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철학자 이동용은 키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을 읽으면서 신은 인간이라는 위대한 공식을 발견한 철학의 면모를 응시한다.
‘넌 죽을 거야! 반드시 죽을 거야!’ 죽음은 인간에게 확실하다. 그렇다고 해서 삶이 가치도 없고 의미도 없는 것인가? 이런 질문과 함께 이동용은 삶을 위한 철학적 변호를 하는 데 집중한다. 그는 자신의 철학을 이끌고 가는 마차로 이번엔 키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을 선택했을 뿐이다. 만만찮은 고전이다.
희망의 꽃이 피어나는 곳은 절망이다.
아름다운 아침놀은 성스러운 저녁놀을 전제로 한다.
위대한 건강회복은 고통을 딛고 일어설 때 실현된다.
이동용은 키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을 통해서 생철학적 처방과 절망의 기술을 가르쳐준다. 이동용은 이미 생철학이라는 강물의 깊고 긴 곳에 이른 것 같다. 생철학은 말 그대로 인생철학이고, 인간 중심의 철학이지만, 그렇다고 신학이나 형이상학을 거부하지 않는다. 그것이 생철학의 본질이다.
이동용은 즐겨 ‘사람의 삶’, ‘인간의 인생’, ‘존재자의 존재’를 돌림노래나 후렴구처럼 불러 댄다. 그가 말하는 이 개념들, 사람의 삶, 인간의 인생, 존재자의 존재는 늘 현실과 본질이라는 두 개의 세계를 동시에 살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한 쪽은 몸으로 살아야 하는 세상이고, 다른 한 쪽은 생각으로 살아야 하는 세상이라고 가르친다.
사람은 바로 현상과 본질이라는 이 두 개의 세상을 동시에 살아야 하는 숙제를 감당해야 한다. 눈으로 세상의 현상을 보는 것도 문제이고, 생각으로 세상의 본질을 파악하는 것도 문제이다.
아무리 건강해도 결국에는 병이 들고, 그 질병의 결과 누구나 죽음 앞에 서게 될 것이다. 또 아무리 생각을 열심히 해도 결국에는 한계에 직면하게 될 것이고, 생각으로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지경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그때 우리 모두는 일종의 ‘절망’이라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절망은 사람의 일이다. 사람이라서 절망이 존재하는 것이다. 사람이기에 절망을 피해갈 수 없다. 어떤 형식으로든 사람은 절망과 직면할 수밖에 없다. 이럴 때 철학자 이동용은 주저하지 않고 도움의 손길을 내민다. 그는 마치 미켈란젤로의 〈아담의 창조〉에서처럼 사람에게 손을 내밀고 있다. 그는 철학이 허락하는 방식으로 도움을 주고자 한다.
키르케고르는 1813년생이고 1855년에 사망했다. 소위 긴 19세기의 중간 지점을 살아간 덴마크의 철학자이다. 1789년에 발발한 프랑스 대혁명의 불길은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시민과 귀족의 대결이라는 국면은 19세기 전체를 채운다. 귀족은 교회의 교리를 이용해 현실의 일상을 지배했다. 시민은 그런 현실과 맞서 싸웠다.
법의 정신은 교회의 교리가 점령했다. 교회가 모든 것의 기준이 되었다. 현실로 인식되는 현실을 철학자 키르케고르는 인정할 수가 없었다. 키르케고르는 글이라는 형식으로 자신의 현실과 부딪쳤다. 그는 글쓰기에 목숨을 걸었다.
키르케고르의 인생은 42년이라는 짧은 시간을 스쳐지나갔지만, 그가 남겨놓은 글을 어둠을 밝히는 불꽃처럼 여전히 밝기만 하다.
이동용은 철학자 키르케고르가 인도하는 길을 차분히 따라간다. 그는 《죽음에 이르는 병》을 읽으며 《키르케고르와 철학적 절망》이라는 결과물을 만들어 내놓았다.
이동용은 쇼펜하우어에서부터 시작되는 생철학의 물줄기를 치열하게 따라간다. 때로는 거친 여울을 형성하기도 하고 때로는 거울처럼 냉정하면서도 조용하게 깊음을 연출해 내기도 한다.
절망은 사실이다. 절망은 진실이다. 돌아서도 절망은 등 뒤에서 버티고 서 있다. 절망은 떠안고 살아야 한다. 그래서 기술이 필요한 것이다.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눈물의 의미와 가치를 깨닫는 것이 관건이 된다. 이동용은 슬픔이나 상처나 고통에 대해 나름대로 인식을 얻었고, 자신이 얻은 그 인식을 철학이라는 형식으로 풀어낸다.
가끔씩 이동용은 대한민국의 역사적, 정치적, 사회적 상황을 빗대어 설명에 임하기도 한다. 그때는 시민과 귀족이라는 양대 진영으로 나뉘어 치열하게 대결을 펼쳤던 19세기 유럽의 상황이 대한민국의 현실로 둔갑하기도 한다. 그의 현실인식은 엄중하면서도 남다르다.
철학적 절망은 건강한 절망이다. 신이 내민 손이라 믿고 잡아줄 필요가 있다. 건강한 정신이 절망에 이르면 한계를 인식하고 넘어설 수 있는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그것이 반전이고 변증법이며 건강회복이다.
