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세우스보다먼저바다를건넌사람들
‘그리스·로마의지중해’가아니라‘지중해가만들어지는역사’
우리가흔히떠올리는지중해의역사는이집트,미노스와미케네,페니키아,그리스와로마같은위대한문명들의역사다.〈오디세이〉역시우리가고대지중해를상상할때가장먼저떠올리는세계에속한다.
그러나브루드뱅크의시선은그보다훨씬더이전으로향한다.
애초에지중해라는공간은언제부터사람과사람을이어주는‘바다’가되었는가?사람들은언제바다를장벽이아니라이동과교류의통로로받아들이기시작했는가?농경과금속,항해와교역은어떻게서로다른지역을연결하고하나의지중해세계를만들어냈는가?
책은지중해가형성되는자연환경과지질학적조건에서출발해초기인류의이동,섬의정착,신석기농경의확산,금속기술과항해술의발전,청동기교역망의형성과붕괴,페니키아와초기그리스세계의등장까지를하나의긴역사로연결한다.
그시간적범위는약180만년에이르며,브루드뱅크는그긴기간을“선사와역사를하나의서사로봉합한유일무이한책”이라는평가를받을정도로매끄럽게잇는다.
오디세우스의항해보다훨씬오래전부터지중해에서는이름조차남지않은수많은사람의‘오디세이’가계속되고있었다.새로운땅을찾아바다를건넌사람들,섬에정착한사람들,흑요석과금속을싣고해안을오간사람들,배를만들고바람과해류를익혀더먼수평선으로나아간사람들이다.
『지중해의탄생』이들려주는것은영웅한사람의위대한항해가아니라,수십만년동안바다를건너고연결해온수많은인간의항해가쌓여하나의세계를만들어가는이야기다.
이토록방대한시간을다루면서도책은정치사나특정문명의흥망을나열하는방식에머물지않는다.환경과기술,농업과인구,생산과교역,이동과정착이서로영향을주고받으면서지중해라는하나의역사적세계가형성되는과정을입체적으로보여준다.
바다는배경이아니라역사의주인공이었다
섬과바람,배와항해가만든지중해
〈오디세이〉에서바다는단순한배경이아니다.오디세우스를고향에서떼어놓는거대한장벽인동시에,끊임없이새로운장소와사람들을만나게하는길이다.
『지중해의탄생』에서도바다는역사적사건들이벌어지는무대에머물지않는다.
이책에서역사의주인공은특정한왕이나제국만이아니다.바다와섬,해류와바람,기후와지형,배와항해술,곡물과금속,도자기와유리,농부와선원과상인,그리고이름조차남지않은수많은공동체가모두역사를움직이는행위자가된다.
사람들은처음부터지중해를자유롭게오갈수있었던것이아니다.바다는오랫동안사람을갈라놓는위험한공간이었다.그러나항해기술이발전하고섬과해안사이의이동이반복되면서바다는점차사람과사람을이어주는통로로변했다.
물건만이동한것도아니다.곡물과금속,도자기와유리가바다를건넜고,그와함께기술과지식,생활방식과신앙,언어와문화가이동했다.사람들은서로만나고충돌했으며,서로의것을받아들이고변형했다.
바다가사람을갈라놓는경계에서사람과물자와지식이오가는통로로바뀌어가는과정자체가『지중해의탄생』의중심서사다.
그런점에서이책은우리에게익숙한고대지중해의풍경을전혀다른방식으로바라보게한다.호메로스의이야기속에서이미수많은섬과해안이하나의세계를이루고있었다면,브루드뱅크는그세계가결코처음부터존재했던것이아니라고말한다.
오디세우스가바다를건너기까지,그보다앞선수천년동안수많은사람들이먼저바다를건너야했다.
문명의‘중심’이아니라연결과상호작용의역사
『지중해의탄생』의가장중요한학문적성취는고대지중해사를몇몇위대한문명의계보로환원하지않는다는데있다.
