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최희
소설가
2013년 『한국소설』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2016년 한국소설가협회 ‘신예작가’로 선정되어 『2016 신예작가』에 공저로 참여했다. 2018년 현진건문학상 추천작에 선정, 2024년 아르코문학창작기금 발표지원에 선정되었다. 소설집 『사봉』, 『신월』을 출간했다.
꽃예술 작가
모교 대학 도서관에 근무하면서 꽃꽂이에 입문하여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일본 정통 꽃꽂이 유파 ‘고류’의 ‘송경회’에서 사범 자격증을 취득했다. 한국꽃꽂이협회의 ‘진율화’ 꽃꽂이회에서 사범 자격증을 취득하고 꽃꽂이 강사로 활동했다. 동아대학교 사회교육원 〈꽃예술 최고 지도자 과정〉, 유럽 〈플라워디자인스쿨〉 연수 과정을 수료했다. 현재는 꽃꽂이 강사가 아닌 소설가로 활동하고 있다.
『화도(華道)』는 백제 멸망이라는 역사의 격변 속에서, 꽃꽂이로 사랑과 원한, 수행과 복수를 그려 낸 장편 역사소설이다. 백제 공주와 도공의 아들이라는 신분을 뛰어넘은 인연이 나라의 멸망과 함께 바다를 건너 이어지고, 그 과정에서 이들은 꽃과 기(氣)를 수련의 방편으로 삼아 하나의 ‘도(道)’를 완성해 간다. 그러나 평화롭던 이국의 절은 얽히고설킨 치정과 오래된 원한 앞에서 걷잡을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꽃꽂이 작가이자 소설가인 저자는 일본 꽃꽂이의 뿌리가 중국이 아닌 백제에 있다는 가능성을 소설화했다.
‘도’에 이르기 위해 꽃을 꽂는 사람들!
이 소설이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지점은 소재 자체의 희소성이다. 백제 멸망을 다룬 역사소설은 적지 않지만, 그 멸망의 자리에서 ‘꽃꽂이’라는 생활 예술의 기원을 찾아내려 한 시도는 드물다. 저자는 오랜 시간 실제로 꽃꽂이를 익히며 일본 전통 유파의 ‘삼도(화도·서도·다도)’를 접했고, 그 과정에서 일본 꽃꽂이가 한반도에서 건너갔을 가능성에 주목하게 되었다. 이런 탐구가 선행 연구자들의 자료와 만나면서 한 편의 소설로 벼려졌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백제 의자왕의 서녀 ‘아라 공주’와 가야국 유민 출신 도공의 아들 ‘부도’가 있다. 궁에서 자란 공주와 천한 신분의 도공은 결코 가까워질 수 없는 사이였지만, 고란사에서 함께 화기(花器)를 빚고 꽃을 꽂는 과정에서 서로의 안목과 정성을 알아보며 신분을 넘어선 유대를 쌓는다. 이들은 성광 스님과 일목 스님이 전하는 기(氣)의 가르침에 주목한다. 마음이 어지러우면 탁한 기운이 모이고, 번뇌를 비우면 맑은 기운이 모인다는 이 사상은 꽃꽂이를 단순한 기예가 아닌 정신 수련의 체계로 끌어올린다. 사비성이 함락되자 아라와 부도는 유민들과 함께 왜국으로 망명해 백제사에 자리를 잡고, 그곳에서 소가 씨 집안의 남매 키코와 오메, 그리고 후지와라 히데나리라는 새로운 인물들과 얽히며 이야기는 더 복잡한 국면으로 접어든다.
복수와 음모, 애정과 질투로 뒤엉킨 절
망명지에서 평온하게 흘러가는 듯했던 수련의 나날은 오래가지 않는다. 키코와 오메 남매에게는 오래전부터 품어 온 해묵은 원한이 있고, 속세를 떠나기 위해 절을 찾은 히데나리는 아라를 향한 연정에 사로잡힌다. 사랑과 질투, 그리고 복수심이 뒤엉키면서 백제사를 둘러싼 인물들의 관계는 점점 더 팽팽하게 당겨진다. 과연 이들이 품은 원한은 어느 방향으로 터져 나올 것인가. 꽃과 기를 통해 번뇌를 다스리려 했던 아라와 부도는 끝내 ‘도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인간의 욕망 앞에서 그 수련조차 무력해지고 말 것인가. 소설은 이 질문을 끝까지 쥐고 흔들며 독자를 긴장 속으로 몰아간다. 평생을 수행에 바친 스님들조차 인물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을 막지 못한 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순간들은, 이 소설이 단순한 사극풍 로맨스가 아니라 인간 본성과 업(業)에 대한 깊은 질문을 품고 있음을 짐작게 한다. 결국 『화도』는 멸망한 나라의 유민들이 낯선 땅에서도 지켜 내려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 예술과 정신이 어떻게 역사 속에 남겨지는지를 함께 묻는 작품이다.
