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손님

여름 손님

$15.00
Description
“인간다움마저 상실하고 그림자처럼 떠돌다 찾아온 손님(들)을
윤순례는 공손히 집에 들이고 가장 온기 넘치는 곳으로 이끈다.”
-소설가 김숨


아직은 멀어서 눈부시게 환한 하얀 불빛들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들
기록되지 않은, 너무도 사적인 침묵의 역사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소설 부문 신진예술가상, 오늘의작가상, 아르코문학상 수상 작가 윤순례의 네 번째 소설집이 은행나무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정박지를 잃고 경계를 배회하는 존재들을 오랫동안 고요히 응시하고 그들의 삶을 포착해 소설로 되살리는 작업을 해온 소설가 윤순례, 그의 디아스포라 문학의 정수가 이번 소설집에 담겼다. 수록된 여섯 편의 소설에는 북한을 떠나 세계 각 나라로 흩어져 뿌리를 내리려는 탈북민들의 모습이 담겼다. 일견 서로 다른 인물의 삶을 조명하고 있는 것 같은 여섯 편의 소설을 섬세히 들여다보면 얽히고설킨 관계망이 뚜렷이 드러난다. 윤순례는 이런 연작소설의 구조를 택하여 탈북의 고통이나 괴로움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맺는 관계에 집중함으로써 그들의 삶을 복원한다. ‘무겁지 않게, 가볍지 않게, 그들의 이야기를 펼쳐놓는 내내 고심했’다는 작가의 말에 신뢰가 가는 이유다.
태어난 곳을 떠나 타지에서 터를 잡고 살아가려는 이들의 역사는 쉽게 언어화되지 않는다. 탈북의 기억은 각자에게 다르게 기억되며, 그들이 겪는 지금 역시 서로 다르다. 그러나 그들의 과거는 늘 침묵 속에 머물러야 하고, 그들이 맺은 관계는 서로에게 낙인이 되기도 한다는 점에서 그들은 같은 고통을 공유한다. 이러한 상황은 그들을 부끄러움이나 범죄와 친연하도록 만든다. 그러나 작가는 그들의 선택을 가장 인간적인 이야기의 순간으로 가져온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침묵에 잠겨 있던 ‘사적인, 너무도 사적인’ 역사를 기록하기 시작한다. 북한에서 맺은 관계와 탈북을 위해 맺은 관계, 남한을 비롯한 새로운 정박지에서 만난 새로운 사람들과의 관계, 심지어는 탈북민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관계. 그 모든 양상을 두루 꼼꼼히 살피면서, 작가는 하나의 점으로서 존재하는 탈북자가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씨실과 날실로 교차되어 함께 하나의 직물을 만드는 탈북민 이야기를 펼쳐냈다. 그렇게 이 소설은 우리의 가장 가까운 곁을, 그 침묵 속을 조명하며 바야흐로 우리가 인간 존엄성에 대해 성찰할 때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저자

윤순례

1967년전북부안에서태어났다.추계예술대학교문예창작학과에서소설을전공했고,대학졸업후잡지사와출판사에서편집자로일했다.1996년『문예중앙』제19회신인문학상에중편소설「여덟색깔무지개」가당선되어등단했으며,2005년장편소설『아주특별한저녁밥상』,2007년중단편소설집『붉은도마뱀』을,2016년중단편소설집『공중그늘집』을출간했다.2003년한국문화예술진흥원소설...

목차

여름손님7
바람빛자장가45
심봤다57
별빛보다멀고아름다운89
저멀리서하얀불꽃이129
사적인,너무도사적인침묵의역사171

출판사 서평

없는길을만들며경계를넘어온이들
그뜨겁고시린,멀고먼도정의족적

여섯편의소설은화은,철진,종우,성국,화진등의인물을중심으로전개된다.그러나섬세한독자라면각인물이맺고있는관계속에서서로가마치별자리의별처럼연결되어존재한다는것을알게된다.이를테면〈여름손님〉의희숙이남한으로오며‘화은’이라는이름을쓰게된이유가〈바람빛자장가〉에서밝혀지거나,〈별빛보다멀고아름다운〉에서뒤셀도르프에서살고있는종우가구매한가짜신분인북한사람‘김원철’이화진의전남편임이〈사적인,너무도사적인침묵의역사〉에서드러나는식이다.