건강한 사람이 건강한 사람을 만나 사랑을 하게 되듯이, 건강한 정신이 건강한 정신을 만나면 긍정적인 변화를 꾀할 수 있게 된다. 철학은 사랑의 학문이라 부르짖는 철학자 이동용은 이런 점에서 결코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철학으로 해결책을 모색하고자 한다.
희망의 꽃이 피어나는 곳은 절망이다.
아름다운 아침놀은 성스러운 저녁놀을 전제로 한다.
위대한 건강회복은 고통을 딛고 일어설 때 실현된다.
이동용은 키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을 통해서 생철학적 처방과 절망의 기술을 가르쳐준다. 이동용은 이미 생철학이라는 강물의 깊고 긴 곳에 이른 것 같다. 생철학은 말 그대로 인생철학이고, 인간 중심의 철학이지만, 그렇다고 신학이나 형이상학을 거부하지 않는다. 그것이 생철학의 본질이다.
이동용은 즐겨 ‘사람의 삶’, ‘인간의 인생’, ‘존재자의 존재’를 돌림노래나 후렴구처럼 불러 댄다. 그가 말하는 이 개념들, 사람의 삶, 인간의 인생, 존재자의 존재는 늘 현실과 본질이라는 두 개의 세계를 동시에 살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한 쪽은 몸으로 살아야 하는 세상이고, 다른 한 쪽은 생각으로 살아야 하는 세상이라고 가르친다.
사람은 바로 현상과 본질이라는 이 두 개의 세상을 동시에 살아야 하는 숙제를 감당해야 한다. 눈으로 세상의 현상을 보는 것도 문제이고, 생각으로 세상의 본질을 파악하는 것도 문제이다.
아무리 건강해도 결국에는 병이 들고, 그 질병의 결과 누구나 죽음 앞에 서게 될 것이다. 또 아무리 생각을 열심히 해도 결국에는 한계에 직면하게 될 것이고, 생각으로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지경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그때 우리 모두는 일종의 ‘절망’이라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절망은 사람의 일이다. 사람이라서 절망이 존재하는 것이다. 사람이기에 절망을 피해갈 수 없다. 어떤 형식으로든 사람은 절망과 직면할 수밖에 없다. 이럴 때 철학자 이동용은 주저하지 않고 도움의 손길을 내민다. 그는 마치 미켈란젤로의 〈아담의 창조〉에서처럼 사람에게 손을 내밀고 있다. 그는 철학이 허락하는 방식으로 도움을 주고자 한다.
키르케고르는 1813년생이고 1855년에 사망했다. 소위 긴 19세기의 중간 지점을 살아간 덴마크의 철학자이다. 1789년에 발발한 프랑스 대혁명의 불길은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시민과 귀족의 대결이라는 국면은 19세기 전체를 채운다. 귀족은 교회의 교리를 이용해 현실의 일상을 지배했다. 시민은 그런 현실과 맞서 싸웠다.
법의 정신은 교회의 교리가 점령했다. 교회가 모든 것의 기준이 되었다. 현실로 인식되는 현실을 철학자 키르케고르는 인정할 수가 없었다. 키르케고르는 글이라는 형식으로 자신의 현실과 부딪쳤다. 그는 글쓰기에 목숨을 걸었다.
키르케고르의 인생은 42년이라는 짧은 시간을 스쳐지나갔지만, 그가 남겨놓은 글을 어둠을 밝히는 불꽃처럼 여전히 밝기만 하다.
이동용은 철학자 키르케고르가 인도하는 길을 차분히 따라간다. 그는 《죽음에 이르는 병》을 읽으며 《키르케고르와 철학적 절망》이라는 결과물을 만들어 내놓았다.
이동용은 쇼펜하우어에서부터 시작되는 생철학의 물줄기를 치열하게 따라간다. 때로는 거친 여울을 형성하기도 하고 때로는 거울처럼 냉정하면서도 조용하게 깊음을 연출해 내기도 한다.
절망은 사실이다. 절망은 진실이다. 돌아서도 절망은 등 뒤에서 버티고 서 있다. 절망은 떠안고 살아야 한다. 그래서 기술이 필요한 것이다.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눈물의 의미와 가치를 깨닫는 것이 관건이 된다. 이동용은 슬픔이나 상처나 고통에 대해 나름대로 인식을 얻었고, 자신이 얻은 그 인식을 철학이라는 형식으로 풀어낸다.
가끔씩 이동용은 대한민국의 역사적, 정치적, 사회적 상황을 빗대어 설명에 임하기도 한다. 그때는 시민과 귀족이라는 양대 진영으로 나뉘어 치열하게 대결을 펼쳤던 19세기 유럽의 상황이 대한민국의 현실로 둔갑하기도 한다. 그의 현실인식은 엄중하면서도 남다르다.
철학적 절망은 건강한 절망이다. 신이 내민 손이라 믿고 잡아줄 필요가 있다. 건강한 정신이 절망에 이르면 한계를 인식하고 넘어설 수 있는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그것이 반전이고 변증법이며 건강회복이다.
건강한 사람이 건강한 사람을 만나 사랑을 하게 되듯이, 건강한 정신이 건강한 정신을 만나면 긍정적인 변화를 꾀할 수 있게 된다. 철학은 사랑의 학문이라 부르짖는 철학자 이동용은 이런 점에서 결코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철학으로 해결책을 모색하고자 한다.
키르케고르와 철학적 절망 (<죽음에 이르는 병>이 전하는 생철학적 처방과 절망의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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