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채만식의 민족문학, 이 책의 주제는 아주 명확하다. ‘채만식은 왜 기억해야만 하는가?’이다. 채만식에 대한 지역사회의 관심이나 애정은 갈수록 희박해져 가는 느낌이다. 더욱이 최근 들어서는 ‘친일’이라는 프레임에 갇혀 채만식에 관한 논의나 관련 프로그램들은 지지부진의 차원을 넘어 옴나위조차도 못하는 형국의 양상마저 보이고 있다. 이러한 현실을 속수무책으로 수수방관만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의 집필을 시작한 결정적인 계기였다. 그 생각에 추동되어 쓰게 된 이 책을 통해 채만식 문학의 정당한 이해와 평가를 가로막고 있는 친일문학⸱친일문인이라는 프레임의 각도와 강도를 조정 또는 완화해보고자 했다. 채만식과 그의 문학이 과도하게 짊어지고 있는 친일의 족쇄와 굴레, 그리고 오명과 낙인이 그의 문학에 대한 정당하고도 온당한 평가와 이해를 가로막는 결정적인 장애로 작용하고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채만식의 대일 협력 행위는 당시의 객관적인 정세나 시대적인 조건, 그리고 그가 처한 실존적인 정황이나 처지 등 여러 가지 복합적인 변수나 상황들을 고려하거나 존중할 때 일방적으로 매도하거나 비난 또는 단죄할 만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연장선에서 그의 문학 전체나 본질을 ‘친일문학’으로 그리고 그의 작가적 정체성을 ‘친일문인’으로 규정하는 일 또한 온당한 처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채만식의 대일 협력 행위는 고노에 2차 내각의 신체제기(1940-1945)에 이루어진다. 일제 말의 ‘암흑기’로 통칭되는 이 시기는 만주사변(1931)에서 시작되는 15년 전쟁의 전선이 중일전쟁(1937)과 태평양 전쟁(1941)으로 확장되면서 결국 일제가 패망으로 끝나는 때이다. 전⸱후방이 따로 없는 총동원 체제에 대비한 ‘고도국방 체제’의 완성을 시정의 목표로 내세운 이 시기는 내선일체와 황국신민화 운동을 축으로 작동하던 천황제 파시즘의 광기가 식민지 조선의 모든 영역에 일상의 공기처럼 음울하게 떠돌던 때였다. 징병과 징용, 창씨개명이나 국어 상용 등 식민지 조선의 모든 인적⸱물적 자원을 전쟁 수행의 수탈 도구로 영토화하던 그 시기에 시국 협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분야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문학장(literary field)이라고 비켜갈 리 만무했다.
‘조선문인협회’는 1943년 시국 협력에의 지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명칭의 ‘조선문인보국회’로 개칭⸱개편된다. 문장과 인문평론은 강제 폐간(1941)된 후 ‘국책문학’에게만 활자화의 은전을 허용하는 최재서 주간의 국민문학으로 통합된다. 검열 상황 또한 훨씬 더 엄혹한 수준으로 강화된다. 구체적인 창작 지침을 강제한 후 이를 어길 경우 다양한 수준의 제제와 처벌이 뒤따랐다. 설상가상, 당시 그가 처한 실존적인 정황이나 처지는 채만식을 막다른 골목이나 벼랑 끝으로 몰아갔다. 20대 이후 평생 그를 집요하게 따라다니면서 괴롭혔던 악몽과도 같은 극심한 가난과 병고가 화불단행으로 중첩되면서 채만식은 허무와 우울의 독한 기운에 감염된다. 그로 인한 육신의 고통과 마음의 지옥은 생의 에너지를 탕갈하면서 채만식은 타나토스 충동의 유혹에 시달렸다. 게다가 ‘액년’으로 규정하고 있는 1939년에는 ‘개성독서회 사건’으로 경찰서 유치장에서 한 달 보름여 동안 구류를 경험한다. 이러한 시대적⸱개인적인 차원의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채만식은 ‘소극적 보신주의’ 차원에서의 현실적인 타협을 통해 대일 협력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지금 생각하면 통탄스러울 정도로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아닐 수 없다. 하지만 당시 채만식은 역사와 민족의 대의 못지않게 가족의 생계 부양 책임자로서의 도리를 감당해야만 하는 가장의 역할을 외면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채만식의 대일 협력은 일신의 영달이나 출세같은 세속적이고 개인적인 욕망과는 거리가 멀었다. 