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희망의 싹 틔우며 생태계 복원하려는 성찰 드러내는 ‘절창의 힘’
경남 사천 연호리에서 출생하여 시집 『마로비벤을 꿈꾸다』, 『그녀의 배꼽 아래 물푸레나무가 산다』를 선보였던 윤덕점 시인이 세 번째 시집 『크고 뜨거운 손』을 현대시세계 시인선 185로 출간했다.
윤덕점 시인을 ‘곡선의 시인’이라 불러도 될 듯하다. 시 「곡선」에서 하늘이 “곡선의 속살 활짝 열어” 뭇 생명에 반응한다고 말한다. 그 실제로 “배추와 무가 날마다 부쩍부쩍 자라는 것은/ 골고루 돌보는 바람, 햇볕과 비의/ 둥글고 온유한 힘이다”라고 표명한다. 물질과 마주 선다는 의미에서 자연 상태에서 “곡선의 아름다움/ 곡선의 황홀”을 느낄 수는 있다. 하지만 그 작용 인자(因子)인 “바람, 햇볕과 비”의 곡선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4차원의 존재라는 각인 때문에 시작부터 끝, 아니 발생했으므로 소멸하리라는 불가역의 직선, 시간관을 각자의 내부에 품고 있기 때문이다. “직선으로 내리던 비도, 햇빛과 바람도/ 땅에 입 맞출 때는 둥글어”지는 사태를 거듭 보고, 또 보다보면 내면화한 진리라 일컫는 것과 다르게 세계와 생을 볼 수 있게 된다.
윤덕점의 시집 『크고 뜨거운 손』에서 시인이 함축한 비의(秘義)는 ‘밥의 힘’이 곧, 관계와 세계에 대한 시인의 성찰을 오롯이 드러낸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피아노, 매니큐어, 희고 가는 손가락”에서 드러나는 가능한 세계에 대한 회한이 아니라 “최고라고 엄지손가락 치켜든 손녀/ 쉼 없이 김밥 욱여넣는 딸”을 보는 현재의 감각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오늘을 살며 앞을 보면 지난 날의 내 뒤가 보인다. 이 자세는 생활에서 단련된 것일 수도, 시적으로 갖추게 된 미덕일 수도 있다.
윤덕점 시인은 ‘크고 뜨거운 손’으로 자신의 생태계를 건강하고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만들려 한다, ‘크고’는 범주의 확대를, ‘뜨거운’은 그 열정, 진정성을 비유한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 ‘일요일’이란 이름이 낯설지만, 그날은 “산불에 집 잃은 시인이 와서 울었다”기 때문에 특별히 기억될 수 있다. 아니다, 사실은 “아침 목욕탕에서 돌아와 마시는/ 북엇국 한 그릇”이 희망의 싹을 움 틔울 수 있겠다고 바라기에, 아니 “제발 그가 이 세상 거품이 아니기를” 하는 바람이 진정한 것이기에 시인의 희망은 밝다.
윤덕점의 시는 슬며시 생의 진면목을 대면케 한다. ‘끙’이다, 앓는 소리가 아니라 “불공평한 세상 다 같이 일으키는 끙,”(「끙」) 소리를 지르다가 “한 대 뽑을 때마다 한번/ 뒤로 나뒹굴며” 악착같은 깻대를 기어이 뽑아내고야 마는 생의(生意)를 본다. 시인은 창가에 우두커니 서 있기보다 삶의 저 왁자지껄, “뿌리와 맞서는 일, 이판사판”으로 더 ‘절창’을 거듭 보여주리라.
윤덕점 시인을 ‘곡선의 시인’이라 불러도 될 듯하다. 시 「곡선」에서 하늘이 “곡선의 속살 활짝 열어” 뭇 생명에 반응한다고 말한다. 그 실제로 “배추와 무가 날마다 부쩍부쩍 자라는 것은/ 골고루 돌보는 바람, 햇볕과 비의/ 둥글고 온유한 힘이다”라고 표명한다. 물질과 마주 선다는 의미에서 자연 상태에서 “곡선의 아름다움/ 곡선의 황홀”을 느낄 수는 있다. 하지만 그 작용 인자(因子)인 “바람, 햇볕과 비”의 곡선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4차원의 존재라는 각인 때문에 시작부터 끝, 아니 발생했으므로 소멸하리라는 불가역의 직선, 시간관을 각자의 내부에 품고 있기 때문이다. “직선으로 내리던 비도, 햇빛과 바람도/ 땅에 입 맞출 때는 둥글어”지는 사태를 거듭 보고, 또 보다보면 내면화한 진리라 일컫는 것과 다르게 세계와 생을 볼 수 있게 된다.
윤덕점의 시집 『크고 뜨거운 손』에서 시인이 함축한 비의(秘義)는 ‘밥의 힘’이 곧, 관계와 세계에 대한 시인의 성찰을 오롯이 드러낸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피아노, 매니큐어, 희고 가는 손가락”에서 드러나는 가능한 세계에 대한 회한이 아니라 “최고라고 엄지손가락 치켜든 손녀/ 쉼 없이 김밥 욱여넣는 딸”을 보는 현재의 감각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오늘을 살며 앞을 보면 지난 날의 내 뒤가 보인다. 이 자세는 생활에서 단련된 것일 수도, 시적으로 갖추게 된 미덕일 수도 있다.
윤덕점 시인은 ‘크고 뜨거운 손’으로 자신의 생태계를 건강하고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만들려 한다, ‘크고’는 범주의 확대를, ‘뜨거운’은 그 열정, 진정성을 비유한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 ‘일요일’이란 이름이 낯설지만, 그날은 “산불에 집 잃은 시인이 와서 울었다”기 때문에 특별히 기억될 수 있다. 아니다, 사실은 “아침 목욕탕에서 돌아와 마시는/ 북엇국 한 그릇”이 희망의 싹을 움 틔울 수 있겠다고 바라기에, 아니 “제발 그가 이 세상 거품이 아니기를” 하는 바람이 진정한 것이기에 시인의 희망은 밝다.
윤덕점의 시는 슬며시 생의 진면목을 대면케 한다. ‘끙’이다, 앓는 소리가 아니라 “불공평한 세상 다 같이 일으키는 끙,”(「끙」) 소리를 지르다가 “한 대 뽑을 때마다 한번/ 뒤로 나뒹굴며” 악착같은 깻대를 기어이 뽑아내고야 마는 생의(生意)를 본다. 시인은 창가에 우두커니 서 있기보다 삶의 저 왁자지껄, “뿌리와 맞서는 일, 이판사판”으로 더 ‘절창’을 거듭 보여주리라.
크고 뜨거운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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