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팔마스는 없다 (양장)

라스팔마스는 없다 (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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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2018년 진주가을문예에 중편소설 〈런웨이〉가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오성은의 첫 장편소설 《라스팔마스는 없다》가 은행나무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소설집 《되겠다는 마음》에서 보여주었던 섬세한 서정성과 환상 서사는 《라스팔마스는 없다》를 통해 더욱 확장되고 깊어지는 양상을 보인다. 소설가 백가흠은 이번 작품을 읽고 “작가 오성은의 문학적 여정을 함께한다는 것, 같은 시대를 보내고 있다는 것은 독자로서 축복이다”라는 찬사를 남기기도 했다.

소설은 영도 연안에서 기름배를 모는 선장 심만호가 알츠하이머 판정을 받은 뒤 수십 편의 글 뭉치만을 남긴 채 자취를 감추면서부터 시작된다. 하루아침에 사라져버린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헤매는 규보. 아버지가 남긴 ‘글’과 주변 인물들의 ‘증언’을 통해 규보는 그동안 아버지가 감춰왔던 진심과 표정을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한다. 흐려지는 기억을 붙들기 위해 쓰기 시작한 글이, 실은 심 선장 스스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한 매개체가 되었다는 점을 미루어 보아 이 작품 속에서 ‘글’이 인물 내면에서 작동하는 방식은 굉장히 인상적이다. 아버지가 쓴 글을 읽어나가는 규보, ‘이문’이란 공간에서 쓰고 낭독하는 일, 만호가 지어 보낸 아들의 이름 등 많은 것들이 ‘글로써 직면하기’와 맞닿아 있다.

또한 오성은은 환상(아버지의 글)과 현실(사람들의 증언)을 오가는 구성을 차용해 바다가 품고 있는 불확실성을 기저에 깔고, 대양大洋을 둘러싼 외항 선원들의 이야기를 촘촘하고 밀도 있게 쌓아나간다. 그러는 한편 심 선장의 어머니인 성주댁, 규보의 어머니인 경희 씨의 이야기는 거친 폭풍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바다처럼 잔잔하고 서정적으로 흐르며 소설의 균형을 잡는다. 이렇듯 《라스팔마스는 없다》는 기존의 해양 서사를 바탕으로 새로운 방식의 해양 노마드 서사를 완성해냈다.

저자

오성은

부산영도에서태어났다.2018년진주가을문예에중편소설〈런웨이〉가당선되어작품활동을시작했다.소설집《되겠다는마음》이있다.

목차


섬,사라지다
유언장
돛과배
무성호
카트리나
묘박지
또다른문
라스팔마스는없다

작가의말

출판사 서평

하늘과바다의경계가허물어진깊은어둠을지나
파도의목소리를실어나르다

심만호선장은무성호의주인이다.젊은시절외항선선원이었지만지병을앓던아내가세상을떠나자아들규보를돌보기위해뭍으로돌아와내항선선장자격증을취득한다.그는전재산을끌어모아작은유류선한척을사들여‘무성호’라이름붙인다.무성호는심선장의몸이되어바다이곳저곳을누비고,심선장은기름을운반한돈을모아규보를키웠다.

규보는한경비업체의사무원으로취직해9년을근속으로일하던중,자신과함께일해보지않겠느냐는아버지의제안에뱃사람이된다.하지만아버지와일하는방식이극명하게달랐던규보는결국뱃일을그만두고,이후작은편의점을운영하며종종아버지의식사를챙기러영도항구로간다.그러던어느날,규보는아버지가알츠하이머에걸렸다는사실을알게된다.초기라증세가심각하진않지만,시간이흐를수록점점더알수없는소리를해대는아버지를보며걱정이많다.바닷가주변의호텔공사가시작되며항만은뱃사람들로부터서서히멀어지고있었다.근처공장을허물고카페가들어설거라고,조각배들이정박된바다에요트가떠다닐거라고소문이돌았다.평생을뱃사람으로산아버지는그변화를견디기어려울것이다.병의증세가심해질수록배를타는것조차어려울것이므로규보는아버지를위한노후대책을하루빨리세워야한다는생각에사로잡힌다.