탈북민사이의관계그리고탈북민과탈북민이아닌사람들과의관계를모두톺아보며,작가는탈북민과탈북민이아닌사람들과의관계에서는물론탈북민사이에서도다양한역학이있음을섬세하게드러낸다.〈여름손님〉에서는탈북후오색이라는곳에서조용히살고있는화은에게하나원동기인철진이찾아오는사건을보여준다.오색에는화은과함께탈북하여지금은남한사람을만나사과농장을꾸리고있는,일견남한에잘적응한듯보이는선숙도함께다.철진이사람을죽였다는뉴스를본화은은선숙에게철진을숨겨주자고말하지만거절당한다.이세명의탈북민을우리는‘탈북민’이라는이름으로묶어호명할수있을까?

-언니,경찰이묻거든우리집에일꾼보내줬다고해줘.먼친척,집치우는일도와주라고보냈다고.알았지?철진이가곤란한상황이라내가둘러대서…….
-화은아지금나무지바쁘다.
툭전화가끊겼다.바쁜일?힘든일?북한말로‘바쁘다’는힘들다는뜻이고남한에서는할일이많다는뜻이라,여자는선숙언니의말을정확히알아들을수없었다.
-〈여름손님〉30~31쪽

한편남한이아닌땅에서정착하기위해고군분투하며맺는관계에대한섬세한성찰이돋보이는작품들도있다.탈북민들이남한이아닌곳에체류하거나,북한에서탈출하며중국등지를거치는동안벌어지는일들에대해다룬작품이다.〈바람빛자장가〉는편지형식을빌려화은이북한을떠나중국에체류하던중만난남한사진작가의이야기를보여준다.마음을나누었다고생각한상대가탈북민들을피사체로만대했다는것을알게되는순간,그리고그사진작가의고향을찾아오색에정착했다는것을알게되는순간,독자는화은의남한정착이과연원하던정박지에도달한일인지를고민하게된다.〈별빛보다멀고아름다운〉에서는독일뒤셀도르프에거주하고있는종우의이야기를다룬다.종우는남한사람이나사업실패로인해해외로도주하는중북한국적인‘김원철’의신분을취득하게된다.종우는독일에서탈북민선화를만나고,탈북민이라는공통점으로가까워지며자신의가짜신분에대해고민하게된다.이단편들은누군가는버려야했고누군가는취득해야했던‘북한국적’이가지는다층적의미를섬세하게다루면서탈북민서사의진폭을넓힌다.

눈속에칼날이박힌듯날카로웠던난민지위심사위원들앞에서탈북자김원철이살아온세월을늘어놓을때종우는눈물을쏟았다.추방을당하면어디로가야할지모른다는절박함이고국을등지고나온김원철과다르지않았기에눈물은뜨거웠다.(……)긴세월동안종우는강을건너오는북한사람들을보았다.그들이북송의위험을안고중국땅에서어떻게살아가는지생생히말할수있었다.국경경비대가강을넘는제동포의뒤에서총을난사하는것을눈앞에서직접보았기에.품속을파고들며고백하는선화의맥락없는말들또한속속들이알아들었다.연막을치며끊거나건너뛰는말들의선과선을잇고,점과점을이어붙일수있었다.
-〈별빛보다멀고아름다운〉110~111쪽

그러나무엇보다이이야기가씨실과날실처럼교차해도달한곳은우리의곁이다.이것이우리와무관한이야기가아님을증명하듯,소설은남한에도달한탈북민들의이야기를다룬다.〈저멀리서하얀불꽃이〉에서는남한정착후여러일을시도했으나실패한성국을주인공으로이야기를전개한다.성국은여러사업을실패한후전라남도모모도의한민박업소에서운영하는체험프로그램에지원하여의식주를해결하며지낸다.성국이북한을탈출하게된것은북한에서사랑하는사이였던해미의남동생대신마약사범으로몰렸기때문으로,모모도에서성국은민박집딸이마약을한다는이야기를듣고그에게관심을가지게되는한편,자신이모모도에오게된것이근방에해미가탈북후정착한유자농장이있기때문은아닌지의심하게된다.