브루드뱅크는이집트와크레타,그리스뿐아니라이베리아반도와발칸,북아프리카,레반트,아나톨리아,그리고수많은섬과해안공동체를하나의시야에넣는다.전통적인고대사가상대적으로주변부로다뤄왔던지역과공동체에도동등한역사적무게를부여한다.
그결과지중해의역사는‘중심문명이주변으로영향을퍼뜨린역사’가아니라서로다른지역과집단이끊임없이접촉하고교류하면서함께만들어낸역사로다시쓰인다.
우리가흔히‘그리스문명’이나‘서양문명’의독자적인성취로이해했던많은요소역시실제로는그보다훨씬오래전부터이어진이동과교역,기술의전파와문화적혼합의결과였다.이집트,레반트,미노스,미케네,페니키아,그리스와에트루리아는서로고립된문명이아니라더넓은지중해네트워크안에서성장하고변화했다.
〈오디세이〉에등장하는세계역시이러한오랜연결의역사위에서비로소이해할수있다.배를타고섬에서섬으로,해안에서해안으로이동할수있는세계,서로다른언어와풍습을지닌사람들이만나고물건과이야기가오가는세계는어느순간갑자기나타난것이아니었다.
그것은수천년에걸친이동과접촉이축적된결과였다.
이러한관점은‘누가최초였는가’또는‘어느문명이더우월했는가’를묻는기존의문명사에서벗어나,문명은어떻게접촉과교환을통해만들어지는가라는한층근본적인질문으로독자를이끈다.
고고학에서기후과학과유전학까지
인문학과자연과학을넘나드는‘깊은역사’
『지중해의탄생』이기존의고대사와또하나다른점은문자기록에만의존하지않는다는것이다.
호메로스의서사시처럼문자로전해진이야기가등장하기훨씬이전의역사를복원하려면전혀다른증거가필요하다.
브루드뱅크는유적과도자기,동물의뼈와식물의흔적,선박과항구,해수면과해안선의변화,방사성탄소연대와고기후자료등서로다른종류의증거를함께읽는다.여기에환경의변화,기술의발전,농경의확산,인구의이동,물자의생산과교역을결합함으로써인류사의장기적인변화를복원한다.
이처럼방대한종류의증거와연구성과를하나의역사서사속에통합했다는점에서이책은지중해선사·고대사연구의새로운기준을제시했다는평가를받아왔다.
『지중해의탄생』은그런의미에서단순한‘고대지중해통사’를넘어선다.고고학과역사학,인류학과지리학,환경사와자연과학의경계를가로지르며인간사회가어떻게환경에적응하고공간을이용하며새로운네트워크를만들어왔는지를보여주는‘깊은역사(deephistory)’의탁월한사례다.
오늘날우리에게익숙한지중해의모습을수천년전에서시작하지않고수십만년의시간깊이에서바라볼때,문명의탄생은전혀다른모습으로다가온다.
180만년을한권에담아낸
방대한학술서이면서동시에‘읽는역사’
약180만년에이르는시간과유럽·아시아·아프리카에걸친방대한공간을한권에담아낸학술적규모만큼주목받은것은이책의뛰어난서술이다.
전문연구자들사이에서는지중해고고학과선사시대연구의주요성과를집대성한책으로평가받는동시에,일반독자가따라갈수있는구성과문체를갖춘역사서라는점에서도높은평가를받았다.
방대한자료를압축하면서도하나의일관된역사적서사를만들어냈고,전문적인논의를흥미로운이야기로전환하는데성공했다.
책에풍부하게수록된지도와유적도,유물사진과복원도역시독자의이해를돕는다.수많은섬과항구,교역로와유적을시각적으로따라가다보면추상적인‘지중해세계’가구체적인인간의생활공간으로되살아난다.
그런점에서『지중해의탄생』은고대그리스·로마의고전을즐겨읽는독자에게도훌륭한안내서가된다.호메로스의『오디세이아』와헤시오도스의『신들의계보』에서베르길리우스의『아이네이스』에이르기까지,수많은고전은지중해라는거대한공간위에서펼쳐진다.그지리와역사를머릿속에그리지못하면낯선지명에길을잃기쉽지만,지중해세계가형성되는과정을이해하고나면고전속인물과사건이비로소하나의공간안에서연결되기시작한다.풍부한지도와도판을따라지중해를익히는일은고전을읽기위한든든한배경지식을쌓는일이자,익숙한고전을한층깊고입체적으로읽는방법이기도하다.
