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부산대첩

이야기 부산대첩

$10.11
Description
‘부산시민의 날’인 10월 5일은?
임진년 제해권을 완전히 확정 지은 자랑스러운 역사 ‘부산대첩’ 기념일
이순신 장군은 임진년 연이은 세 번의 승첩(옥포, 당포, 한산)으로 사기가 꺾인 왜군이 남하하기 시작하자 전쟁의 결정적 승기를 잡기 위해 왜군의 본진이 웅크리고 있던 부산포를 폭파하기로 한다. 1592년 10월 5일(음 9월 1일), 이순신은 판옥선 74척과 거북선 2척 등의 연합함대를 이끌고 6~7만 명의 병력과 병선 470여 척이 정박하고 있던 부산포를 공격해 100여 척을 깨뜨리는 통쾌한 승리를 거둬 왜적의 수륙병진 전략을 완전히 파탄시켜 버린 큰 승리(대첩)를 거둔다.

50년 이순신 공부로 장군의 생애와 정신을 전파하고 있는 저자 김종대(전 헌법재판관)는 역사학·군사학계가 오래전 관성대로 정한 ‘부산포해전’이라는 한계 많은 평가 대신 ‘부산대첩’이라고 불러야 마땅함을 보여주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말한다. 저자는 ‘부산대첩의 정사(正史)에 조금의 상상을 덧붙인 것이다’라고 겸손해하지만, 독자는 1592년 부산포에서 벌어진 그날의 전투를 마치 누군가 들려주는 이야기처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부산시는 1980년 이 역사적인 부산대첩을 기념해 10월 5일을 ‘부산시민의 날’로 제정했다.
저자

김종대

경남창녕에서태어나김해에서어린시절을보냈다.그후부산에서중고등학교를마치고서울대에서법학을전공했다.1974년공군법무관을시작으로30여년간부산,경남지역에서법관으로서사회갈등해소와분쟁조정에힘써왔으며,2006년부터2012년까지헌법재판소재판관으로재임했다.
김재판관은충무공정신을약재로복용한다면양극화로분열되고갈등하는이사회가치유될수있으리라믿어이순신학교의설립을꿈꾸는사람이다.나아가이제는작은이순신양성사업이국가에의해서체계적이고전국적으로시행되어야이국가와사회가건강해진다는신념으로‘이순신재단설립및그유지에관한법률’제정에온힘을쏟고있다.

목차

글머리‘이야기부산대첩’을쓰는이유ㆍ4
임진년난중일기-부산포를향해출전ㆍ8

1부결심
한산대첩후의고민ㆍ14
정운을부르다ㆍ20
조방장정걸ㆍ24

2부준비
전라좌·우수군을한곳에모으고ㆍ32
훈련의현장ㆍ36
마지막점검ㆍ40

3부출전
출전의행렬ㆍ46
당포에서경상수군과만나다ㆍ50
대전을앞둔날의흉몽과길몽ㆍ54
마지막작전회의ㆍ60

4부대첩
결전의날ㆍ68
왜군의전략들ㆍ72
왜군본진을향한진군ㆍ76
부산포의대승첩ㆍ78
바다를얻고정운을잃다ㆍ84

5부평가
부산승첩보다큰승첩은없었습니다ㆍ88
사라진승첩포상ㆍ92
소박한자축연ㆍ96
정운장군에대한애도ㆍ100

에필로그훗날의이야기ㆍ104

출판사 서평

이순신장군스스로‘가장큰공’이라평가한싸움,’부산대첩’
“부산대첩이없었다면오늘날우리나라도없었을것!”

임진왜란이터진1592년,이순신함대는옥포·당포·한산·부산의왜적을휩쓴네차례승첩에서10번접전을펼쳐모두크게이겼다.옥포승첩의3회접전(옥포·합포·적진포)에서는적함42척을깼다.아군피해는부상1명.당포승첩의4회접전(사천·당포·당항포·율포)에서는거북선이사천해전에처음으로참여했으며적함72척을깨고이순신이부상을입었다.한산대첩에서는적선79척을깼다.죽은왜적수는9,000여명.왜군장수도수십명죽고마나베사바노조는할복했다.그러나조선수군피해는한산과안골포해전을합쳐도전사19명,전상115명뿐이었다.부산포해전에서조선수군은전선470여척가운데100여척(이순신장군의장계)을격파하는최대전과를올렸다.아군피해는이순신장군이가장아끼는정운장군을비롯하여전사6명,전상25명.그래서이순신장군스스로도장계에서“힘써싸운공로는먼저보다훨씬더합니다”라고평가했다.

....
무릇전후네차례출전하여열번접전을하고모두승첩을이뤘으나,만약장수와군졸들의공로를논한다면이번의부산전투를넘지는못할것입니다.
전번에싸울때에는적선의수가불과70여척이었습니다만이번은큰적의소굴에늘어서서정박하고있는400여척속으로군사의위세를떨치고승기를타고돌진하였습니다.조금도두려워하거나꺾이지않고하루종일분한마음으로공격하여적선100여척을깨뜨려부수고,적들로하여금마음이꺾여가슴이무너지고머리를움츠리고두려워서떨게하였는바,비록머리를베지는못하였으나힘써싸운공로는먼저보다훨씬더합니다.
....

1592년9월당시부산포는완전한적의본거지였다.적선은거의500척,병력은6~7만명.판옥선74척(협선등을합쳐166척)인이순신함대가밀고들어갔다가혹여라도퇴로가막히면아군은전멸이다.상상해보자.적의최고사령부가있는본거지로과감하게쳐들어가마구쳐부수고질서있게돌아가는조선함대를.열세의전력으로삼엄한적의심장부를타격하겠다는담대한발상은이순신장군이아니면불가능하다.

불가능한일을현실로만든전투가바로‘부산대첩’이었으니,이통쾌한승리는왜적의수륙병진전략을파탄시켜임진7년전쟁승리의밑거름이되었다.한마디로‘부산대첩이없었다면오늘날이나라가없었다’고해도과언이아니다.그래서‘부산대첩의성과는재평가해야한다’는것이저자의주장이다.이처럼부산대첩은우리국민누구에게나잘알려져서이를기리고노래해야할것인데유감스럽게도우리는이거룩한역사를부산북항바다에묻어두고있다가최근에와서야수면위로건져올리게되었다.

‘부산대첩’이라는단어의기원은대첩의주인공인이순신스스로가한말에연유되었고,최근에는부산시의회에서제정한「부산대첩기념사업지원조례」에서공문화됨으로써부산대첩은공적으로확인되었다.뜻있는부산시민들에의해2018년‘(사)부산대첩기념사업회’가조직되어열심히부산대첩을홍보하고있으나6년이지나도록괄목할만한성과를이루지못하고있다.

이이야기를바탕으로하여희곡과시나리오가쓰여연극과영화가만들어지고,장대한승리의역사가가곡과오페라로노래되며,동화로어린이들과만나고,소설로세상에널리퍼져나가고,통쾌한승리가그림으로그려지고,시로낭송되고,드라마로방영되어부산대첩의역사가이세상에널리퍼져나갔으면하는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