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대체무슨맛으로살았니?”
어떤생이든한우주만큼의무게가있다!
소설가정지아의붓끝은쇠락과소멸사이에서흔들리는존재들,‘겨우살아가는삶’조차눈물겹게소중한존재들을향한다.그러나지식인의위치에서낮은곳을향하는연민의시선에머물지않고,그들이사는지상으로내려가반푼이자식을세상에서제일귀애하는부모가되고,노모와함께늙어가는중년의딸이되고,팔순노인네들과아웅다웅티격태격하는친구가된다.그러면서호들갑스럽지않고무겁지않게,경쾌하고넉넉한시선으로묻는다.“너는대체무슨맛으로살았니?”(〈봄날오후,과부셋〉중에서)하고.
이소설집은바로그처럼비루하고누추해보이는인생들이말하는‘인생의맛’에대한이야기랄수있다.작가는밑바닥인생,치매노인,중증장애인처럼더이상떨어질곳없는나락의인생들에서사라지지않는기억의온기를통해인간으로서의존엄을건져올리며,끝나지않는희망의불씨를발견해낸다.그러함으로써하나의인간은하나의우주이며,어떤생이든한우주만큼의무게가있음을증명한다.그래서정지아의소설은늙은것,사라져가는것,겨우견디며존재하는것들의이야기를쓰면서도삶에찌들거나음울하지않으며오히려존재의고귀함을역설하며삶의의미를복원시킨다.
“너는대체무슨맛으로살았니?”
돈도없고남편도보잘것없고직업도없고있는거라곤딸랑아들하나뿐인사다꼬가평생누구에게도기죽지않고당당한이유를그녀는좀처럼이해할수없었다.
“에이꼬야자식때문에살았을거고,하루꼬는남편때문에살았을거고,글쎄,나는뭣땜에살았나…….”
─〈봄날오후,과부셋〉중에서
생의잔인함에주눅들지않고,
여전히우리앞에끝나지않은희망의불씨를지피는,
간신히살아존재하는것들을향한사랑과구원의단편들
〈숲의대화〉는늙은영감운학이아내가묻힌잣나무숲에서60년전에죽은동갑내기도련님을만나는이야기다.자신의아이를뱃속에품은여자를다른남자에게보내고,빨치산의행렬에다시가담하려던도련님은매복에걸려죽음을맞이했고,다른남자의아이를임신한여자를아내로맞이한운학은평생아내를줄기차게짝사랑하며살아왔다.젊은도련님과늙은운학의마치몽유록같은대화를통해작가는서로의다름을완전히‘이해’할수는없어도완전히‘존중’할수는있음을,실은세사람이생사의갈림길을뛰어넘어‘함께’살아왔음을일깨운다.육신은죽었지만기억만은끈질기게살아남아산자의마음속에평생함께하고있었던것이다.그것은사랑의집착이아니라끊어낼수없는운명의긍정이고,지나가버렸지만결코지울수없는역사의흔적이기도했다.또한편의아름다운‘지리산타령’(문학평론가김윤식이〈세월〉을두고한말)이다.
고달픈시상품을라말고버리면되는디,니는끝내버리질…못했니라.
버리다니무엇을?종의신분물려준부모를?종놈에게천형처럼따라붙은가난을?그는무엇하나버릴생각하지못하고,그것품고갈생각만했다.도련님아이품은여자도,도련님마음에품은여자도,도련님과여자의아이도,그는품고갈생각,그것외엔하지않았다.
버릴것이나는…한나도없었어라.
─《숲의대화》중에서
성격은서로달라도평생친자매나다름없이의지하고지내온세과부할머니에이꼬,하루꼬,사다꼬의봄날나들이이야기〈봄날오후,과부셋〉.여든살이넘고치매에걸렸어도질투하고사랑하는것은소녀적이랑똑같다.“나없을때또비밀이야기하면죽어!”아직도털어놓지못한수많은비밀들이인생의황혼을바라보는그녀들을신비롭고매혹적인존재로만들어준다.정지아의소설은이렇듯고통에신음하는사람들을보여주느라독자의가슴을여미게하다가도,불현듯따스한유머를잃지않고고난속에서도더크게웃을줄아는사람들을보여준다.이는고통을반드시극복해야만할장애물로보는것이아니라,고통이나죽음조차삶의어엿한일부로끌어안는작가의따스한시선에서비롯한다.2009이상문학상우수상수상작으로영어권과이태리어어로번역되었다.
