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잘실패하기,혹은더나은실패
『실패의인문학』은단순히개인의실패담이나심리적경험담을넘어문명사적,신학적,정치사회적차원에서실패를바라보는새로운사유의틀을제시하면서근본적이고구조적인차원에서‘실패’를성찰하고자한다.이책은,문명자체의실패,즉우리가공유해온진보·성장·성과지향이라는시대적이데올로기를비판적으로되묻는물음에서출발한다.
21세기인류가맞닥뜨린팬데믹,기후위기,생태계파괴,종(種)의대멸종같은현상은결코일시적인실패나예외적사고가아니다.그것은근대이래인류문명을관통해온‘무한한진보’와‘경제적성장’의신화가더이상유효하지않음을경고한다.그럼에도오늘날까지우리는실패를말하는데익숙하지않다.오히려실패를숨기고,성공의기호만을강조하며,미래의번영을위해현재를끊임없이희생하는구조속에서살아가고있다.‘실패’는여전히낙오자·패배자·비정상으로분류되는단어이고,실패한존재는‘인간이하’의경계밖으로밀려난다.
이책은그러한이데올로기적구조를해체하기위해,‘실패’에대한사유그자체를복원하려는시도이다.기후위기와사회불평등,반복되는참사,정치의무능,종교의권위상실등은단순한사고가아니라,문명적실패의징후이며,이는곧우리의사유방식-근대적성공주의·합리주의·직선적진보개념-자체를되돌아보게한다.
이책의기획자들은진보에대한맹신에서벗어나,실패에대해‘더잘실패하기(howtofailbetter)’혹은‘더나은실패(afailingbetter)’의방향을모색한다.이는실패를낭만화하려는것이아니라,실패를억압하거나외면하지않고삶과공동체,윤리와문화의새로운출발점으로삼으려는문화신학적제안이다.
그러한의미에서,『실패의인문학』은신학자들만을위한책이아니다.신학이라는틀에갇히기보다는,신학을문화적성찰의방법으로삼아,오늘의현실과정서,구조와언어를비판적으로사유하는학제적탐색의장이다.따라서독자는이책을통해실패를두려움의언어가아니라,자각과해방의언어로받아들이게될것이다.
다르게사유할수있는계기로서의실패
총2부로구성된이책은인간의성공중심가치관에대한근본적인질문을던지며,실패를‘부정적사건’이아닌‘다르게사유할수있는가능성의계기’로바라본다.
1부는“실패에대하여묻다:실패의인문학“이라는주제로인류세와기후위기등문명적위기속에서,‘실패’라는개념을철학적·신학적·정신분석적방식으로사유한다.
「실패의정치·신학」에서는캐서린켈러의“더나은실패(afailingbetter)”개념을바탕으로,‘지속가능성’이아닌‘거주가능성(habitability)’의관점에서인류의삶의조건을되묻는다.디페쉬차크라바르티,도나해러웨이,시노하라등의담론을통해,인간중심적해결담론이아닌,실패와공존하는방식의존재방식을모색한다.
「인류의실패인가지구의진화인가?」에서는인류세개념을성찰하며,기술과발전의언어가은폐해온근대문명의구조적문제를파헤친다.이찬수는티모시모턴의‘공생적실재’개념을바탕으로,물질/비물질·인간/비인간·사물/영혼등의이분법을해체하며,존재의관계적구성성과내재적상호작용(intra-action)을강조한다.이로써인류세에맞서는새로운신학적사유의가능성을탐색한다.
「빼앗긴이름과이름없는하나님」에서황성하는포스트모던시대의신론을부정신학의맥락에서조명한다.말로규정되지않는‘하나님의이름’은이성중심의근대사유에서벗어나,이름을잃은이들-파울첼란,윤동주,장발장등-과의‘만남’을통해새롭게열린다.이만남은실패한자들과신비한타자의연대가능성을열어주는신학적상상력을제공한다.
「욕망과실패에관한정신분석학」에서는‘외밀한B’라는정신분석의틀을통해,우리가사회적으로억압하거나배제한욕망과실패의위치를추적한다.‘형상-모양’,‘하나님의형상-종의형상’,‘언표행위-언표’등쌍을이루는대립개념사이에서배제된항을조명하며,인간존재의불완전성과그로인한실패의의미를긍정적인삶의조건으로전환할수있는사유를제시한다.
2부는“실패가한국사회에묻다:기독교적성찰”이라는주제로한국사회의구체적인실패의양상을분석하고,그에대한신학적성찰을담았다.각각의글은사회,정치,종교적실패의사례를통해한국현대사의민낯을드러낸다.
「실패의세대」에서는청년세대의자의식과그들이사용하는신조어-잉여,소확행,아싸,꼰대등-를분석하며,이를단순한유행어가아닌시대정신의징후로읽는다.윤영훈은이단어들이표현하는소외와절망,자조의감정들이새로운삶의지향을위한담론적공간이될수있음을조명한다.실패를선언하고받아들인다는이들의태도는오히려다른가치의가능성을담고있다.
「안전의실패」에서는세월호와이태원참사를중심으로,반복되는사회적재난의구조를분석한다.박종현은이재난들이신자유주의적효율논리에따라안전을축소하고외주화한정책실패의결과임을지적하며,반복되는재난에대한국가의책임회피와기억의지워짐을고발한다.참사의반복은시스템의결함이자가치관의실패를반영한다.
「평화의실패」에서는한반도의핵무장화현실속에서‘핵있는평화’라는모순적개념이대두되고있는상황을다룬다.이병성은이러한현실이한국사회의평화담론에어떤전환을요구하는지분석하며,‘공포에의한평화’가아닌,진정한‘샬롬’으로서의평화를회복해야할필요성을강조한다.핵무기는억지력이자자멸의도구이며,그속에서인간성과종교성이어떻게살아남을수있는가를묻는다.
「교회의실패」에서는한국개신교의배타적성공담론이초래한사회적폐해를분석한다.김종만은반지성주의와종교간배타성의사례로손원영교수해직사건을들며,교회가권력을위해어떤타협을해왔는지를드러낸다.이러한‘성공’이교회의자폐화를초래했고,신학적상상력과윤리적책임의퇴락을불러왔다고지적한다.
실패위에서다시살아가기
오늘의실패는‘미래가지금보다반드시나아질것’이라는믿음이허물어지는자리에서발생한다.이책은그폐허위에서다른꿈을꾸자고제안한다.‘진보하지않아도괜찮다’,‘성공하지않아도좋다’,‘성공/실패의이분법자체를의심하라’는목소리는,낙관의시대가끝나고전지구적위기를살아가는우리가비로소듣기시작한,실패의인문학적목소리이다.
요컨대『실패의인문학』은실패한자들을위한책이아니다.실패자체를성찰하지못하는문명을위해,실패를말할수없는사회를향해,실패를기꺼이껴안을줄아는개인을위해기획된책이다.실패는낙오가아니라사유의시작이다.그리고사유는,우리가끝났다고여긴자리에서다시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