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백의 비명 (정이담 장편소설)

순백의 비명 (정이담 장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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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내가 네 엄마였으면 좋겠다. 아니면 네가 내 엄마 하든가.”
데뷔작 퀴어 로맨스 《괴물 장미》로 뜨거운 사랑을 받은
정이담 작가의 성장 사변 소설
엄마에게 상처받고 버려진 두 소녀의 모성 콤플렉스 극복기

거리 곳곳에 얼굴 없는 여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만 어떤 기계에도 촬영은 되지 않는 기묘한 존재들. 처음에는 괴담 취급을 받았지만 이제 얼굴 없는 여자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나타나 도시는 공포에 휩싸인다. 만질 수도 없고, 대화를 할 수도 없는 이 존재들을 두고 사람들은 “유령이다” “반물질이다” 설왕설래하지만, 얼굴 없는 여자들은 사실 태어난 곳이 따로 있었으니 그곳은 바로 ‘선우원’이라는 보육원의 양곡창고. 평화롭기만 해야 할 보육원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로맨스릴러 공모전에서 《괴물 장미》로 우수상을 받으며 데뷔한 정이담 작가의 세 번째 장편소설. 이제 ‘자립준비청년’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지만 아주 오랫동안 ‘보호종료아동’이라는 호칭으로 불리웠던, 두 소녀의 모성 콤플렉스 극복 이야기. 엄마로부터 칼로 찔리거나, 물에 빠뜨림을 당해 죽을 뻔했던 두 소녀는 엄마라는 존재를 늘 부정하면서도 또 꿈꾼다. 부재가 남긴 치유할 길 없는 이 콤플렉스를 극복하려 애쓰는 두 소녀는 보육원이 존폐를 위협받고 보육교사들마저 해고당하며 파국으로 치닫게 되는데…. 두 소녀는 과연 진짜 어른이 될 수 있을까.

“내가 네 엄마였으면 좋겠다.”
“징그러운 소리.”
“아니면 네가 내 엄마 하든가.”
저자

정이담

심리학학사및석사졸.상담전문기관에근무하며소설을쓴다.판섹슈얼.장르의구획을넘나들며심리적이고환상적인요소를통해가려진목소리들의세계를드러낸다.대표작으로퀴어로맨스릴러《괴물장미》,SF판타지《불온한파랑》이있다.

목차

1장_선량한친구들의초봄_7
2장_우물을찾아헤매는늦봄_43
3장_떠밀린운명들의초여름_79
4장_비명이탄생하는한여름_107
5장_얼굴없는여자들의가을_137
6장_침묵의계절은미완성_169
7장_폐허속에서도인어는_197
8장_순백의마음을듣는겨울_223
9장_다시,봄_245

작가의말_269

출판사 서평

진짜어른이된다는것

이렇게숨도못쉬고,숨죽여읽은소설은오랜만이다.게다가‘엄마’라는단어가이처럼많이나오는작품을근래또읽었는가도싶다.리뷰를위해파일로작품을먼저받은터라검색해보니이소설에는‘엄마’라는단어가184번나온다.수많은작품속에서때로는그리움의대상이고,때로는애증의대상이며,때로는극복해야할대상인엄마.하지만정이담작가의소설속에서이‘엄마’는자식을죽이려했고끝내버린엄마다.

2019년,정이담작가는가부장의폭력속에서그림을그리는행위를통해삶을지탱하고성장해나가는소녀의이야기를다룬퀴어‘로맨스릴러’《괴물장미》로데뷔했다.그리고불과한해만에,사고로가족을잃은두주인공이서로의상실을치유하는감각적인SF《불온한파랑》으로독자를놀라게하는가싶더니,자신의진짜삶을기록하려는욕망속에서성장한소녀선과,인어증후군을가진동갑내기룸메이트율의이야기를다룬SF《순백의비명》으로돌아왔다.

《순백의비명》을SF라고소개했지만,여기서SF는과학소설(ScienceFiction)이라기보다는사변소설(SpeculativeFiction)의약어에가깝다.하지만작가가말한대로과학소설이면어떻고사변소설이면무슨상관이며하다못해소설이아니면또어떻겠는가.“버림받았다”는공통의기억속에서성장한두소녀의이야기는,순백색의심상속에서지독하게맵고쓴맛을낸다.