〈천국의열쇠〉는중증장애인인‘그’가혼자만의천국인헛개나무과수원에가련한베트남여인호아를숨겨주는이야기다.사지육신어느하나원하는방향으로가누지못하지만,그에게는평생온몸을바쳐일궈낸3천평짜리헛개나무과수원이있다.살아있다는것자체가지옥같은환경속에살아가면서도그는온전히자기만의힘으로‘천국의열쇠’를창조해낸것이다.그리고그의아름다움은‘나만의천국’이었던이헛개나무숲의철조망문열쇠를,남편에게언제나처럼혹독하게구타당하고또다시아기에게젖을물리기위해집이라불리는지옥속으로돌아가야하는‘호아’에게건네주는장면에서완성된다.‘나만의천국’을배타적으로소유하지않고,백척간두에서있는또다른타인과함께나눔으로써‘우리들의천국’을공유하는것이다.
“가시내야,니는엄마가죽었능가살았능가궁금하도않냐?”생색내기좋아하는언니의전화한통에불려와중년이된‘나’가엄마와언니와함께목욕가는이야기〈목욕가는날〉.엄마와언니가마음에없는악다구니를주고받으며서로를헤아리는모습을보면서,말없이엄마마음을헤아려왔다고생각했던나는두사람이야속하기도하고스스로한심하기도하다.귀에착착감기는전라도방언으로잔잔한일상을정감넘치게묘사한이작품은평범한하루를빛나는순간으로바꾸어놓는정지아식리얼리티의진경을유감없이보여준다.2011이상문학상우수상수상작.
〈브라보,럭키라이프〉는천금같은아들이교통사고를당해식물인간이되자무려23년간변함없는사랑으로아들의재활을위해삶을바치는노부부의이야기다.의사도포기한막내‘경우’는15년전기적처럼눈을떴고,23년만에한쪽팔을움직였다.이미재산이바닥난지는오래,그럼에도불구하고포기할수없는‘아직죽지않은아들’에대한사랑은눈물겹다.정지아의시선은이렇듯겨우존재하는사람들의소박하고도절박한희망을향해빛나고있다.그작고여린구원의빛을따라가는과정이바로정지아가떠나는이야기의여정이고,작가로서피할수없는구도(求道)의행군이다.
한산이씨27대종손을외국인여자와결혼시킨집안의이야기〈핏줄〉.마흔너머까지장가를못가는아들을조선족,태국,필리핀여자와차례로결혼을시켰지만돈만밝히거나멍청하거나인물값을하거나해서다돈을쥐어주고쫒아냈다.결국김센이아예베트남까지가서직접고른며느리쑤언.아니나다를까야무지고살림잘해나무랄데없지만까무잡잡한얼굴을보고있자면울화통이터지는김센이다.에미를쏙빼닮아새까맣고오종종한갓난아이를받아든김센의표정이울어야할지웃어야할지엉거주춤하다.오늘날의농촌현실을희화적으로묘사한이작품은어쩔수없이다문화사회가되어가는현실과그속에서마주하는다양한갈등을경쾌하고도피부에와닿게그려냈다.일본에번역되었다.
〈혜화동로터리〉는내일을기약하기힘든세노인의반세기우정을보여주는작품이다.만석꾼의자식으로빨치산이된‘최’,미군켈로(KoreaLiaisonOffice)부대원‘박’,프랑스유학파지식인이지만반세기넘게박과최의술시중을들며그들의온갖넋두리와회한을받아주며사는‘김’.삼류빨치산이니,삼류켈로니하며만담처럼콩닥콩닥주고받는최와박의대화는단순한언어유희가아니라지나온모든세월의뜨거운증명이다.그들의가족은대를이어서로를보살피는인연이었고,인생의막다른골목에서서로의존재는유일한버팀목이되어주었다.역사의아픔을,잊지도못하고버리지도못한채묵묵히끌어안고살아가는세노인의우정을통해,계급적연대와역사적연대를동시에보여주는작품이다.
