·23
그게중요한건아니지·24
납작하다는말·26
해장국을먹다보면·27
저녁바다의기억·28
터미널·30
부고(訃告)·32

2부상처위에타는불
상처의힘·35
어긋나버리다·36
주소없는바람·37
길이된몸·38
오래된독서·39
칼·40
변산노을·41
넝쿨·42
짧은여행의기록·44
바닥은환하다·46
상실에대하여·48
조율사·50
취중진담·52
자목련·53
목숨의진화론·54

3부너로하여사랑에눈을뜨고
저녁강·57
세상에서제일높은의자·58
수채화법·59
가을삽화한장·60
마음에심는불씨·61
광장시장·62
어떤경주·64
어머니의건축술·65
유구한전통·66
메뉴판에걸린눈동자·68
한겨울의고해성사·69
눈내리는망자의장례식·70
성자이야기·72
흐르는계단·73
주공임대아파트에피는봄꽃·74

4부길위에서깨닫는것
헤이리느티나무·77
길위의단상·78
빈들·79
그나무·80
후포·82
들가운데서·84
땅끝1·85
땅끝2·86
다산생가에서·87
정선기행1·88
정선기행2·89
겨울숲한가운데서·90
항아리·92
원대리·94
연·95

해설자아와세계를지키려는첫‘시’도/김정수·97

출판사 서평

책속에서

[표제시]

세상에서제일높은의자
―어느해겨울이야기
--
그날마음도허기진나는,김서린콩나물국밥을몸안으로퍼담고있었어밖은추웠고낮은하늘가득성긴눈발이굵어지는무렵이었지한두숟갈정도의시간이었을까출입문이열리더니,마치기묘한동화의문이열리듯,다리를저는남자와아주작디작은여자하나가다정히손을잡고들어섰지그작은여자는구석자리에앉았지만차려진국밥을먹기엔상이너무높았어어쩌나,다들그연인을쳐다보는데,남자가일어나입고있던옷을성큼,벗어접어여자를안아그위에앉히는거야그때기적같은일이일어났어아주작은그녀가상위로불쑥몸이돋아나더니그남자를바라보며환하게웃기시작했어순간,포개어진남자의옷이새털처럼가벼운날개를달고날아오르기시작했지그를따라재크의콩나무처럼자꾸자꾸자라기시작하던의자도급기야환한구름위까지솟구치며올랐어
-
사랑을잃고떠돌던그해겨울
뿌연창마다하얀눈내리고
길지울듯가득쌓이고
-
그날나는세상에서가장높은사랑을보았던거야
--

[대표시]

상실에대하여
--
어제
바람몹시불었고
강가의꽃들잎새를버렸다
-
오늘
한여자를떠나보낸사내가
가난한골목길외진구석
술취한눈물뽑아놓고사라진다
-
직장잃은가장하나
한적한공원벤치에
하릴없이앉아있다떠난후
초겨울저녁햇살이대신앉는다
-
세상에변함없이영원한것은없구나
-
내일
강가를거닐다가
알몸으로겨울나는나무를보았다
-
골목길돌아오는이슥한밤
하늘의별빛하나가
사내의눈물속에서빛나고있다
-
우연히택시를탔다가
운전대를잡은직장잃은가장의
웃는모습을보았다
-
세상에완벽한바닥이란없구나
--

바닥은환하다
--
봄햇살아려오는환한대낮벤치에누워
솜사탕처럼흘러가는구름바라보다
저가볍고환한구름들어디에서왔을까하다가
구름의고향은깊디깊은땅속수천리
뜨거운내핵이흐르는어둠이아닐까생각했지
-
어린시절저수지에빠진일이있었어허우적댈수록
흉몽에가위눌리듯물아래추락하던몸뚱어리는
기대없이바닥을밝고서야수면위로떠올랐었지
-
지나고보니많은날들을버둥거리며허우적댔어
살아가는동안발을잡아끄는저수지는흔하게있지
바닥을친다는일은누구에게나두렵고험한일근데말야
벗어나려고발버둥치면더깊이가라앉는건다르지않아
-
삶의바닥을친다는건목숨을다시세우는일
칠흑같은밤하늘창공에빛나는별들의고향도
수억광년시간을건너가닿는폐허(廢墟)였겠지
어쩌면바닥이란환하디환한빛들의자궁일지도모르겠어
-
계절마다들판에지천으로흐드러지는꽃들도
여린발목캄캄한어둠속에묻고서피어나는것처럼
하루하루도마음의바닥을치며일어나나아가는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