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파시: 흑산의 바람을 타고 한 生을 길어 올리다

다시, 파시: 흑산의 바람을 타고 한 生을 길어 올리다

$18.19
저자

유재봉

저자 : 유재봉
서발턴의 심경을 다룬 「최서해와 강경애의 소설에 나타난 탈식민성 연구」 논문이 있다. 『다시, 파시』는 그 시선으로 복원해 낸 어머니의 생애 기록이다.
e-mail: skec1282@naver.com

목차

추천사: 평생 단 한 편
들어가며

동백떡
흑산을 말하다
뭍에 오르다
열일곱의 굴레
무거운 발걸음
여자의 일생
이 섬에서 저 섬으로
홀로서기
본향의 꼬리표
글로 갚는 보은
천근 같은 눈꺼풀
동백꽃 피더니
툭 꺾이다
수레바퀴 아래로
명랑한 긍정, 선善
아래로 더 아래로
돈벌이
심연의 밑바닥
탈출, 쓸쓸한 완수
원망의 활시위를 당기며
시간, 남편의 유산
귀향, 되찾은 시간

나오며
발문

출판사 서평

“꺼져 있던 파시의 불빛을 다시 밝히는 일
한 여인의 생과 한 섬의 시간을 되살려 낸 기억의 가족사”

『다시, 파시』는 한 어머니의 생애를 따라가며, 그 삶이 딛고 선 흑산도의 시간과 가족사의 결을 함께 복원해 내는 기록이다. 저자는 ‘어머니’라는 보편적 이름 뒤에 가려진 한 사람, 이행숙이라는 개별자의 생을 되살리고자 한다. 흑산의 바람과 동백숲, 뭍을 향한 갈망, 가난과 결혼, 노동과 상처, 그리고 끝내 삶을 밀고 나간 명랑한 긍정이 이 책의 중심을 이룬다. 이 작품은 단순한 사모곡이 아니다. 한 여인의 삶을 통해 한 시대의 여성, 가족, 지역, 그리고 잊힌 생의 존엄을 다시 묻는 문학적 회고록이다.

“한 사람을 말하기 위해 한 섬을 불러내는 방식”
『다시, 파시』의 가장 큰 미덕은 어머니의 삶을 개인사로만 가두지 않는 데 있다. 저자는 어머니를 말하기 위해 먼저 흑산도를 불러낸다. 흑산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어머니의 기질과 감각, 공포와 상상력, 생존 방식이 처음 빚어진 원형의 장소다. 동백숲, 당집, 각시할매, 갯일, 무속, 성당, 연락선, 〈흑산도 아가씨〉 같은 요소들은 한 여인의 유년을 둘러싼 풍경이면서 동시에 섬사람들의 집단적 정서와 삶의 조건을 보여 주는 장치가 된다. 특히 각시할매의 목소리를 빌린 대목들은 사실과 기억 사이에 환상적 숨결을 불어넣는다. 이로써 책은 단순한 회고를 넘어, 사라진 시간을 다시 말하게 하는 서사적 힘을 얻는다. 어머니의 유년은 가난하고 고단하지만, 그 안에는 동백숲에서 배운 감수성, 장난기, 말하지 못한 마음, 현실을 견디게 한 상상의 힘이 살아 있다. 저자는 바로 그 지점에서 ‘불쌍한 어머니’가 아니라 ‘한때 숲에 홀리고, 뭍을 꿈꾸고, 자기만의 감각으로 세계를 받아들였던 한 소녀’를 되살려 낸다. 그래서 이 책의 흑산은 고향이자 굴레이고, 상처이자 원천이며, 어머니라는 한 사람을 이해하기 위한 가장 깊은 지도처럼 읽힌다.

“고난의 서사를 넘어, 명랑한 긍정의 인간을 세우다”
이 책은 어머니가 겪은 고생을 촘촘히 따라가지만, 그 고생 자체를 신파적으로 소비하지 않는다. 열일곱의 어린 나이에 뭍으로 나와 수녀원, 봉천동, 양장점, 식당을 거치고, 결혼과 출산, 시집살이와 가난, 남편의 방황, 가족 부양의 무게를 감당하는 과정은 분명 질곡의 연속이다. 그러나 저자는 그 시간을 ‘여자의 일생’이라는 낡은 한마디로 정리하는 대신, 그 안에서 조금씩 자의식을 얻고 현실을 판단하며 자기 방식으로 삶을 꾸려 나간 한 인간의 변화를 포착한다. 특히 아이를 낳은 뒤 어머니가 현실을 인식하고, 배고픔과 모멸 속에서도 가족을 지켜 내며, 나아가 노동과 생활의 현장에서 스스로를 단단히 세워 가는 과정은 이 책의 핵심 정서다. 어머니는 늘 당당한 언어를 가진 사람은 아니었지만, 끝내 무너지지 않는 사람이다. 원망과 상처를 품고도 다시 일하고, 다시 웃고, 다시 살아가는 사람이다. 저자가 반복해서 길어 올리는 ‘명랑한 긍정’은 그래서 가벼운 낙관이 아니라 깊은 생존의 태도에 가깝다. 이 책이 감동적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독자는 한 여인의 고난을 보며 연민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고난을 지나온 인간의 품과 힘, 그리고 그 삶을 뒤늦게라도 제대로 불러 주려는 자식의 애틋한 시선을 함께 만나게 된다.