“왜이래?토벌대벌벌떨던남도부부대에서마지막까지살아남은몸이야.”
“흥,그러니삼류지.오죽못났으면살아남았겠니?좌나우나잘난놈들은다먼저갔어.몰라물어?”
“그러는너는잘나살아남았니?”
“누가뭐래니?나도삼류지.같은삼류니까평생어울려놀았지.”
─〈혜화동로터리〉중에서
〈절정〉은갑자기사라진한노숙자의이야기를통해끝없이포기하고,절망하고,추락한사람들이느끼는‘희망에대한공포’를노래한다.간암이라며안녕을고한김씨의편지를받고알코올중독에서간신히회복되어‘좀더나은삶’을향해발버둥쳐온‘그’는충격으로할말을잃고다시술을마시기시작한다.그때들려오는고시원옆방의숨죽인정사소리는힘겨운노숙생활동안‘잃어버린무언가’를문득,깨닫게해준다.삶의‘나락’에서삶의‘절정’을꿈꾸는이들의고통스러운희망은‘공포’이기전에인간이인간으로서잃지말아야할‘존엄’의다른이름이기도하다.정지아의소설속인물들은이렇듯절망속에서도뜻밖에간절한소통의희망을버리지않는다.
끝없이땅속깊은곳에묻힌암반을캐는남자의이야기〈인생한줌〉은한평생몸바친일이허망한일일수도있지만그렇다해도그인생조차가치없어지지는않는다는것을보여준다.글을쓰기위해시골로내려간전직기자의귀촌생활을그린이야기〈즐거운나의집〉은귀농을결심한도시인이농촌사회에적응하려는과정에서지역주민들의이해관계와사사건건부딪히는갈등과화해를감칠맛나게그려냈다.전직고위층간부의아내김여사가입주가정부와벌이는팽팽한자존심의대결을그린〈나의아름다운날들〉은정지아의작품중에예외적으로풍자적인작품으로,정지아소설의소재와스타일이점점다양해지고확장되어감을알수있다.
정지아작가는한인터뷰에서이렇게말한적이있다.“1%의삶만의미가있는게아니라,99%의삶도의미가있다는것을보여주는것,그게문학이아닐까요?”이소설집은바로이99%의평범한삶이얼마나비범함으로빛날수있는지를증명하고있다.99%의사람들은신분이나계급에상관없이,견딜수없는아픔을천형인양,운명인양,차라리습관인양견디고살아간다.그‘평범한비범함’이야말로이참혹한세상을끝내포기하지않고건너가게만드는,우리가매일매일마주치면서도무심히스쳐지나가는일상의기적이다.그리고거기서그치지않고그힘없고빽없는사람들이미운구석,다른구석티격태격보듬고살아가며만들어내는불협화음을넘어선‘연대의진풍경’이야말로정지아의문학이가슴먹먹한울림과묵직한감동을주는이유다.
추천사
나는정지아의소설을쫓아산으로달리고들로만달리는게아니라,내게이미지나간시간이거나혹은아직다가오지않은시간들속으로도달린다.나또한어느날,어느산속깊은곳에홀로앉아있다가내가사랑했던사람의연인을만나게되지는않을까.목숨을걸지못해누추해졌던사랑이그곳에서마침내빛나게되지않을까.우리가한사람을사랑하고,한세월을사랑하였으니,우리가이제사랑이되었네,말하게되지는않을까.정지아는그렇게나를내가짐작하지못할시간속으로데려간다.
-김인숙(소설가)
정지아의소설속에서는오직오늘만바라보고살아가는사람들의참혹한절망이꿈틀거리고,오직내일만바라보고살아가는사람들의식지않은희망이들끓는다.나락이다싶을때마다더깊은나락을보여주는생의잔인함에주눅들지않고,여전히우리앞에끝나지않은희망의불씨를지피는것이야말로따스한이야기꾼정지아의변치않는매혹이다.
-정여울(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