화도는 거대한 역사적 사건을 예술 행위로 풀어낸 보기 드문 시도이자, 잊혀 가던 한국 꽃꽂이사의 기원을 소설적 상상력으로 되살린 작품이다. 무엇보다 한 가지 소재를 오랫동안 몸으로 익히고 자료로 파고든 저자의 진정성이 작품 전체에 무게를 더한다. 역사와 허구, 수행과 욕망, 사랑과 원한이 꽃 한 송이 안에서 교차하는 이 소설은 멸망한 나라의 유민들이 남긴 것이 과연 무엇이었는지를 곱씹게 만든다.
책 속에서
P. 11 사위는 흔들림 없이 유적했다. 달빛은 절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공주의 볼에서 하얗게 부서졌다. 미약한 빛이 공주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공주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갸름하고 어여쁜 목선이 보일 듯 말 듯 드러났다.
P. 15 “수행 시 온갖 번뇌에 미혹하면 할수록 망념이 생겨 깨달음에 이르기가 어렵지. 이때는 심(心)이 바르지 못해 나쁜 기가 모이게 되지. 반대로 온갖 망상에서 벗어나면 득도하여 멸도에 이르기가 쉬운데 이때는 심이 깨끗해 유익한 기가 모여든다네.”
P. 31 아무리 꽃꽂이가 미려해도 심도가 느껴지지 않으면 화도라 부르기 어렵사옵니다. 기가 들어가지 않은 작품은 화도가 아니라 그저 꽃장식일 뿐이옵니다. 그러니까 꽃을 꽂을 시에 필연 악을 품지 말아야 할뿐더러, 순결한 마음으로 정신을 집중해야 하옵나이다.
P. 47 내 어머니도 궁녀였다. 우연히 임금의 눈에 들어 하룻밤을 지내고 수태했고 나를 낳자마자 돌아가셨다. 죽기 전까지 단 한 번도 임금은 어머니를 찾지 않았다. 그래도 어머니는 강물에 빠져 죽은 궁녀들보다야 조금 더 나은 삶을 살다 간 것인가.
P. 50 부도는 곤비한 기색이 역력한 아라 공주를 애틋한 심정으로 지켜봤다. 서너 올의 머리카락이 공주의 볼까지 흘러내려 바닷바람에 맥없이 흔들렸다. 그 순간 운명이란 단어가 부도의 뇌리를 때린다.
P. 71 연정은 절대 아니다. 어린 마음에 그저 슬펐다. 이런 세상이 미웠다. 그때부터 증오란 놈이 마음 깊숙이 똬리를 틀고 들어앉기 시작했다. 어머니를 잃은 원한과는 또 다른 무엇이었다. 세상으로부터 버려져 완벽히 혼자가 된 느낌이었다.
P. 85 “마음 약해지지 말고 내 말 똑똑히 들어. 백제사에 후지와라 집안의 자손이 들어왔어. 드디어 원한을 갚을 절호의 기회가 온 거야!”
“뭐라고? 그게 진짜야?”
누이의 말에 오메는 깜짝 놀랐다.
P. 126 - 비가 그치고 하늘은 맑았다. 토굴 내부가 약간 밝아졌다. 그때 난데없이 천장 가장자리에서 독기 품은 비단뱀이 고개를 빳빳이 들고 기어 나왔다. 보드라운 비늘로 덮인 뱀의 피부가 진정 비단결처럼 고와 보였다.
P. 147 - 너는 진정 몰랐느냐. 인간의 마음이란 손에 넣으려고 한다면 이추(泥鰍) 빠져나가듯이 달아날 것이고, 내버려둔다면 회귀하는 연어처럼 돌아온다는 것을. 만물의 순리가 이렇듯 다 인과의 법칙에 따라 운행하는 것이기에 억지로 거스르는 행위는 번민만 쌓을 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걸 까마득히 잊고 있었더란 말인가.
P. 168 - 함박눈은 그들의 형체조차 삼켜 버렸다. 그들은 조심스레 눈길을 걸으며 둔덕을 내려갔다. 눈밭 위로 발자국이 찍히고 이내 사라졌다. 그 어떤 일도 일어날 것 같지 않은 미지의 세계에 들어서는 느낌이었다.
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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