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한사상사 1(중) (주·진·한 정치사회구조 연구 | 양장본 Hardcover)

양한사상사 1(중) (주·진·한 정치사회구조 연구 | 양장본 Hardcover)

$30.38
Description
양한사상사』는 서복관의 나이 63세에 발분하여 77세까지 약 15년에 걸쳐 혼신의 힘을 기울여 완성한 작품으로서 학문의 내공이 쌓일 만큼 쌓인 만년의 나이에 무르익은 사상의 정수를 쏟아부어 빚어낸 일생일대의 역작이다. 그는 중국 고대사상 분야에서 많은 저술을 남겼지만 그간의 자료 분석과 저술 활동은 모두 본서의 기초 작업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본서는 그의 학문과 사상을 농축한 저술이자 그의 인생을 대변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양한사상사』의 저변을 관류하는 중심 주제가 있다면 그것은 당연히 반전제(反專制) 정신이다. 서복관이 특히 심혈을 기울인 사상가는 동중서와 사마천이다. 두 사람의 주요 공통점 중 하나는 중국의 “전형적 전제정치”를 출범시킨 한 무제를 내심 극력 반대하고 비판했다는 점이다. 두 사람과는 달리 후한의 반고 부자는 전제군주의 지고무상한 지위를 확립하는 것을 지식인의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서복관은 사마천과 반고의 우열을 비교하는 글에서 반고의 역사 서술을 역사에 대한 모욕이자 왜곡으로까지 폄하하고 있다. 그의 칼날은 『법언』과 『태현경』을 저술한 전한 말의 지식인 양웅, 『논형』을 저술한 후한의 왕충에게까지 뻗친다.

전제정치에 대한 찬성과 반대, 전제정치에 감연히 맞서 그 폐단을 지적하는 비판정신의 유무를 사상의 장단 및 우열을 비교 평가하는 제일의 기준으로 삼은 점은 『양한사상사』의 일대 특징이다.
저자

서복관

서복관은 1903년 1월 31일 중국 호북성 희수현(浠水縣) 서가요(徐家坳) 마을 가난한 농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에게 기초교육을 받았고, 무창 제일고등사범학교(1918-1923)와 국학관(1923-1926)에서 엄격한 국학 훈련을 받았다. 1928년 일본으로 건너가 경제학을 공부하고 사회주의 사상을 대량 흡수하였으며, 경제적 지원 부족으로 1929년 일본 사관학교 중국팀 23기에 입학하였다. 1931년 9·18사건으로 귀국하여 군직을 맡았다. 1937년 낭자관(娘子關) 전투와 1938년 무한(武漢) 보위전 실전에 참여하였다.
1943년 5월에서 10월 사이 군령부 소장(少將) 연락참모로 연안(延安)에 파견되어 그곳에서 모택동(毛澤東), 주은래(周恩來)와 여러 차례 개인적인 접촉을 가졌다. 중경(重慶)으로 돌아간 후, 「중공 최신 동태」보고서로 장개석(蔣介石)에게 알려지면서 그의 막료로 발탁되어 점차 최고 의사결정에 참여하게 되었다. 1948년 3월 소작농이 소작료를 토지 매입비로 하여 토지를 취득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토지개혁 방안을 제출하였고 이 방안은 1953년 대만에서 시행되었다. 1951년 이념이 맞지 않아 국민당을 탈당하고 대학에 부임하면서 학문을 시작하였다. 그는 100여 년 동안 중국에서 유일하게 군사·정치의 실무 경험을 갖춘 유교학자였다.
서복관은 공자와 맹자 및 『논어』를 종지로 삼고 '수신(修身)'과 '치국(治國)'의 도는 반드시 보편적인 실천 가능성을 가져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20세기 이래 중국의 학자들이 다투어 서양을 모방하고 사변(思辨)적 방법으로 중국 전통사상을 '철학화(哲學化)'하는 데만 전념해 온 학문적 성과는 '관념의 유희'일 뿐 공자·맹자의 도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고 보았다. 서복관은 이렇게 말한다. “공자의 가르침에 의해 개척된 세계는 현실 생활 속의 '정상인(正常人)'의 세계이다. 사람과 사람이 들어가야 하고, 들어갈 수 있는 평안한 세계이다. 사람이 플라톤의 이상형 세계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 헤겔의 절대정신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겠는가?” 서복관의 연구는 사상사를 중심으로 예술과 문학도 함께 다루고 있다. 그는 선진(先秦) 사상이 전제(專制) 통치를 거치면서 왜곡되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중국 문화가 원래 가지고 있는 민주 정신을 다시 활짝 터놓아 흐르게 하고 싶다. 이것은 '옛 성인을 위하여 끊어진 학문을 잇는[爲往聖繼絕學]' 일이다. 그것은 일부 정신으로 하여금 민주 정치를 지지하도록 만든다. 이것은 '만세를 위하여 태평을 여는[爲萬世開太平]' 일이다[역주: “爲往聖繼絕學, 爲萬世開太平”은 장재(張載)의 『근사록(近思錄)』에 나오는 말이다]. 정치가 민주적이지 않으면 태평도 있을 수 없다.”
저서로는 『중국사상사논집』(1959), 『중국인성론사-선진편』(1963), 『중국예술정신』(1966), 『중국문학논집』(1966), 『공손룡자강소(公孫龍子講疏)』(1966), 『석도지일연구(石濤之一研究)』(1969), 『양한사상사』 권1(1972), 『양한사상사』 권2(1976), 『황대치양산수장권적진위문제(黃大癡兩山水長卷的眞僞問題)』(1977), 『양한사상사』 권3(1979), 『유가정치사상여민주자유인권(儒家政治思想與民主自由人權)』(문집, 1979), 『주관성립지시대급기사상성격(周官成立之時代及其思想性格)』(1980), 『중국문학논집속편』(1981), 『중국사상사논집속편』(1982), 『중국경학사적기초』(1982) 등이 있다. 1982년 4월 1일 별세하였다.
중국의 고난시대를 겪으며 서복관은 강한 '서민적 줄거리'[곽제용(郭齊勇) 교수의 말]를 가진 300여만 자의 시사평론을 썼으며, 1949년부터 1982년까지 대만과 홍콩에서 가장 권위 있는 평론가였다. [출처: 서복관 선생 아들 서무군(徐武軍) 제공]