한편해미의유자농장은〈심봤다〉와〈사적인,너무도사적인침묵의역사〉의화진과도연결된다.탈북후남한남자를만났던화진은중국에있는아이들을데려오기위해북한에서알고지내던남자와가욋일을하다들켜구타당한다(〈심봤다〉).집을벗어난화진은여러일을전전하며아이들을남한에데려오는것에성공하지만,아이들을남한에서키우는것과중국에서생사가묘연해진남편원철의생사를묻는시누이의이야기를듣는것에지쳐있다.화진은평창동의한집에서집안일을돌보며지내게되고,다리를다친집주인대신선을보러나가게된다.남자는화진을마음에들어하며집안행사에초대하고,화진은남자의집이해미의유자농장과가깝다는것을알아차린다.해미는북한을나와중국에체류할때탈북여성을고용하는유흥업소에서포주노릇을했고,화진은그곳에서일을한적이있었다.그러나이런기억들을어디에서이야기할수있을까.화진은잠든집주인의옆에서,혹은유자농장이있을지도모르는남자의집근방을헤매며기억들을두서없이떠올린다.역사가되지못하고침묵의어둠속에묻어두어야만하는기억들을.

깨소금넣은송편을먹으려고가보면앙금은누군가쏙빼먹은것만내차지였다고,그래도남조선에오면반짝반짝빛을내며살줄알았다고,낡은지오래인꿈에대해서도말하기에는불빛이너무밝았다.풀길없는물음표만남기고돌아가는세상사도있으니집주인여자대신여기까지오게된경위야여치가수풀속을기어가듯자연스런이치아니겠냐고허심히말할수있을까?두서없는사념들이무엇에가닿을지모르는채로화진은빛을향해발을내디뎠다.
아직은멀어서눈부시게환한불빛들을향해…….
-〈사적인,너무도사적인침묵의역사〉262쪽

우리와동시대의이세상한구석에분명히존재하는,
인간의존엄성에대한성찰을요청하는여섯편의이야기

각자도달한곳은다를지라도삶을관통한불안정의경험은그삶에오래상흔을남긴다.더나은삶을위해북한을탈출해세계의각국으로흩뿌려진사람들은주권권력이더이상보호하지않는상태에놓인다.그러하므로이들이겪는불안정성의경험은단순히개인적인경험이아니다.그러나그들의경험은언어화되지못하고,그들이맺어온관계는순식간에소멸하거나왜곡되며때로는그들의약점이되기도한다.그리하여그들의역사는기록되지못한침묵속에,사적인기억으로남는다.그러나윤순례는그침묵의어둠에‘아직은멀어서눈부시게환한불빛’을비춘다.그들의경험을언어로써되살려내려는것이다.

작가가소설로써재현하는것은정박할곳없이뿌리가뽑힌풀처럼세상의경계들을떠돌아다니는이들의삶의모습이다.그러나그들의삶은아주먼곳에있지않다.어느여름날문득삶에틈입해들어오는손님처럼,이들의이야기는불현듯우리의삶을찾아온다.예기치못한손님을맞았을때의당혹감을넘어서우리는무엇을할수있을까.바로그자리에인간의존엄성을소생하려는그애씀을놓을수는없을까.소설은한국문학사에서유구하게이어져온그굵직한물음을바로이순간의독자에게건넨다.

작가의말

내가직접알고있거나,건너건너들었거나,인터넷선을타고흘러나온이들의이야기를펼쳐놓는내내고심했다.무겁지않게……가볍지않게…….가볍고무거움사이의틈메우기는독자의몫으로남기며알게된것들도있었다.(……)없는길을만들며먼먼도정에나선이들…….김현선생님의“문학은배고픈거지를구하지못한다.그러나문학은그배고픈거지가있다는것을추문으로만들고,그래서인간을억누르는억압의정체를뚜렷하게보여준다”에힘입어어설프게나마이들의목소리를내보는작업을시도할수있었음을고백한다.

