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봄, 그날을 기다린다 (나혜석의 봄은 왔을까)

새봄, 그날을 기다린다 (나혜석의 봄은 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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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나혜석(羅蕙錫, 1896년 4월 28일~1948년 12월 10일)은 일제강점기에 왕성하게 활동한 화가이자 작가, 시인, 조각가, 여성운동가, 사회운동가, 언론인이다. 이 책은 나혜석의 삶을 따라가며 우리가 알고 있는 나혜석의 삶과 나혜석이 지향했던 삶의 방향에 대해 다시금 돌아보는 글이다.
저자

정혜영

경북대학교교육혁신본부글쓰기교과초빙교수

1964년대구출생.경북대학교인문대학국어국문학과졸업.동대학원에서박사학위를받음.일본쓰쿠바대학교객원연구원,게이오대학교교환교수로있으면서일본근대문학과한국근대문학비교연구를진행했음.주요저서로는「환영의근대문학」,「식민지기문학의근대성」,「탐정문학의영역」,「대중문학의탄생」등이있고논문으로는「다이쇼초기의일본과조선의신여성」(「이향으로서의일본」,勉誠출판사,2016.일본서공저)외다수가있다.

목차

1.어색한한장의기념사진
2.순정한혁명의유전자
3.눈부신제국의수도도쿄,신여성의도시도쿄를향하여
4.현실의공간,조선그리고만주
5.날마다축제와같은도시,파리
6.삶의절정이자파국이이루어지는공간,파리
7.남자들,최린과김우영
8.나혜석,새봄그날을기다린다
9.나혜석의봄은왔을까