금빛장미,불온한파랑,그리고순백의이팝나무

이제고등학교3학년이된선은갓난아기때베이비박스에담겨발견된이래,지금까지줄곧선우원에서자랐다.보호종료를1년앞둔고등학교3학년의봄을맞이한선은,보육교사이모두사람과로봇이모세대가분주하게아이들을돌보는선우원에서자기보다어린아이들을통솔하고,선천적인장애때문에거동이불편한동갑내기룸메이트율의일상을돌봐야한다.그런선우원에서의일상이그려지는도입부는마치《키다리아저씨》의도입부,우울한수요일을연상하게한다.

하지만선과율에게는나이든아이를입양해가겠다는양부모도,웃는얼굴이더예쁘다고말해주는동산위의왕자님도,부유한키다리아저씨도,갑자기대학에가게되는기적도없다.그나마율은공부를잘해서대학졸업때까지기한을미룰수있지만,선은지금까지다른언니들이그랬던것처럼고등학교를졸업하자마자선우원을떠나야한다.선은선우원을떠날날에대비해다섯번이나은행에방문해겨우통장을만들고,어렵게독립자금을모은다.

선은갓난아기때엄마가옆구리를칼로찔러서자상을입은채발견되었고,장애를안고태어난율은이곳에오기전엄마가물에빠뜨려죽이려했던것을기억하고있다.“옛가족을잊고새로운사람들과가족을이루어야한다는사실”을받아들이며자라난아이들,“무엇을가족이라부를지재설정”해야하는이아이들에게있어,가족이란혈연이아니라눈물로이어진인연이고,“열명의이모와사십명의친구들,로봇이모,그리고이팝나무”다.

선우원에와서,시간이흐르고계절이지나더이상가족들이자신을찾지않음을인정할무렵,아이들은화단구석에제이름을단식물,주로이팝나무가지를하나씩심어키우며이곳에뿌리를내리기시작한다.《괴물장미》를지배하는심상이이세상에존재할수없는화려한금빛장미고,《불온한파랑》을지배하는심상이지구의,바다의,혹등고래의푸른빛이라면,《순백의비명》을지배하는심상은선우원마당에뿌리를내린커다란이팝나무같은흰빛이다.아이들이엄마처럼의지하는이팝나무의하얀꽃,마치베이비박스처럼하얀양곡창고와,쌀알처럼매끈한얼굴을한,얼굴없는여자들의새하얀유령들까지.


얼굴없는여자들은어디에서왔는가

고단한삶속에서아이를버린엄마들,계약직으로들어와고된노동을감당하는보육사들,나이가들어이곳을떠난뒤힘들고가난하게살다가보증금사기를당하고옥상에서뛰어내린언니,그리고이곳의아이들.그들은서로를가족으로생각했지만,이곳의남성들은그렇지않았다.

과거어떤남자직원은아이들을성추행하다가쫓겨나기도했고,지금있는남자직원은재단측과손을잡은채자신이노조위원장을하겠다고나선다.아이들을학대하고보호사들에게횡포를부렸던원장은임기가남아있다는이유로선우원에눌러앉아권력을휘두른다.그리고국가는권력을쥔쪽의폭력을방임하고,여성과약자그리고미성년자의생존투쟁을아주손쉽게죄로규정한다.

권력과손잡은국가가미성년자인선과율에게도거침없이폭력을휘두르던날,양곡창고에떨어진선은마치자신의관념속어머니처럼칼을든,얼굴없는여자를본다.그리고그날이후사람의눈에는보이지만어떤기계에도찍히지않는,얼굴없는여자들이세상에나타난다.

정이담작가는《괴물장미》에서뱀파이어바네사의입을빌려말했다.
“백명의여자가죽으면한명의괴물이탄생해.천명의여자가살면한명의삶이돌아온단다.”

그리고이책《순백의비명》에서‘얼굴없는여자들’은기억되지못하고이세상에서밀려난여자들의다른이름이다.그들은이모들이끌려가고아이들이방치된선우원의흰양곡창고안,“부서진로봇이모와쌀,꽃,이모들의빈자리,우리의비명속”에서태어났다.

선우원의아이들과이모들,봉사자,후원자,선우원졸업생,도배아저씨와떡볶이집아주머니같은사람들의연대가선우원을지탱하고,돈과권력으로그들을찢어놓으려는세상에균열을내듯이,얼굴없는여자들은연대자들의표정을비추고,산사람들에게여자들이본래가졌어야할얼굴과역사를떠올리게하며세상에균열을낸다.유령으로도,반물질로도불리는그들은살아있는이들의거울이다.마치선과율이서로가서로를비추는거울이듯이.