“규보는아버지가이끄는대로낮은의자에앉아머리를숙였다.아버지는비누거품을내좁은등을문지르기시작했다.아버지의손바닥은때수건보다더거칠거칠했다.규보는천장에맺힌수증기가물방울이되어떨어지는소리를듣고있었다.아버지는등을슥슥밀어나갔다.규보는아무런생각도하지않았다.그저물방울이몇번떨어지나세고있었다.물방울이바닥으로떨어지는동안규보가기억하던심선장은불현듯왜소한노인이되어버렸다.정말몇방울이떨어졌을뿐이었다.”_본문에서

언젠가부터아버지는자꾸라스팔마스이야기를꺼냈다.한번도언급한적없던할아버지이야기를불쑥꺼내더니“라스팔마스에가면할아버지를만날수있다”고말하는것이다.규보는할아버지가라스팔마스에간이야기를한참동안이나듣고있다가결국답답함을감추지못하고아버지에게따져묻는다.도대체할아버지이야기는왜자꾸하는거냐고.그날,심선장은규보에게한마디말을남기고서무성호와함께감쪽같이사라져버린다.“규보야.저배는항구가집일까,바다가집일까.”

“저는요즘들어제가아닌사람이되는경험을종종합니다.지금이순간도정말본연의제가맞는지확신할수는없습니다.그러나달리생각해보면,내가백퍼센트의나자신이라고여길수있는사람이얼마나될까요.그래서제가여기에와있는건지도모르겠습니다.”_본문에서

규보는경찰에실종신고를한다.CCTV를다뒤졌지만심선장이마지막으로만난사람은아들규보였다.규보는아버지가남긴흔적들을뒤지다아버지가1년넘게‘이문’이라는곳으로일정한돈을보내고있었다는사실을알게된다.규보는이문을찾아가아버지의행방을묻는다.이문의주인인한사장은심선장이어디로갔는지는알수없지만그가여기서줄곧글을써왔다는사실을규보에게알려준다.규보가아버지의글을읽고싶어했으나그건심선장개인의글이라보여줄수없고,한사장은대신그의낭독영상이담긴USB를건넨다.“어떤글들은유언장을대신합니다.”한사장의말이마음에걸렸으나규보는애써마음을다잡는다.아버지는절대,스스로목숨을끊지않았을것이라고.

심선장주변사람들은규보에게아버지가스스로배를끌고나갔으면절대로바다에빠지진않았을거라고말한다.배를그렇게오래탄사람이라면배가뒤집히지않는이상빠질일이없다는것이다.규보는우연히아버지가언급했던〈돛과배〉라는전시포스터를발견한다.조강우개인전.그는조강우의작업실을수소문해찾아가고,조강우의전시프로젝트가실은아버지로부터시작한것이라는놀라운이야기를듣게되는데…….

“조강우가낭독회영상을보고있는동안규보는창가로다가가항구의낮은풍경을바라보았다.노트북스피커를통해서심선장의목소리가나지막이들려왔다.규보는벌써몇번이나돌려본영상이었다.창너머바다에는물비늘이넘실거리고있었다.어떤시간대의바다는거대한물고기의표피같기도했다.바다의오후가느리게흐르고있었다.심선장의목소리가텅빈작업실내에서울리고있었다.규보는이젠거의다외울수있을정도로문장하나하나가익숙했다.작은배들이수시로오가며물결을만들고있었다.”_본문에서

기운달과함께저물어가는기억들
생명의빛은언제나한방향으로만맹목적이었다

바다는자유와속박이공존하는공간이다.어디로든갈수있지만어디로도갈수없는곳.배는끝없는망망대해위에있지만선원들은오직배위에서만생존할수있고,바닷길은어디로든뚫려있지만배가갈수있는길은정해져있기때문이다.심선장은외항선생활을정리하고부산으로돌아와서도바다와배를떠나지못한다.바다위에서의고립된시간이그에게심각한우울증을유발했음에도배를계속탄다.탈수밖에없다.평생파도를가르며살아온심선장에게‘바다’는삶그자체였을것이다.그렇기때문에알츠하이머판정은그에게사형선고와다름없는일이었을지모른다.사랑하는어머니와아내,그리고아들에대한기억이조금씩사라지고종국엔자신까지잃어가는병.하지만심선장이기억을붙들기위해글을써나가는과정은역설적이게도그를‘스스로’움직이게한다.

한편소설은부산영도,특히항구를중심으로한깡깡이마을의변화를섬세하게묘사하고있다.파도를가르는거친갑판위의삶을뒤로하고그가돌아온곳은,그를숨쉬게했던기억으로가득한고향영도다.실제‘깡깡이마을’은선박의표면에슨녹을벗겨내는망치질소리때문에‘깡깡이마을’이라고불리게되었는데,이는작품속에서성주댁이만호를키우기위해몸바쳤던일이기도하다.깡깡이질소리가울려퍼지던마을은시대가바뀌며이제깡깡이예술마을로변화했고,이는만호의세대가규보의세대로넘어갔다는의미이기도할것이다.

“그가이바다에서다른바다로생을가로지르는동안규보는슬픔도두려움도없이제속도로커나갔다.규보가자라나는만큼주변의것들은희미해지거나작아지고있었다.생명의빛은언제나한방향으로만맹목적이었다.”_본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