출판사 서평

소설가염상섭은나혜석이죽은후,그녀를회고하는간단한글을남긴다.이글에서그는나혜석을타산적이고현실적인사람이라고언급한다.김우영과의결혼이판단근거이다.사랑해서결혼한것이아니라생활의안정을보장해줄‘파트너’를구해서결혼했다는것이다.유학생활도함께하는등나혜석과염상섭간의오랜친분을고려할때,악의적인표현이고,판단이다.특히‘추도’의글이라는점을감안하면더욱그렇다.염상섭말처럼나혜석은타산적이고현실적이었을까?결론적으로말하자면나혜석은타산이라거나현실이라는용어와는거리가먼사람이었다.바보스러울정도로계산에약했고,바보스러울정도로정직한사람이었다.주변의시선을의식해서상황을조율할줄도몰랐다.그래서많은부분그녀는사람들에게자기중심적으로비추어졌고,실제로그랬다.타산적이고,현실적이지못한성격은그녀삶을파국으로몰고가는한요인이되기도했다.
나혜석은언니와여동생이자산가와결혼한것과달리가난한문과유학생,그것도아내가있는최승구와절절한연애를한다.이행동부터비현실적이라면비현실적이었다.또한김우영과결혼하면서요절한연인최승구의묘지로신혼여행을가서,비석을세워달라고부탁한행위는지나치게비현실적이어서그로테스크할정도이다.그러나한발물러서서보면,이그로테스크한행위의기저를이루고있는것역시정직성과계산을할줄모르는비현실성이다.결혼을앞두고상대남성에게예전애인의일을그대로밝히고싶은바보같은여자가세상어디에있을까만,나혜석은그렇게한것이다.결혼상대인김우영에게최승구와의관계를정직하게밝히는한편,이미죽은사람이기는하지만최승구에게도사랑의언약을지키지못한것에대해서양해를구하고싶었던것이다.자기중심적으로보이는그녀행동의이면에는대부분이처럼정직성과계산을모르는비현실적성격이있었다.
나혜석은이제더는조선최초의여류화가도,존경받는신여성도,부영사사모님도아니었다.불륜으로이혼당한중년여자에불과했다.그녀를지지해줬던많은사람들이그녀의불행을호기심가득한눈으로그녀가무너지는때를기다리고있었지만,그런시선따위개의치않고재기를위한준비에들어간다.그림에인생을걸어보라는오빠의조언에따라일본의제국미술전람회에그림을출품해보기로결정하고는출품준비를위해금강산으로간다.그림을팔고,물건을저당잡혀서경비를마련한다.다시한번삶과맞서보기로결심한것이다.놀라운생명력이었다.
이십대초반,인생의연인최승구의죽음후덮친정신의광란속에서도살아남은나혜석이었다.그러나이번은그때와는달랐다.그때는자신을뒷받침해줄부모가있었고,부모의경제력이있었고,무엇보다젊었다.그래서재기의여지가있었지만이번에는돈도,정신적지지도,젊음도,그무엇도없었다.여기에불륜녀라는낙인까지찍혀있었다.치명상을입은것이었다.그녀는일단금강산에머물면서수십점의그림을그리고,그그림을가지고오빠경석이있는봉천으로가서경석의도움을받아전시회를개최한다.강하고명민했지만,언제나누군가의보호아래있으면서누군가의말로자신의내면을대신해왔다.일본유학시절에는일본신여자들의가르침이,조선에돌아와서는오빠의가르침과남편의말이그녀삶을채웠다.이제는아무도,아무것도없었다.오로지혼자서결정내리고,내면에서들려오는자신의말을듣고혼자서삶을헤쳐나가야했다.
전시회를마친후,부산을통해도쿄로가서제국미술전람회에그림을출품한다.출품작은파리체류중에그려둔것으로그녀인생의가장아름다운시절이그그림속에있었다.그그림으로조선인으로서는힘든,일본제국최고의미술전,제국미술전람회에입선하여언론의찬사를한몸에받는다.많은사람들이그녀의몰락을예측하고있었지만나혜석은포기하지않고일어선것이었다.그녀를비춰주던모든후광-수원나주나씨집안의딸,일본유학을다녀온엘리트신여성,청년지식인들의구애를받던히로인,엘리트외교관의아내-이사라져버린대신그녀자신이빛이되고있었다.태어나서처음으로자신이그처럼갈구하던인간으로서의‘자립’을이루어낸것이었다.
무엇이이처럼강인한생명력을그녀내면에서끌어낸것일까.여성에게가혹한조선의보수적분위기속에서새로운시대를꿈꿨던여자들대다수가무너져갔다.김명순은정신의병을앓으며일본과조선을오가고있었고,김일엽은불교로기울어가고있었다.그렇지만나혜석은버텼다.파리로,일본으로가고싶다고말은했지만일본으로도망가지도,종교로도망가려고하지도않았다.수전증으로손이흔들렸지만쉬지않고그림을그리고글을쓰면서강하게버텼다.그녀를그처럼버티게한힘이무엇인지정확하게규정할수는없다.네아이를향한모성일수도있고,정신의기반이되어온수원나주나씨집안의후손으로서의자긍심,어쩌면이둘을합한것일수도있다.
외부로부터엄청난힘이그녀를강타했지만그녀의마음과정신은버텨내고있었다.제국미술전람회입선을계기로전업작가로서살아갈수있을것이라는자신감을가진다.실제로그림도팔리기시작했다.놀라운정신력이며생명력이었다.그러나나혜석이버티면버틸수록그녀를밀어내려는조선사회의힘은더욱더강해졌다.게다가운도따라주지를않았다.제국미술전람회를겨냥하여다시금강산으로들어가서그림을그리지만화재로그림대부분을잃는다.그래도포기하지않고이번에는경성의종로에여성미술학원인‘여자미술학사’를연다.자신이다닌일본최초의여자전문미술교육기관,여자사립미술학교를본딴것이었다.규모면에서비교도되지않는작은사설미술학원에불과했지만여성의자립이라는나혜석의오랜신념과이상이거기에는들어있었다.유화,수채화,연필화등서양미술전영역을가르쳤으며,학원개원기사가신문에나기도한다.