매사에 깔끔하고 바자윈 성정에다 냉소의 기운이 아주 강했던 기질로 미루어 짐작건대 그는 최소한 그럴 만한 애바리나 부라퀴는 못되었다. 당연히 투철한 신념에 의한 내적 논리를 가지고서 그 길에 들어서지도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채만식은 42명의 ‘친일문인’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민족의 죄인」이라는 작품을 통해 참회의 고백을 남기고 있다. 그 참회의 진정성에 대해서는 인색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다시 한 번 반복하지만, 일제 말기 야만의 신체제기에 채만식이 처한 실존적인 처지나 정황을 두루 그리고 충분히 고려하거나 존중하지 않고 그 결과만을 가지고서 채만식을 일방적으로 매도하거나 비난 또는 단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일제 말 천황제 파시즘의 광기와 야만의 시대를 감당하느라 힘겹고도 버거운 고투를 강요당해야만 했던 채만식 개인에게는 물론 그 당시 역사에게도 예의는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세 편의 논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심과 핵심은 당연히 「채만식은 왜 기억해야만 하는가」라는 논문이다. 분량 자체부터 다른 두 편의 논문에 비해 비교라는 말 자체가 무색할 정도로 압도적으로 길며 내용 또한 이 책의 주제와 직접 맞닿아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다른 두 편의 논문이 기존에 발표했던 글을 약간 수정⸱보완한 후 재수록한 데 비해 이 논문은 아예 새로 작성한 글이다. 그렇지만 다른 두 편의 논문 또한 이 책의 문제의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뿐만 아니라 「채만식은 왜 기억해야만 하는가」라는 논문의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다. 두 편의 논문을 같이 수록한 이유이다. 「채만식의 탁류에 나타난 군산의 지정학」은 군산 거주 조선인과 일본인 거주 공간의 극명한 대비를 통해 일제 식민주의 이데올로기의 허구와 폭력성을 당시의 현장의 시선을 통해 생생하게 증명하고 있는 글이다. 「채만식 문학의 대일 협력과 반성의 윤리」라는 논문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민족의 죄인」의 발표 경위와 동기 그리고 그 의미에 대해 분석하고 있는 글이다.
채만식의 대일 협력 행위는 당시의 객관적인 정세나 시대적인 조건, 그리고 그가 처한 실존적인 정황이나 처지 등 여러 가지 복합적인 변수나 상황들을 고려하거나 존중할 때 일방적으로 매도하거나 비난 또는 단죄할 만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연장선에서 그의 문학 전체나 본질을 ‘친일문학’으로 그리고 그의 작가적 정체성을 ‘친일문인’으로 규정하는 일 또한 온당한 처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채만식의 대일 협력 행위는 고노에 2차 내각의 신체제기(1940-1945)에 이루어진다. 일제 말의 ‘암흑기’로 통칭되는 이 시기는 만주사변(1931)에서 시작되는 15년 전쟁의 전선이 중일전쟁(1937)과 태평양 전쟁(1941)으로 확장되면서 결국 일제가 패망으로 끝나는 때이다. 전⸱후방이 따로 없는 총동원 체제에 대비한 ‘고도국방 체제’의 완성을 시정의 목표로 내세운 이 시기는 내선일체와 황국신민화 운동을 축으로 작동하던 천황제 파시즘의 광기가 식민지 조선의 모든 영역에 일상의 공기처럼 음울하게 떠돌던 때였다. 징병과 징용, 창씨개명이나 국어 상용 등 식민지 조선의 모든 인적⸱물적 자원을 전쟁 수행의 수탈 도구로 영토화하던 그 시기에 시국 협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분야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문학장(literary field)이라고 비켜갈 리 만무했다.
