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기일지- 은행나무 시리즈 N° 24

잃기일지- 은행나무 시리즈 N° 24

$17.00
저자

이선진

저자:이선진
소설가.2020년《자음과모음》신인문학상을수상하며작품활동을시작했다.소설집《밤의반만이라도》가있다.

목차

잃기일지……007
작가의말……223

출판사 서평

두겹으로포개지는시간의궤도
스스로미아가되기를택했던계절을마주하다

출판사에서타인의문장을다듬는일을하고,로맨스소설속오탈자찾기를취미로둔편집자진진주에게삶이란온전히몰입하는무대가아닌,객석에우두커니앉아무대위의자신을바라보는일에가깝다.감정이소용돌이칠때마다“나는마음이아프다”라고말하지않고“진진주는마음이아프다”라며스스로를제3자의자리에놓아두는사람.자신과의인력을지워내고타인처럼거리를두어야만마음이편한그는규정되지않은관계속에서감정을극도로아끼며일상을영위해나간다.모든것이겉돌던12월의어느날.갑작스러운소란과함께첫눈이내리고진주는뜻하지않게시누이의아이들을홀로돌보게된다.고요하던진주의일상에침입한다섯살조카석기는예측불가능한존재다.

너는둘중에누가더좋은데?만약둘이영영헤어진다그러면누구랑같이살건데?진진주는그렇게물으려다관두었다.이석기는엄마가좋아?아빠가좋아?하고물었을때둘중하나를택하는대신“나는엄마랑아빠하나뿐이야!”자신있게소리치는애였다.‘하나뿐’의정의를지맘대로달리했다.(21쪽)

석기는소떡소떡이먹고싶다고떼를쓰다가도막상눈앞에대령하면“이제안먹고싶대요,쟤가”라며엉뚱하게주어를돌려버린다.석기의종잡을수없는행동은계속된다.어린이집에서낮잠을자다말고횡단보도위에멈춰서서스스로‘실종’되기를자처한다.건너기위한길이아니라잠시머무르기위한자리인양횡단보도한복판에선조카를데리러가며,진주는결코흔들리지않을줄알았던자신의내면에파문이이는것을느낀다.게다가석기의유치원가방속에서발견된한장의종이―겉보기엔텅빈백지같지만연필을눕혀살살문지르면글씨가드러나는깜지―는석기의손목에남아있던벌건시계모양자국과맞물리며먼시간속에잠들어있던진주의기억을현재로소환한다.

그런데어째서인지이석기의물음을건네받은그때그순간,나는스스로를남처럼대하지않고스스로처럼대했다.인사이드아웃,부캐를안으로수납하고본캐를밖으로내돌렸다.전설의포켓몬처럼진귀한순간이었다.난나일뿐이야,누구도나를대신할순없어!(31쪽)

이야기는낯선이국의어학원지하방,역시세상과섞이지못하고겉돌던아이‘펄’과마주앉아써내려가던진주의교환사전으로독자들을데려간다.단어의뜻을제멋대로정의하며마음을나누던시간,진심을다해사랑했던것들을끝내지키지못하고영영잃어버려야만했던상실의계절이,지워지지않는손목흉터처럼진주의시간속에여전히똬리를틀고있다.상처받지않기위해‘내’가아닌‘진진주’라는타인으로숨어들어야했던과거가석기의투명한시선을따라조금씩허물어지기시작한다.세상속에서자꾸만길을잃어버리는석기와시간속에서영영길을잃어버린채멈춰선진주.두사람은어긋난시곗바늘을되돌리듯서로의발자국을포개며잃어버린기억을따라걷기시작한다.진주는과연자신이외면해왔던슬픔과결핍의페이지를제대로마주하고침묵의사전속에잃어버렸던‘나’라는단어를다시적어넣을수있을까?

사춘기가오기가무섭게온갖규칙을위반하고세계를헤집고다니는식으로존재감을발휘하는애들한테어른들이아주발라당까져가지고!하고싫은소리를했다면,나는까지는게아니라지워지는방식으로살아남았다.그러니하루가멀다하고조금씩서서히지워지던내가앓던건성장통도존재통도아닌부재통이었을지도몰랐다.(127~128쪽)

상처의자리위에다시쓰는단어들
침묵을건너비로소완성되는자기호명

《잃기일지》는언어의형식과균열을서사의뼈대로삼는지적인소설이다.진주는어린시절경험한어머니의죽음이후,선택적함묵증을겪으며‘말’을잃고침묵을모국어처럼체득한인물이다.그에게언어는소통의도구가아니라세계로부터자신을격리하는가림막이다.진주는끊임없이자신을1인칭이아닌‘진진주’라는3인칭으로부르며고통의주체로부터자아를탈각시킨다.그와동시에소설전반에반복되는“내사전에~은없다”라는문장과단어의의미를자유롭게정의하는사전놀이는사회가규정한정상성에함몰되지않고자신의고유한자리를지켜내려는,조용하지만완강한방어적선언에가깝다.

소설은‘지금-여기’의진주와‘그때-거기’의진주를“시시각각(씨씨깎깎)”겹쳐놓으며시간의선조성을거부한다.작가의말에서고백하듯,시간은단선적으로흐르지않고“양안복시”처럼두겹으로포개진다.필리핀바기오의지하방에서펄과주고받았던교환사전의침묵은현재시점에서조카석기가보여주는기벽과공명한다.석기는진주의유년시절이투사된거울인것이다.무엇보다작가는“잃어버린것을더잘잃어버리는”일을통해,온전한소유나완벽한복원이불가능한세계에서억지로빈자리를메우기보다그부재자체를응시하고품어안는다.검은잉크로쓴문장뒤에남겨진새하얀깜지의눌린자국처럼,드러나지않았으나분명히존재하는침묵의상흔을끌어안을때,진주는비로소오랜시간남처럼대하던‘진진주’라는방어벽을깨고나와“나는나”라고스스로를호명하며주어의자리위에당당히바로선다.

똑똑,하고노크하자굳게잠긴문안쪽에서딸깍,하고잠금쇠풀리는소리가들려왔고,그건곧입국이허가되었음을의미했다.그러나내게허락된건한시적인체류일뿐,서로의시간과서로의마음과서로의사전에적힌단어를완전히포개놓는것은밤하늘의별을따오는것만큼이나아득한일이었다.그아늑한아득함속에서,우리는종종서로의이름을포개어놓았다.(134~13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