『다시, 파시』는 꺼져 있던 파시의 불빛을 다시 켜듯, 잊힌 한 생의 시간들을 조심스럽게 건져 올리는 책이다. 어머니의 삶은 흑산의 바다와 숲, 뭍의 가난과 도시의 골목, 가족을 위해 견뎌 낸 수많은 날들과 함께 되살아난다. 이 작품은 사라져 가는 세대의 기억을 붙잡는 동시에, 누구의 삶도 한 줄의 수난기로만 요약될 수 없음을 보여 준다. 결국 이 책이 남기는 울림은 분명하다. 한 사람을 제대로 기억하는 일은 한 시대와 한 땅, 그리고 우리 안의 오래된 슬픔과 생명력을 함께 되살리는 일이라는 것.

책 속에서

어느 순간부터 나는 여기 있으면서 동시에 거기에도 있게 되었다. 불현듯 무의식 사이로 한 장의 슬라이드가 지난다. 흑산성당 언덕에서 내려다본 옥섬 앞바다, 짙은 해무를 뚫고 떨어지는 여러 가닥의 빛줄기, 너울지는 물결 위로 되쏘며 부 서지는 빛의 파편들, 그 안에 갇힌 멸치잡이 배, 몽환적이고 비현실적인 풍경. 내 몸의 한쪽 어딘가 내 어머니의 태胎가 묻힌 좌표에서 신호가 닿는다. 묵직한 유전자의 끈으로 끌어당기는 자장의 힘.
---p.8

배움은 삶의 다른 유형을 열어 주지 못했다. 아니, 애초에 섬에는 다른 유형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여성은 ‘섬 아낙’ 이라는 하나의 유형밖에 선택지가 없었다. 그저 용해될 수밖 에 없었다. 문맹의 외할머니나 중학을 마치고 겨우 자신에게 물음표 하나를 던지려던 어머니나 결국 거기서 거기였다. 밥 하고, 빨래하고, 밭일하고, 갯일하고, 나무하고, 혼인하고, 출산하고 아프고, 병들고, 울고, 죽는…… 여자의 일생. 한 발 더 나아가 바다에 남편 내어 주고 청상과부로 사는 삶.
---p.28

‘나는 뭣이 하고 싶은가이? 지끔 허는 일은 하고 싶은 일은 아닌 것 갓은디. 긍께 하고 싶은 일은… 뭣이냐, 새롭고, 좋 고, 또 칭찬받는 일일 거여. 암만.’
---p.40

“엄마, 칠십이 넘어서도 미용에 욕심을 내면 어째.”
이어진 어머니의 대답에 나는 아무 반박도 할 수 없었다. 백 프로 인정 또 인정이었다.
“그건 평생 잠을 참은 내 눈에 대한 보상이기도 하단다.”
---p.140

그래도 살아 내겠다는 희망만은 놓지 않았다. 나중엔 튀김 도 만들어 팔았다. 1982년, 그해 여름은 오래된 튀김처럼 눅 진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튀김 솥의 기름은 식은 지 오래고, 삼발이 위 야채튀김 세 개가 지친 몸을 누이고 있었다. 파리 한 마리가 천장에 매달린 끈끈이 사이를 요리조리 피해 날았 다. 나는 축 늘어진 튀김 세 개에 신경이 쓰였다. 축 처진 아 버지 같았다.
---p.164

어머니 집에 가져다 놓은 내 논문을 형수가 완독했다는 소식을 듣고 적잖이 놀랐다. 나는 문자를 보냈다.
“그건 책이 아닌데요. 그 많은 걸 다 읽었다고요?”
형수에게서 짧은 답변이 왔다.
“가족이니까요.”
---p.249

바다에 물때가 있자네. 보름마다 바뀌는디야. 사람도 그 물때 따라 가는 거시랑께. 그거시 조화여. 느그덜은 한평생 이 길다 혀도 내 눈으로 치믄 한 달 물때도 안 되는 거시제. 그라고 사람마다 한 번 타기도 허고 두 번 타기도 허는디, 니 는 두 번째 물때가 온 것이여. 그것도 그믐에 들었당께. 그믐 이믄 험헌 물 싹 빠지고 그 알로 내려가 있는 거 아니것냐. 워 메 멱이니 전북이니 널렸어야. 그거시 니가 첫 물에 씨를 뿌 린 거시다. 언넝 담어야. 느그 어매는 거친 파도 속이서 바우 에 몸 부딪침성 땄제만, 니는 걸어 들어가 줍기만 허믄 된당 께. 그려, 인자사 고개를 끄덕이네이.
---p.2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