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로 읽으면, 한국사가 새롭게 보인다
왕과 영웅의 역사에서 하늘과 사람의 역사로
이 책은 고조선의 건국에서 조선 후기의 민란까지, 우리 역사의 굵직한 장면들을 골라 기후를 겹쳐 읽는다. 요하의 추위가 밀어낸 사람들이 첫 나라를 세우는 장면에서 시작해, 고구려의 잦은 전쟁과 수도 이전, 고려의 번영과 몽골의 침략, 조선의 대기근과 정조의 분투를 지나, 폭염의 시대를 사는 오늘의 우리에게 도착한다. 익숙한 사건들이지만 하늘을 겹쳐 보는 순간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중국 대륙의 기온이 떨어질수록 전쟁의 횟수가 늘었다는 통계 위에 고구려의 잦은 전쟁을 올려놓으면, 정복 군주들의 야심 이면에 굶주림이 보인다. 순조 시대를 뒤흔든 홍경래의 난 뒤에는 이름조차 남지 않은 화산의 폭발이 있었고, 1815년 인도네시아 탐보라 화산이 터지자 조선에는 홍수가, 유럽에는 소설 《프랑켄슈타인》을 낳은 ‘여름 없는 해’가 찾아왔다. 조선의 민란과 영국의 괴기 소설이 같은 화산의 자식이었던 셈이다.
이런 재해석이 가능한 것은 자연이 남긴 기록 덕분이다. 동굴의 석순은 비의 양을, 습지의 꽃가루는 기온을, 나무의 나이테는 해마다의 날씨를 제 몸에 새긴다. 사관의 붓은 사정에 따라 쓰고 지웠지만 자연의 기록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이 책은 그 기록을 《삼국사기》와 《조선왕조실록》 옆에 나란히 펼쳐 놓는다. 이제 그 위에서 되살아나는 장면들을 하나씩 만나 보자.
삭풍이 세운 고조선, 훈풍이 키운 위만조선
한랭과 온난이 번갈아 빚은 한반도 첫 왕조
이 책의 단군 이야기는 우리가 아는 신화와 결이 다르다. 요하 강가에는 곰을 섬기며 농사와 목축을 반씩 하던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남쪽에서 환웅의 무리가 올라온다. 우물을 파고 달력을 읽는 농사꾼들이었다. 곰 부족은 이들을 경계하면서도 씨앗 저장법에 귀를 기울였고, 두 무리는 천천히 섞여 갔다. 그때 동쪽에서 호랑이를 섬기는 사냥꾼들이 들어와 밭을 짓밟고 가축을 빼앗았다. 결국 곰 부족과 환웅의 무리가 힘을 합쳐 이들을 몰아냈고, 얼마 뒤 곰 부족 여인과 환웅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난다. 단군이다. 저자는 이 설화를 하늘에서 내려온 신의 이야기가 아니라, 수천 년 동안 요하 유역에서 실제로 만나고 섞이고 다퉜던 세 갈래 사람들의 오랜 기억으로 다시 읽는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자꾸 요하로 모여들었고, 왜 끝내 한반도까지 내려왔을까. 답은 추위다. 요하 유역에는 지난 8천 년간 약 500년을 주기로 어김없이 혹독한 추위가 돌아왔고, 그때마다 번성하던 문화가 무너지고 새 주인으로 교체됐다. 흥미롭게도 이 500년의 박자는 저자가 한반도 남해안에서 직접 캐낸 퇴적물 기록과 정확히 일치한다. 만주와 한반도는 수천 년 동안 같은 하늘 아래서 같은 리듬으로 흔들려 온 것이다.
추위가 닥칠 때마다 요하의 사람들은 먹을 것을 찾아 남쪽으로 움직였다. 그 행렬이 한반도에 벼농사를 심었고, 금강 유역에 우리 청동기 시대의 대표 문화인 송국리 문화를 꽃피웠으며, 그중 일부는 바다를 건너 일본에 벼농사 문명을 전해 주기까지 했다. 고조선의 성립 자체가 삭풍이 떠민 이주의 산물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500년마다 닥친 그 추위는 한반도 사람들을 어지간한 추위에는 끄떡없는 집단으로 단련시켰다.