추천사

우리는끊임없이서로에게손님이돼찾아가고찾아온다.어쩌면늦은밤내집을찾아와문을두드릴지모를손님을나는어떻게맞이할것인가.탈북민으로인간다움마저상실하고그림자처럼떠돌다찾아온손님(들)을윤순례는공손히집에들이고가장온기넘치는곳으로이끈다.손님이머무는동안먹이고품으며인간다움을되살려내려애를다한다.이번연작소설집에실린소설들은그애씀의결실이다.-김숨(소설가)

여섯편의작품들에는불안정한삶의그늘에서힘겨운나날을보내는탈북민들이등장한다.각자가도달한삶의현실은다를지라도이따금회고되는기억의파편들을맞추어가다보면이들이겪었던처참한삶의실상이고스란히드러난다.낯선도시에서이들은주권권력으로부터아무런보호를받지못하는‘벌거벗은생명’,즉호모사케르(Homosacer)로살아야했다.작가는이들에대해섣불리연민과동정을보내거나민족감정에호소하지않는다.트라우마로각인된등장인물들의내면세계를섬세하게탐사해나갈뿐이다.우리와동시대의이세상한구석에비참하게내팽개쳐진존재들을조명하면서,인간의존엄성에대한새로운성찰을촉구하고있다.
-이형대(고려대민족문화연구원장)

책속에서

철진이일군텃밭에심을종자로무엇이좋을까,종종생각했다.생명가진것들의앞날에대해서라면소름끼칠만큼의확신이있어무엇이든상관은없었다.
---p.43

종우는꿈꾸었다.일주일에세번열리는터키시장에서과일과야채를풍성하게사들고선화와함께걸어오는해지는거리를,아침저녁구수한밥냄새가흘러나오는정갈하고윤기나는주방을.그속에서강한충동이일었다.실은한국에서크게사업을했던사람이라고,진짜이름은김원철이아니고박종우라고,북한에는발한짝디딘적이없다고…….누구에게도해보지않은고백을하고도싶었다.
---p.144

취기로어지러웠지만눈앞의이상한물체가무엇인지는알수있었다.종우는몸을비틀대며유리관에서쏟아진생물가까이다가갔다.
-혹덩어리를떼버렸구나.훨훨날아가라마.
가로등불빛속의건물들은죽죽쏟아지는빗속에서도견고했다.그것들을바라보는흐릿한얼굴을되비추는유리창속에상자깊숙이넣어둔낡은공민증속의사내가서있었다.이명처럼귓속을휘도는건레일을밟는기차소리같기도,밀항을위해탄배밑바닥에서들리던엔진소리같기도했다.종우는달래듯이숨을골랐다.지금나는유럽의중심네덜란드와벨기에와프랑스,체코,스위스,오스트리아,폴란드,덴마크등과국경을접한나라한복판에있다고.
---pp.125~126

-모를것들이많습니다.사랑때문에국경을넘었다고생각했는데.무엇때문이었는지…….
흐르는시간속에서는내마음도믿을게못된다고,제입에서투두둑떨어지는말들을들으며성국은멀리떠있는섬들을바라보았다.제말의진위를알수없었다.오랜체증같은게내려가는느낌이좋아거푸술을마시며미진이알아들을수없을말들을늘어놓았다.
---pp.148~149

멀리미사마을에서흘러나오는밤의전등불빛들은아름다웠다.하얗고노랗고붉은빛들이등대처럼손짓하는듯했다.마당가득수확한유자를쌓아놓은해미네넓은거실창에서흘러나오던불빛처럼따스했다.멀어서더욱빛이나는,지붕아래불빛과의거리를가늠하며성국은몸에단단히기압을넣었다.삭주에서해안경비대장으로있을땐튜브없이도위화도까지헤엄쳐가곤했다고,마음을다잡았다.저멀리서하얀불꽃이일렁이며다가왔다.
---p.169

깨소금넣은송편을먹으려고가보면앙금은누군가쏙빼먹은것만내차지였다고,그래도남조선에오면반짝반짝빛을내며살줄알았다고,낡은지오래인꿈에대해서도말하기에는불빛이너무밝았다.풀길없는물음표만남기고돌아가는세상사도있으니집주인여자대신여기까지오게된경위야여치가수풀속을기어가듯자연스런이치아니겠냐고허심히말할수있을까?두서없는사념들이무엇에가닿을지모르는채로화진은빛을향해발을내디뎠다.
아직은멀어서눈부시게환한불빛들을향해…….
---p.2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