목차

제1권 중_


일러두기

제3장 한대 전제정치하의 봉건 문제
1. 문제의 한정
2. 봉건과 초(楚)·한(漢) 흥망의 관계
3. 한대 봉건의 3대 변천
4. 봉건에 대한 전제의 억제 과정
5. 억제 과정에서 학술발전에 미친 중대한 영향
6. 학술사에서 동중서(董仲舒)가 뒤집어쓴 억울한 죄
7. 후한 전제정치의 계속되는 압박

원주

제4장 한대 일인(一人) 전제정치하의 관제(官制) 변천

1. 관제는 재상(宰相)제도를 골간으로 한다
2. 역사상 관제에서의 삼공(三公)·구경(九卿)에 대한 해명
3. 한대 관제의 일반적 특성
4. 관제 변천에 있어서 무제(武帝)의 핵심적 지위
5. 무제의 재상제도 파괴
6. 상서(尙書)·중서(中書)의 문제
7. 중조(中朝, 內朝) 문제에 대한 해명
8. 상서(尙書)는 전한시기에 내조신(內朝臣)이 아니었다
9. 무제 이후 재상의 지위와 관제상 삼공(三公)의 출현
10. 광무제의 추가적 재상제도 파괴와 이후 전제하의 관제변천 구조
11. 광무제의 지방 군제(軍制) 파괴와 그 심각한 결과

