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는 아프다!
개인의 정서적(코로나 블루), 육체적(코로나19 팬데믹) 아픔은 물론이고 경제적이고 사회적(거리두기)인 차원에서도 아픔이 일상화, 보편화되었다. 사람과 사회뿐만 아니라, 동식물(ex. 조류독감, 생물대멸종)도 아프고, 나아가 지구 전체가 심각한 질병(ex. 기후위기, 지구온난화)에 빠져 있다. 이 아픔은 지금-여기에서 예외적이고 도드라지는 것은 아니다. 인류가 의식을 갖게 된 순간부터 아픔은 우리 삶의 일부이기는 했다. 그러나 ‘늘 아프다’고 해서 아픔을 당연시하고, 묵묵히 견디기만 하면서 살 수는 없는 것이 인간이다.
우리는 왜 아픈가?
아픔을 야기하는 것을 폭력이라고 이름 지을 수 있다면, 우리가 아픈 까닭은 ‘폭력은 지속적이고 일상적인 데 비해, 평화는 간헐적이고 예외적’이기 때문이다.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맑고 깨끗한 하늘과 바다가 돌아온 것처럼, 우리는 “대체로 흐린, 그러나 가끔 맑은” 세상(사회) 속에서 살아간다. 대체로 흐린 우리 사회와 우리의 삶의 속살은 위험, 피로, 폭력, 혐오, 차별, 아동폭력, 성폭력, 방치와 방임, 난민, 세월호, 국가 폭력, 정치와 종교, 생매장, 살처분, 사형, 핵발전, 문명과 통제, 재난, 이자, 학교의 종말, 전쟁, 법과 상처, 금력, 권력, 숭배, 중독 같은 세포들로 점철된다. 그런 가운데 우리는 몸도 아프고 마음도 아프고, 나도 아프고 너도 아프고, 이겨도 아프고 져도 아픈 가운데 살아간다.
사회는 왜 아픈가?
개인적 질병과 사고로 인한 고통이 아니라면, 우리가 아픈 까닭은 대체로 우리가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생겨난다. 얼마간의 아픔은 (개개의) 타인으로부터 오거나, 타인과 나를 비교하는 데서 오고, 대부분의 아픔은 사회적인 차원에서 (직접적/간접적) 주어진다. 개인(국민) 국가의 주인이면서 국가권력의 통제에 종속되듯이, 우리(개인)는 사회를 구성하는 주체이면서, 사회에 종속된다. 사회로부터의 일탈은 일시적이고 예외적이며, 사회에 순응하고 예속되는 것이 일상적이며, 보편적이 되는 것이다.
개인의 아픔이 대체로 개개인의 생존 욕구, 자기 확장의 욕망으로부터 비롯되고, 사회적 갈등과 고통이 그 개인들의 욕망 대 욕망의 부딪침으로 야기되는 것이라는 것만 놓고 보면, 아픔의 근본적인 원인은 개인의 욕망인 것 같지만, 특히 근대의 ‘성과(자본 확장) 중심주의 사회 및 경제 시스템’이 자리 잡으면서, 개인의 욕망조차도 사실은 사회적인 산물이라는 점이 점점 명확해지고 있다. 개인의 일탈(갈등, 폭력, 살인-사형)조차도, 사회적 책임을 묻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개인의 모든 폭력에 면죄부를 주는 일이 아니며, 그렇게 되지도 않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누가, 왜 아픈가?
오늘날 사회는 근대 시기의 정치사회로부터 경제사회로 전이되어 왔다. 사실상 사회는 경제사회가 형성되면서부터 비롯되었다. 정치권력이 경제권력을 좌우하던 아주 짧은 시기가 있었으나 대체로는 경제권력이 실질적으로 정치권력을 좌우하는-현 단계에서는 ‘신자유주의’라고 불리는-체제가 현대 사회 근본 체제이다. 개인의 아픔이든, 사회의 아픔이든 자생적이며 불가항력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 내적 - 인간(을 비롯한 모든 ‘아픈 것들’) 외적”인 것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개인의 책임은 그 전제 위에서 아픔의 근본 원인에 무지한 채 종속되거나, 그것을 알면서도 그 체제의 양지에 서는 쪽을 선택하여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순간 생겨난다. 무지해서 수용하든 자발적 선택으로 수용하든 “자발적인 노예가 되기로 선택”한 것은 매한가지다.
아픔은 어떻게 이길 수 있는가?
이 책 『사회는 왜 아픈가: 자발적 노예들의 시대』는 저자가 “사회의 병리 현상을 관찰하면서, 때로는 사회 구성원인 나 자신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며” 써 나간 사회비평 에세이이다. 사회가 아픈 이유를 차근차근 성찰하되, 스스로 그 일부로 자리매김하여, 인간의 얼굴을 한 실천적 대안들을 치열하게 모색한다. 특히 기독교 목사이며, 평화학의 전공자이자 평화운동가로서, 그 자신이 겪은 해직의 아픔을 객관화하고, 사회적 아픔들을 주관화하여 공감하면서, 평화의 폭넓은 의미 속에서 그 대안들을 찾아나간다.
결국 저자가 끝내 도달한 해결의 종점, 혹은 해결의 출발점은 인간의 정신성 - 사회적 영성의 차원이다. 국가나 사회 차원의 정책적 대안은 그다음의 문제이다. 인간(개인) 자신의 아픔도, 사회의 아픔도(사회의 주체로서 개인), 그리고 이 지구상의 아픔도 결국은 인간이라는 근원적 존재로부터 해결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인간 ‘외적 존재’로부터의 해결은 생각만 해도 끔직한 일이다. 그것은 이른바 ‘강한 인공지능의 괴담’ 같은 것을 상상하게 하기 때문이다.)
아픔은 어떻게 치유되는가?
저자는 말한다. 자기중심적인 평화 대신에 타자를 포함하고 긍정하는 평화를 추구할 때, 성과 중심 사회 체제에 내몰리다가, 스스로 내달리는 자발적 노예 상태를 거부할 때, 타자와 협의하고 타자의 동의를 수용할 때, 타의 권리보다 타자의 권리 - 우리의 권리를 앞세울 때, 국가권력에 자기 자신의 근본적인 존엄과 천부의 권리를 위임해 버리고 스스로 종속되기를 거부할 때, 국민의 이름으로 자기 권력을 강화하고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는 정치와 종교의 본질을 꿰뚫을 때, 소유의 충동과 욕망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하여 내려놓고 비워줄 때, 자유라는 이름의 자본이 던진 미끼를 좇아 돌진하는 어리석은 길에서 돌아설 때, 문명이 시작되면서 인간의 아픔도 시작되었다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 인간의 삶의 매 순간에 저질러지는 실수와 과오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할 줄 알게 될 때, 정죄하는 자로부터 정죄 받을 줄로 알고 조신하며 조심하는 사람으로 거듭날 때, 끊임없이 ‘큰 것’을 좇아 밖으로 나도는 마음과 몸을 우리-나 안으로 끌고 들어와 스스로 심층적인 공부를 계속해 나갈 때 우리의 아픔은 치유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