결과적으로,이책은고고학과고대사를연구하는전문연구자에게는방대한연구성과를집약한종합서이며,일반독자에게는문명의탄생을전혀다른시간과공간의규모에서경험하게하는지적모험이다.
영화〈오디세이〉를통해지중해의바다와섬,항해의세계에매혹된독자라면,『지중해의탄생』은스크린너머로그세계의훨씬깊은시간속까지여행할기회를제공한다.
왜지금다시지중해인가
기후,이동,교류와충돌의역사를다시생각하다
그러나『지중해의탄생』이흥미로운이유는고대의바다를생생하게복원한다는데서그치지않는다.이책이출간이후지금까지의미를잃지않는이유는지중해를고정된문명권이아니라끊임없이만들어지고변화해온관계의공간으로바라보기때문이다.
이책에서환경과기후의변화는단순한역사의배경이아니다.때로는인간의활동을제약하지만,다른한편으로는새로운이동과적응,기술혁신을촉발한다.
사람들은기후와환경의변화에대응해이동하고,새로운지역에정착하며,바다를건너다른집단과만났다.이과정에서물건만오간것은아니다.기술과지식,생활방식과신앙,언어와문화가함께이동했다.서로다른집단의만남은갈등을낳기도했지만동시에새로운공동체와정체성을만들어냈다.
지중해세계의역사는끊임없이이동하는사람들과변화하고재구성되는정체성의역사이기도했다.
이러한시각은기후변화와대규모인구이동,국경과정체성,교류와충돌이다시세계적인쟁점으로떠오른오늘날더욱선명한의미를갖는다.
이책이오늘의문제에직접적인답을제시하는것은아니다.대신문명은고립속에서만들어지는것이아니라이동과접촉,적응과교환이오랜시간축적되면서만들어진다는사실을100만년이넘는시간의깊이속에서보여준다.
오늘날우리가고정된국경과민족,문명을너무도당연하게생각한다면,이책은그모든경계가얼마나오랜교류와이동속에서만들어지고또변화해왔는지를돌아보게한다.
브로델이후,지중해를바라보는시선을다시넓히다
페르낭브로델이후지중해는단순히여러국가사이에놓인바다가아니라지리와환경,경제와인간의활동이서로얽히면서역사를만들어가는하나의거대한공간으로인식되어왔다.
브루드뱅크는그시선을문자기록이시작되기훨씬이전으로밀고나간다.
역사를몇세기단위가아니라수십만년의시간속에서바라보고,왕과전쟁이아니라해안선과바람,선박과섬,농경과이동까지역사서술의중심에놓는다.개별지역만을들여다볼때는보이지않았던거대한변화의패턴을지중해전체의시야에서포착해낸것이다.
그결과『지중해의탄생』은선사시대와고대사를바라보는관점자체를바꿔놓은책으로평가받아왔다.지중해선사·고대사연구의방대한성과를종합하는동시에앞으로지중해사를어떻게써야하는지를보여준새로운출발점이라는것이다.
2024년에는초판출간이후축적된고고학,고유전학,환경연구의성과를반영한저자의새로운서문이추가된개정판도출간됐다.이는이책이완결된과거의연구서가아니라새로운발견과연구성과속에서계속해서읽히고갱신되는저작임을보여준다.
‘문명의요람’이되기이전의지중해를만나다
오디세우스의바다에서,인류의바다로
『지중해의탄생』은우리에게익숙한‘고대문명의요람’으로서의지중해에서한걸음더거슬러올라간다.
그리스와로마가등장하기훨씬이전,사람들이처음섬으로건너가고바다를항해하고,곡물과금속을교환하고새로운땅에정착하면서만들어낸세계가펼쳐진다.
지중해는처음부터하나의세계였던것이아니다.
수많은사람의이동과선택,수없이반복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