반대로 위만조선은 훈풍의 수혜자였다. 기원전 3세기부터 로마와 한나라가 나란히 제국으로 성장한 따뜻한 시대, 이른바 ‘로마 온난기’가 열렸다. 한반도 북부의 위만조선은 한나라의 철기와 비단, 일본의 진주, 한반도 남부의 철과 곡물이 오가는 길목을 장악하고 중계 무역으로 부를 쌓으며 강국의 반열에 올랐다. 얼마나 강했던지, 천하의 한나라가 이 작은 나라를 무너뜨리는 데 두 번의 패배를 겪고 꼬박 1년이 걸렸다. 따뜻한 하늘이 낳은 풍년과 교역이 곧 국력이었다. 추위가 나라를 세우고, 온기가 나라를 키웠다.
장수왕은 왜 만주를 버리고 남쪽으로 갔을까?
북반구를 덮친 5세기 한랭화와 장수왕 천도
“장수왕 15년(427년) 평양으로 도읍을 옮겼다.” 고구려 역사상 가장 대담한 결단에 대해 《삼국사기》가 남긴 기록은 이 한 줄이 전부다. 우리는 초등학교 때부터 이 사건을 ‘남진 정책’이라는 이름으로 배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상하다. 만주 벌판을 호령하며 전성기를 누리던 정복 국가가, 왜 하필 그 넓은 땅을 등지고 240킬로미터나 떨어진 반도 안쪽 평양으로 내려왔을까.
역사학계의 답은 여럿이다. 국내성이 비좁아서, 콧대 높은 귀족들을 누르려고, 강대국 북위의 침공에 대비해서. 모두 일리가 있지만, 어느 것도 “왜 하필 남쪽인가”라는 질문에는 시원하게 답하지 못한다. 정복 국가의 귀족들이라면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들며 만주를 놓치게 될 평양행을 결사반대했을 것이다. 그 반대를 무릅쓸 만큼 절실한 이유가 장수왕에게는 있었다는 이야기다.
저자는 그 답의 실마리를 돌과 꽃가루에서 찾는다. 중국의 동굴 석순과 저자가 직접 분석한 제주도 습지의 꽃가루 기록을 보면, 동아시아의 기후는 천도가 단행된 바로 그 무렵인 420~430년경 수백 년 만의 최악으로 곤두박질쳤다. 사냥과 목축과 농사를 함께 꾸리며 살던 고구려는 전성기의 인구 증가로 가뜩이나 먹을 것이 빠듯해진 참이었다. 추위는 물러갈 기미가 없었다. 나라의 안정을 무엇보다 중시했던 장수왕에게, 농사가 잘되는 따뜻한 남쪽으로 나라의 중심을 옮기는 일은 모험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계산이었을 것이다.
놀라운 것은 같은 시기 유라시아 반대편의 풍경이다. 훈족, 서고트족, 반달족이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살 만한 땅을 찾아 움직이며 서로마 제국을 무너뜨리고 있었다. 장수왕의 천도와 게르만족의 대이동은 서로의 존재도 모른 채 같은 하늘 아래에서 벌어진 일이었던 셈이다. 북반구 전체를 덮친 추위가 동쪽 끝에서는 고구려의 수도를 옮기고, 서쪽 끝에서는 제국을 무너뜨렸다. 교과서가 멈춰 선 한 줄의 기록 너머에서, 과학은 고구려의 역사를 지구 전체의 이야기로 다시 세워 놓는다.
고려는 온기 속에 피고, 그 온기의 끝에서 흔들렸다
중세 온난기의 번영과 여몽전쟁의 고난
1123년 초여름, 송나라 사신 서긍이 도착한 예성강 하구의 벽란도. 포구에는 여진의 말 무역선과 일본 상선, 멀리 아라비아에서 온 상선까지 돛대가 산맥처럼 이어져 있었다. 향신료 냄새가 물결을 타고 퍼지고, 노점에는 송나라에서도 보기 힘든 푸른빛 유리잔이 놓여 있었다. 《고려사》에는 실제로 아라비아 상인 100명이 찾아와 특산물을 바쳤고, 수은과 몰약을 싣고 온 상인들을 나라가 후하게 대접해 돌려보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당대 최고 문화를 자부하던 송나라 사신조차 고려 청자의 비색과 나전칠기의 솜씨 앞에서는 찬사를 아끼지 못했다.