기록하고기억하는사람

그시간속에서,선의역할은기록하고기억하는사람이다.종교적으로말하자면복음의기록자와같다.정이담작가는기독교적모티브를자유자재로사용한다.뱀파이어퀴어로맨스였던《괴물장미》에서는뱀파이어바네사에예수의심상을덧입혔다.《불온한파랑》의푸른빛은성모마리아의푸른빛을연상하게한다.이는《순백의비명》에서인어증후군을앓고있는율이유일하게자유로울수있는공간인물속과도연결된다.

또한《순백의비명》에서선이기록하는것은이모들의이야기다.선은이모들의부재는존재적재앙이라고말한다.“지옥은신의부재”라는말이이이야기에적용된다면,이곳의이모들은신,혹은신의대리자다.그리고버려진아이들을거두고키우고보호하는신의사랑을받는아이인선은,자신의옆구리에남은흉터와인어의꼬리처럼붙어있는율의다리에서,희생에대한두모티프를떠올린다.

선에게있어자신을찌른엄마의날붙이는제아이를제물로바치려던아브라함의칼이요,인간이되려면왕자를죽여야한다는말과함께언니들이인어공주에게쥐여준칼이다.그리고선의앞에나타난얼굴없는여자는,마치이팝나무꽃같은쌀들이들어있는양곡창고에서자신의일부를깎아다른여자들을만드는그거대한아키타이프는,선이상상하던엄마의형상처럼칼을들고있다.아브라함이거대한가부장인신의명령에따라자식에게칼을겨눴듯이,어떤세상은제물의희생으로굴러간다.


내가네엄마였으면좋겠다.아니면네가내엄마하든가.

희생자인여자의운명은다시어린딸의희생으로이어진다.질곡같은운명의유전이다.선의엄마가자신의출산을없었던일로되돌리려는듯갓태어난아기를죽이려했듯이,율의엄마가장애를안고태어난딸을물에빠뜨려죽이려했듯이.하지만제물들의행성에서살아가는사람들의이야기를쓰던선은,율을통해그질곡에서벗어난다.신과운명의명령에순종하며누군가를희생시켜야하는사람도있지만,인어공주는자신이구원받기위해왕자를찌르지않는다.

환상속에서엄마를만났던선도마찬가지다.선이절대적인운명처럼느껴졌던칼을버리고아이를안아들었을때,그고통과희생의대물림을끊기로했을때,엄마는그가두려워한얼굴없는여자가아닌,선우원의앞마당에서아이들을품어주던커다란이팝나무고목이된다.용서하고극복하며,선은실체없는존재에대한애증으로괴로워하는대신,율과함께하기로한다.서로가서로에게엄마가되어주고,다른이의고통을위해울고,용기를내어연대하며,아이를찌르지않고도믿음을증명하는길을찾는다.기댈곳없고,갈곳없는두소녀는끝내자신을버린엄마를갈망하는대신,자신이상대를버리지않는누군가가되기를선택한다.

“내가네엄마였으면좋겠다.”
“징그러운소리.”
“아니면네가내엄마하든가.”
-P.104

태어나자마자옆구리의상처로엄마에게서처절하게분리되었던선은,이제성인이되어선우원을다시나서게된다.선이이팝나무가지에손가락을베이고울음을터뜨리는것은,그가정말로어머니의집을나와탯줄을끊고터뜨리는첫울음이다.아마도선은이제야비로소자신의삶을살아갈수있게될것이다.엄마도,이모들도부재한삶을,누군가를향해손을내밀고,용기를주고,그리고율과함께살아갈수있는삶을.

가끔씩,요즘은전보다더자주,나이가들어도여전히탯줄을질질끌고다니는것같은사람들을본다.그런이들이득실거리는세상에서,선과율은이제엄마를버리고,또엄마에대한상실감과부재마저지워나가며진짜어른이될것이다.그들은엄마를,혹은엄마의대체를찾기보다는서로의엄마가되기로결심하며유년으로부터아주떨어져나가온전히서로를보게될것이다.결혼을한다는건여섯명이한침대에눕는거라는끔찍한이야기가농담처럼오가는세상에서,이보다온전하게단둘만이함께할수있는이야기가있을까.

-전혜진,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