조선사회가그녀를내몰면내몰수록나혜석은엇나간아이처럼역방향으로질주했다.그녀는최린을상대로소송을제기한다.죄목은혼인빙자간음죄.자신이조선사회로결코돌아갈수없도록만들어버리고있었다.나혜석은사랑을저버린최린에게지쳤고,자신의불행을관망한것도모자라재미거리로삼은친구들에게지쳤고,자신을사회밖으로몰아내기에급급한조선사회에지친것이었다.그녀에게조선은이미살수없는사나운곳이되어있었다.떠날돈을마련하고조선사회와의통로도완벽하게막아버리는데있어서최린을상대로한고소야말로유일의,최적의방안이었다.최린의정치적중요성을고려해서일본측에서언론보도를막은탓에생각한만큼최린을웃음거리로만들지못했지만돈은받아낸다.받은돈이목표한대로파리로가서생활하기에충분하지는않았지만파리도착이후의일은그다음에생각하면되는것이었다.파리가멀면일본이라도건너가면되는일이었다.그러나나혜석은조선에남는다.소통의통로를자기스스로닫아버린그곳에남는다.아이들이그곳에있었기때문이다.
나혜석은이혼하고도한동안동래시댁에아이들과머물면서살뜰하게아이들을보살폈다.첫딸나열이여덟살,아들선이일곱살,셋째진이여섯살,그리고귀국후낳은건이두살이었다.아이들을앉혀놓고책을읽어주는가하면,노래를가르쳐주고,맛있는것을해먹이면서함께시간을보냈다.그것이아이들과함께보낸마지막시간이었다.집을나온이후부터는김우영이아이들과의만남을금지해서만날수가없었다.막내건은너무어려서어머니에대한기억이없다고해도,나머지세아이들은어머니의냄새와목소리,어머니의자리를기억하고있었다.아이들은어른들이말하는윤리,도덕과는먼세계속에있어서인지‘어머니’는언제나‘어머니’일뿐이었다.
게다가나혜석이나쁜어머니도아니었다.최린과의사건을제외하면,최선을다해아이들을보살핀따뜻한어머니였다.만주안동현시절,외교관남편의직업상수없이들이닥친손님들,그림그리기,글쓰기를하느라쉴틈이없었지만아이들만은빈틈없이보살핀나혜석이었다.최린을상대로한재판과정에서첫관계의장소와날짜까지모두밝혀지는수모를당하면서까지거액의위자료를받아내고도파리나일본으로가지않고아이들이있는조선에남은나혜석이었다.
아이들이있고그림을그릴수있으면얼마든지재기할수있다고믿고있었다.그러나운(運)은나혜석을따라주지않았다.힘들게그린수십점의그림이갑작스러운화재로불에타버린것은참을수있었다.어렵게문을연여자미술학사에학생들이모이지않는것도참을수있었다.그림은다시그리면되는것이고,여자미술학사는굳이운영하지않아도상관없는것이었다.거듭되는고난속에서도나혜석은버티고또버텨냈다.그렇게온힘을다해서버티고있던그무렵둘째선이가페렴으로급사해버린다.겨우열두살이었다.원래가몸이약한데다가항상엄마를찾던아이였다.위태로운삶속에서그녀를지탱시켜주고있던두개의축,그림과아이들중,하나의축이무너져내린것이었다.
이혼소동으로부터사년이지난때였다.사년동안쉴새없이퍼부어진조선사회의비난과조소,그녀를조선에서몰아내려한조선사회의잔혹한의도속에서도쉼없이그림을그리면서,아이들이있는그땅에서포기하지않고자신의삶을살아갔다.한순간도삶을포기하지도않았고포기하려고하지도않았다.빛이보이지않는삶속에서매순간순간그녀는온힘을다해서자신의봄을만들어내며그렇게삶을이어갔다.가능한한지나간과거를돌아보지도,그렇다고오지도않은미래를앞서보려하지도않았다.과거에사로잡혀후회할시간도,미래를돌아보며두려워할시간도없었기때문이다.과거를돌아보려고하면다시자신을곧추세워서오로지현재를살았다.그러나아들선의죽음이그녀에게후회스러운과거를돌아보게하고공포스러운미래를보도록하였다.심연과같은어둠과마주한것이었다.힘들게버티고있던나혜석의몸과정신이한번에허물어지는것은당연한일이었다.
오랜만에보내온딸나열의편지에대한답장에서도“분하고절통하다”는말만내뱉을정도로과거가그녀의마음을뒤덮어버리고있었다.아들의죽음이후나혜석은급격하게무너져갔다.생활비를벌기위해그동안써둔글몇편을정리해서잡지에발표하기도하지만이역시얼마쓰지를못하고그만둔다.일본유학을갔던딸나열이돌아오고,나열과연락을취하기도하지만이미무너져내리기시작한나혜석의정신을붙잡기에는역부족이었다.일제가망하고해방이되고새로운시대가시작되지만나혜석에게는아무런의미가없었다.아들선이가죽은그순간그녀의삶은과거시간속에묶여정지해버린것이었다.이후,나혜석은정신이상과마비증상으로양로원에입원,퇴원을거듭하다가1948년서울시립남부병원무연고자병실에서삶을마감한다.52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