이 국제 무역항의 활기는 우연이 아니었다. 800년 무렵부터 400년 가까이, 지구가 유난히 따뜻했던 ‘중세 온난기’가 이어졌다. 바이킹이 그린란드에 마을을 짓고 스코틀랜드에서 와인을 담그던 시대다. 만주 일대의 마을 수가 이 시기에 3,400개를 넘겼다가 추워진 뒤 150개 아래로 곤두박질쳤다는 통계, 사람이 살 수 있는 북쪽 한계선이 서울에서 제주까지의 거리만큼 남쪽으로 밀려 내려왔다는 기록은 그 온기가 얼마나 예외적인 선물이었는지 보여준다.
고려는 그 선물을 가장 알뜰하게 쓴 나라였다. 풍년이 이어지고 무역으로 곳간이 차자, 그 힘은 곧 군대가 되었다. 거란의 40만 대군이 쳐들어와 개경이 함락되는 위기 속에서도 고려는 무너지지 않았고, 서희는 말로 담판을 지어 오히려 땅을 넓혔으며, 강감찬은 귀주에서 10만 대군을 섬멸했다(1019년). 잘 먹는 나라가 잘 싸운다. 동북아 최강국 요나라가 두려워한 것은 한반도의 작은 나라가 아니라, 따뜻한 시대의 국제 교역망 위에서 무섭게 성장하는 강소국 고려였다.
그러나 온기는 영원하지 않았다. 13세기 들어 세계 곳곳에서 화산이 잇따라 터지고 태평양의 바닷물 온도가 뒤바뀌면서 한반도는 바짝 말라 갔다. “굶어 죽은 시체가 길에 끊임없이 이어졌다”는 《고려사》의 기록(1230년) 바로 이듬해, 몽골의 침공이 시작됐다. 얄궂게도 같은 시기 몽골 초원에는 지난 1,000년 중 가장 많은 비가 내려 군마들을 살찌우고 있었다. 하늘은 칭기즈칸의 편이었던 셈이다. 아홉 차례의 전쟁, 사람보다 말이 많아졌다는 제주도의 몽골 목장, 그리고 몽골·고려 연합군의 일본 원정을 두 번이나 수장시키며 일본인들이 ‘신의 바람(가미카제)’이라 부르게 된 태풍까지. 고려 후기의 고난은 기후가 나라들의 운명과 어떻게 맞물리는지 보여주는 극적인 무대다.
조선의 왕들, 천운이 엇갈렸던 까닭은?
하늘이 도운 영조·고종, 하늘이 등진 인조·철종
1670년과 1671년, 경신대기근이 조선을 덮쳤다. 두 해 연속 농사가 무너지자 수십만 명이 굶어 죽었고, 일부 지역에서는 마을이 통째로 사라졌으며, 차마 옮기기 어려운 식인의 기록까지 남았다. 그로부터 140년 뒤에는 홍경래의 난(1811년)이 평안도를 뒤흔들었다. 학교에서 배울 때 이 사건들은 서로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조선의 가뭄을 증언하는 뜻밖의 증인은 지구 반대편, 쿠바의 한 동굴에 있었다. 동굴 석순은 그 지역에 비가 얼마나 내렸는지를 나이테처럼 몸에 새기는데, 저자가 이 석순의 기록과 《조선왕조실록》에 적힌 300여 년 치 가뭄 기록을 나란히 놓자 숨어 있던 규칙이 모습을 드러냈다. 적도 부근에서 일 년 내내 비를 뿌리는 거대한 비구름 띠, 이른바 ‘열대 수렴대’가 약 70년을 주기로 남쪽으로 밀려날 때마다 조선에는 가뭄과 기근, 그리고 민란이 어김없이 들이닥쳤던 것이다. 경신대기근도, 홍경래의 난도 모두 이 주기 위에 놓여 있다.
이 발견은 조선 왕들에 대한 평가마저 다시 보게 만든다. 재위 후반으로 갈수록 비가 넉넉해진 영조와 고종은 ‘하늘이 도운 왕’이었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인 뒤 조정이 두 쪽으로 갈라졌는데도 영조의 나라가 안정을 지킨 데에는, 노련한 통치술 못지않게 순한 하늘의 몫이 있었을지 모른다. 반대로 인조와 효종, 현종, 그리고 철종은 하늘의 역풍을 맞았다. 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