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인제와서남진인가?”
남진(본명:김남진,본명한자:金南鎭,1945년9월27일~)은대한민국의가수이다.1965년에가수로데뷔한이후로1967년부터1977년까지영화에서주연배우로활동했다.1969년제12회부일영화상에서는신인상을수상하기도했다.전라남도목포출신으로,주요히트한노래로는〈가슴아프게〉,〈님과함께〉,〈너와나〉,〈미워도다시한번〉,〈둥지〉와장윤정과부른〈당신이좋아〉등이있다.
남진은해방둥이로태어나1960년대데뷔해1970년대전성기를맞았다.전라남도목포에서목포일보의발행인이자,제5대국회의원을지낸김문옥의늦둥이겸차남[7]으로태어난남진은부유한환경에서어린시절부터연극,음악에심취했다.남진의집안은전쟁직후인1950년대에집에자가용이있었을정도로목포에서상당히부유한집안이었는데학생때부터닐세다카,폴앵카등의팝송을즐겨불렀다.목포고등학교를졸업할무렵,레스토랑에서팝송을불러밴드마스터에게당시최고인기가수남일해의곡을만들었던작곡가한동훈을소개받고,그로부터자신의음악학원에등록하고연습생생활을할것을제의받는다.이때이미남진은영화배우가되고픈마음에한양대학교연극영화과에진학하면서서울로상경한상태였다.그렇게영화배우의길을꿈꿨던그는가수연습생겸배우지망생생활을시작한다.불과몇개월후인1965년,그는첫음반을레코딩하게된다.데뷔곡은한동훈이작곡한<서울푸레이보이>.스탠더드팝을연상시키는곡이었다.
대한민국가수최초로‘오빠부대’를몰고다니던그는방송통폐합으로상징되는제5공화국시절슬럼프를겪었으나,민주화이후재기에성공해21세기에도전성기못지않은활동을이어가고있다.남진의음악인생이우리나라대중음악사와그대로겹치는셈이다.대한민국국민이라면모르는사람이없는남진이지만,막상그의음악인생을제대로아는사람은드물다.가수남진에대한다큐멘터리영화를제작한다고하자,많은이들이이렇게묻는다.“왜,인제와서남진인가?”
아무리활발하게활동하고있다지만,이미수십년전전성기를지난가수를지금에야다큐멘터리로다룬다니뭔가석연치않은모양이다.이는전국민이모두알고있는남진에게특별히더알아야할게뭐가남아있겠느냐는반문이기도하다.
누구나알고있지만아무도모르는‘가수남진’인생
가수남진의인생은우리대중음악의고전이다.세월이지날수록빛을발한다는점이그렇고,모두가안다고여기지만대부분제대로모른다는점또한그렇다.또한편으로그의인생은식민지와전쟁에지나쳐버린우리대중음악사의자료이다.성장통에아파하는동안차마기록되지못했던중요한역사가그의삶에새겨졌다.그의이야기가전개되는동안우리는한국대중음악사에잊힌페이지를마주할수있다.로커빌리스타일의불멸의히트곡인<마음이고와야지>는그를단순히트로트가수로만국한시키지않고,가요계의독보적인캐릭터로인정받는중요한역할을하게된다.잘생긴얼굴그리고엘비스프레슬리를모방한창법과무대액션에당시소녀팬들은열광하기시작했고,이는그후<그대여변치마오>,<님과함께>같은대표곡으로이어졌다.
하고싶은것만하기에도짧은인생이니까!
남진의도전은언제나현재진행형
전성기이후에도남진은현재까지도활발한활동을하고있다.1999년<둥지>에서부터2005년<저리가>,2008년<나야나>를대표적으로볼수있다.이는라이벌나훈아의신비주의콘셉트와대비된다.2008년,나훈아가모종의사건으로활동을중단하면서라이벌이던두사람의활동은더큰차이를보인다.남진은2009년에장윤정과함께남녀가사랑을나눌수있는듀엣가요<당신이좋아>를발표하며큰인기를얻기도했다.본업가수로서지방공연은현재까지쉬지않고이어가고있으며,성황리에매진되고있다.
이책은단순히‘가수남진’이라는한사람의인생사라기보다한국대중음악100년사를조명하면서남진이태풍의눈처럼대중음악을이끌고성장시켜가는과정을담았다.최근나훈아은퇴선언에남진이“저는힘날때까지…”라고말한것처럼영원한대한민국원조오빠남진은영원한오빠로불릴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