‘조선문인협회’는 1943년 시국 협력에의 지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명칭의 ‘조선문인보국회’로 개칭⸱개편된다. 문장과 인문평론은 강제 폐간(1941)된 후 ‘국책문학’에게만 활자화의 은전을 허용하는 최재서 주간의 국민문학으로 통합된다. 검열 상황 또한 훨씬 더 엄혹한 수준으로 강화된다. 구체적인 창작 지침을 강제한 후 이를 어길 경우 다양한 수준의 제제와 처벌이 뒤따랐다. 설상가상, 당시 그가 처한 실존적인 정황이나 처지는 채만식을 막다른 골목이나 벼랑 끝으로 몰아갔다. 20대 이후 평생 그를 집요하게 따라다니면서 괴롭혔던 악몽과도 같은 극심한 가난과 병고가 화불단행으로 중첩되면서 채만식은 허무와 우울의 독한 기운에 감염된다. 그로 인한 육신의 고통과 마음의 지옥은 생의 에너지를 탕갈하면서 채만식은 타나토스 충동의 유혹에 시달렸다. 게다가 ‘액년’으로 규정하고 있는 1939년에는 ‘개성독서회 사건’으로 경찰서 유치장에서 한 달 보름여 동안 구류를 경험한다. 이러한 시대적⸱개인적인 차원의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채만식은 ‘소극적 보신주의’ 차원에서의 현실적인 타협을 통해 대일 협력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지금 생각하면 통탄스러울 정도로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아닐 수 없다. 하지만 당시 채만식은 역사와 민족의 대의 못지않게 가족의 생계 부양 책임자로서의 도리를 감당해야만 하는 가장의 역할을 외면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채만식의 대일 협력은 일신의 영달이나 출세같은 세속적이고 개인적인 욕망과는 거리가 멀었다. 매사에 깔끔하고 바자윈 성정에다 냉소의 기운이 아주 강했던 기질로 미루어 짐작건대 그는 최소한 그럴 만한 애바리나 부라퀴는 못되었다. 당연히 투철한 신념에 의한 내적 논리를 가지고서 그 길에 들어서지도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채만식은 42명의 ‘친일문인’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민족의 죄인」이라는 작품을 통해 참회의 고백을 남기고 있다. 그 참회의 진정성에 대해서는 인색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다시 한 번 반복하지만, 일제 말기 야만의 신체제기에 채만식이 처한 실존적인 처지나 정황을 두루 그리고 충분히 고려하거나 존중하지 않고 그 결과만을 가지고서 채만식을 일방적으로 매도하거나 비난 또는 단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일제 말 천황제 파시즘의 광기와 야만의 시대를 감당하느라 힘겹고도 버거운 고투를 강요당해야만 했던 채만식 개인에게는 물론 그 당시 역사에게도 예의는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세 편의 논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심과 핵심은 당연히 「채만식은 왜 기억해야만 하는가」라는 논문이다. 분량 자체부터 다른 두 편의 논문에 비해 비교라는 말 자체가 무색할 정도로 압도적으로 길며 내용 또한 이 책의 주제와 직접 맞닿아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다른 두 편의 논문이 기존에 발표했던 글을 약간 수정⸱보완한 후 재수록한 데 비해 이 논문은 아예 새로 작성한 글이다. 그렇지만 다른 두 편의 논문 또한 이 책의 문제의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뿐만 아니라 「채만식은 왜 기억해야만 하는가」라는 논문의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다. 두 편의 논문을 같이 수록한 이유이다. 「채만식의 탁류에 나타난 군산의 지정학」은 군산 거주 조선인과 일본인 거주 공간의 극명한 대비를 통해 일제 식민주의 이데올로기의 허구와 폭력성을 당시의 현장의 시선을 통해 생생하게 증명하고 있는 글이다. 「채만식 문학의 대일 협력과 반성의 윤리」라는 논문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민족의 죄인」의 발표 경위와 동기 그리고 그 의미에 대해 분석하고 있는 글이다.
채만식의 민족문학
$14.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