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바깥을찾아헤매던사람이발견한가장가까운안식처
상실과고독을지나‘이미완전한나’에게돌아가는마음의여정
삶이감당할수없는고통으로가득해졌을때,인간은어디로가야할까.『이미,퀘렌시아』는딸을잃고초로기치매를앓는아내마저요양원에맡긴뒤삶의끝에선연우의이야기에서시작한다.스스로목숨을끊으려했으나살아남은그는모든것을정리하고지리산자락의고택‘청연재’로떠난다.“본래청정하니스스로그러한집”이라는뜻을지닌청연재에서연우는현묘와현덕,그리고저마다의상처와질문을품고찾아오는사람들을만난다.이소설은한인간이극적인사건을통해단번에구원받는이야기가아니다.밥을먹고,콩을까고,나물을다듬고,타인의이야기를들으며삶과자신을바라보는방식이서서히달라지는과정을따라간다.그느린변화끝에서연우는안식처란찾아가야할특정한장소가아니라,처음부터자기안에존재했던자리임을깨닫는다.
상실을지우지않고다시살아가는법
연우의고통은단순한우울이나막연한공허에서비롯되지않는다.가난과폭력속에서자란어린시절,성공을향해자신을몰아붙였던시간,딸별이의죽음,아내를향한원망과죄책감이겹겹이쌓여있다.특히별이가탄유모차가언덕아래로굴러가던순간과그모습을멍하니바라보던아내의모습은연우를과거에붙들어둔다.그는아내를미워하면서도그녀의묵주를버리지못하고,딸을놓아주어야한다는사실을알면서도기억속에서끊임없이아이를찾아헤맨다.이처럼작품은상실을쉽게극복하거나아름답게승화시키지않는다.고통은실제로아프며,그것을환영이나생각이라고설명한다고해서곧바로사라지지않는다는연우의저항을충분히보여준다.
청연재의현묘역시연우에게성급한위로나정답을건네지않는다.그는용서하라고강요하지않고,감정을통제하거나억누르라고도말하지않는다.분노가올라오면분노하고,슬픔이오면울되,그감정위에또다른이야기를쌓아영원한성을만들지말라고한다.이러한태도는작품이말하는치유의핵심이다.치유란고통스러운기억을삭제하거나,상처받기이전의상태로돌아가는일이아니다.이미지나간사건을현재의나와동일시하지않고,떠오르는감정이머물렀다가사라지는과정을바라보는일이다.연우는현묘의밥상과현덕의춤,순돌이와고양이,바람과햇살속에서자신이여전히먹고웃고숨쉬는사람임을조금씩회복한다.거창한깨달음보다따뜻한보리빵한조각과된장죽한그릇이먼저그의몸을살린다.『이미,퀘렌시아』는바로이구체적인일상의온도를통해,삶은이해하거나정복하는것이아니라다시참여하는것임을보여준다.
‘나’를내려놓을때비로소드러나는세계
이작품은상실을다룬치유소설인동시에‘나는누구인가’라는질문을끈질기게탐구하는철학소설이다.청연재를찾아오는사람들의고민은열등감,용서,선과악,고독,믿음,자유의지처럼서로달라보이지만,결국모든질문은‘나’라는고정된실체가존재한다는믿음으로모인다.사람들은자신의생각과감정,기억을곧자신이라고여기고그것을지키기위해타인과세계를나눈다.옳음이생기면그름이생기고,우월함을세우면열등함이나타나며,용서하는나와용서받아야할타인이분리된다.현묘는이러한분별이고통의뿌리라고말한다.
작품은불교의무아와연기,인드라망,현존의개념을중심에놓으면서도특정종교의교리를일방적으로설파하지않는다.기독교와동양철학,영적체험과현대적사유를넘나들며서로다른언어가가리키는공통의자리를탐색한다.모든존재가인드라망의보석처럼서로를비추고있다면,홀로떨어진‘나’는존재할수없다.몸과생각,감정은끊임없이변하지만그것이나타나고사라지는사실을알아차리는자리는언제나그대로다.연우가찾아헤매던진정한자아는설명하거나붙잡을수있는또하나의대상이아니라,이미보고듣고느끼고있는‘이것’에가깝다.
그러나소설은깨달음을현실도피나초월적능력으로미화하지않는다.깨달은사람도화가나면화를내고,슬프면울며,몸이아프면통증을느낀다.달라지는것은삶의파도가아니라파도와자신을동일시하는방식이다.현덕의춤은이를가장생생하게보여주는장면이다.그는세상의평가와정해진형식에서벗어나몸이움직이는대로춤춘다.작품의마지막‘춤판’은고통이완전히끝난사람들의축제가아니라,기쁨과슬픔,상실과만남을모두삶의움직임으로받아들이는존재들의춤이다.삶을통제하려는마음이느슨해질때인간은비로소세계와함께흔들릴수있다.
‘퀘렌시아’는투우장에서상처입은소가공격을멈추고숨을고르는안전한장소를뜻한다.연우와표량은오랫동안그곳을외부에서찾으려한다.청연재와현묘,깨달음과공부가자신을고통에서구해줄피난처가되기를바란다.그러나작품이끝내건네는답은제목속‘이미’에있다.우리는퀘렌시아에도착해야하는존재가아니라,이미그자리에서삶의파도를바라보고있는존재다.고통은일어났다가가라앉고,생각과감정도잠시나타났다사라지지만,그것을품는바다는훼손되지않는다.『이미,퀘렌시아』는아픈사람에게고통이허상이라고쉽게단정하지않는다.대신그고통이삶의전부는아니며,상처입은채로도숨을고르고다시춤출수있다고말한다.결국이작품은잃어버린평화를되찾는이야기가아니다.단한번도사라진적없던평화를뒤늦게알아보는이야기다.
책속에서
차로몇분더들어가자,낮은산을끼고대나무밭이병풍처럼둘러싸인푸른기와집이나타났다.가까이다가서자,처마밑풍경이바람에흔들리며울렸고,그소리는고요를한겹더깊게만들었다.입구의나무푯말에는이렇게적혀있었다.
청연재(靑然齋),본래청정하니스스로그러한집.
---p.9
현실은생각이만든모양이라고하던현덕의말이떠올랐다.그렇다면그모양에서벗어난다는것은현실을부정하는일이아니라현실을전혀다른방식으로보는일일까.
---p.20
“보석은제빛을품고있어도마주한빛이있어야드러나잖아요.우리가세상에온이유,서로를비추기위해서아닐까요.”
---p.128
타인은있는그대로보이지않는다.
내마음만큼만보일뿐이다.
나는단한번도남과싸운적이없다.
……늘나를상대로싸우고있었다.
---p.237
“투우장한쪽,정확히정해진장소는아니지만소가안전하다고느끼며본능적으로자신의피난처로삼는곳을‘퀘렌시아’라고부른대요.거친숨을몰아쉬며싸우다가지친소는그곳으로가서기운을되찾기위해휴식을하는거죠.힘들고지쳤을때쉬어가는곳.칼이등에박혀피가흘러도그곳에서는안심하는거죠.거기있으면소는두려워하거나공격하지않아도되는거예요.”
---p.327
연우는눈을감았다.사랑하는사람들은떠났지만이고요는떠난적이없었다.아무리잃고무너져도이자리는단한번도움직이지않았다.와도온바가없고가도간바가없었다.투우장한가운데치열하게피흘리던모든기억조차아지랑이처럼흩어지고있었다.
---p.3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