원주

찾아보기

출판사 서평

서복관(徐復觀)은 1903년 호북성 희수현(浠水縣)에서 출생하였다. 본명은 병상(秉常)이고, 자는 처음에 불관(佛觀)이었다가 나중에 웅십력(熊十力)의 권유로 복관(復觀)으로 바꾸었다. 어려서 아버지를 따라 글을 익힌 후 현의 고등학당, 무창(武昌)의 성립(省立)제일사범(무한대학 전신)을 거쳐 국학관(國學館)에서 전통 경전에 대한 훈련을 받았다. 1928년 일본에 유학하여 사회주의를 비롯한 정치·경제·철학 등 새로운 사조를 접하였고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하였으나 1931년 9·18사변(만주사변) 발발로 귀국하여 군에 투신한 후 1937년 산서성 낭자관(娘子關) 전투 및 호북성 무한(武漢) 전투를 지휘하였다. 1943년 항일전쟁기에는 연안(延安)에 머물면서 국민당의 연락 임무를 맡았으며 6개월 후 중경(重慶)으로 돌아가 장개석의 14명 핵심막료의 하나로 기밀에 참여하였다. 1946년 육군 소장을 끝으로 15년간의 군생활을 마감하였다.
1944년 서복관은 웅십력과의 만남을 계기로 생애에서 중요한 전환기를 맞이한다. “나라를 잃는 자는 항상 그 문화를 먼저 잃는다”라는 스승의 말이 그로 하여금 불혹을 넘긴 나이에 학문 연구를 시작하도록 만들었다. 1949년 홍콩에서 창간한 정치학술이론잡지 『민주평론』은 1950-60년대 대만과 홍콩을 무대로 한 유학의 현대화 운동의 주요 토론장이 되었고 여기서 함께 활동한 당군의(唐君毅), 모종삼(牟宗三) 등과 함께 '현대 신유학(新儒學)'의 대표인물로서 명성을 얻게 된다. 그는 중국의 전통문화, 특히 유가사상과 중국지식인의 성격 및 역사 문제에 관심을 갖고 많은 글을 발표하였다.
1949년 대만으로 이주하여 대중(臺中)에 정착한 서복관은 성립 농학원(農學院)을 거쳐 동해대학(東海大學) 교수로 재직하다가 1968년 동료 교수와의 필전(筆戰) 사건 후 대학 측의 강요로 학교를 퇴직하고 1969년 다시 홍콩으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이 때문에 『양한사상사』 집필에도 큰 타격을 입었다고 『양한사상사』 제1권 서문에 쓰고 있다. 1982년 4월 위암 투병 끝에 대만에서 서거하였고, 유언에 따라 1987년 고향인 호북성에 유골이 안장되었다.

사상은 그 시대를 떠나서는 이해할 수 없다. 한대 사상의 연구는 당연히 그 사상이 배태되고 성장할 수 있는 토양, 즉 한대의 정치사회구조를 규명하는 작업으로부터 시작한다. 본서의 제1권 전체가 중국고대의 정치사회구조 연구에 할애되고 있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한(漢)이라는 사회가 탄생하기까지의 전사(前史)로서 서주 종법제도의 역사적 기능, 그에 기초한 봉건제도의 형성과 붕괴, 진(秦) 통일의 기반과 전형적 전제정치의 출현, 진을 계승한 한의 변질된 전제정치, 전제정치와 사회종족세력 간의 갈등관계 등 1권 전체가 고대사회 특히 한대 전제정치의 본질과 구조에 관한 연구로 채워져 있다. 제1권의 초판 제목이 『주·진·한 정치사회구조 연구』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대 정치사회구조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제2권과 제3권에서는 본격적인 사상 해부에 들어간다. 진·한을 대표하는 다양한 사상들의 종합과 조화를 시도한 『여씨춘추』, 『회남자』등의 대규모 편찬서는 물론이고, 『사기』, 『한서』 등 당대의 역사를 서술한 역사서, 심지어 『좌씨전』, 『공양전』, 『곡량전』과 같이 전승 과정의 불분명 속에 한대인의 가탁이 의심되는 부분까지도 사상 연구의 좋은 재료가 되었다. 구체적 사실과 현상을 객관적 언어로 표현한 문헌뿐만 아니라 상징화된 언어로 사람들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문학작품 또한 당대인의 정서와 관념이 투영된 귀중한 사상사 재료이다. 그들이 남긴 수많은 시부와 산문은 물론이고 한영(韓嬰)의 『한시외전』이나 유향(劉向)의 『설원』에 반영된 현실 인식도 놓치지 않았다. 이와 함께 육가(陸賈), 가의(賈誼), 동중서(董仲舒), 양웅(揚雄), 왕충(王充) 등 주요 인물들의 행적과 저작을 면밀히 분석하여 각 사상의 본질을 드러내고 사상사적 통찰을 제시한다. (역자 서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