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꾼 에세이

이야기꾼 에세이

$18.00
Description
“수천 년 전부터 직조되어온 삶의 그물망이
도처에서 사라지고 있다”

서사 예술의 종언을 통해 인간 삶의 근원을 묻는 우리 시대의 고전
“이 책은 인간이 더 이상 서로의 경험을 나누지 못하게 된 시대를 그린
벤야민의 가장 비극적인 글이다” _한나 아렌드

오늘날 철학, 문학, 미학, 정치학 등의 학계뿐 아니라 작가, 감독, 음악인 등 예술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치는 사상가 발터 벤야민의 『이야기꾼 에세이』가 현대문학에서 출간되었다. 기술, 산업화, 전쟁, 현대의 변화 속에서 이야기를 전할 힘이 사라져가는 과정을 날카롭게 진단한 벤야민의 대표작 「이야기꾼」을 비롯해 「요한 페터 헤벨」 「소설의 위기」 「리스본 지진」 「경험지와 부족함」 등 벤야민의 초기 단상부터 중기, 후기의 비평을 망라하는 열세 편의 글을 담았다. 특히 이번 판본은 벤야민의 원전을 새로운 번역으로 소개하는 동시에, ‘경험­전통­구술’이라는 세 축을 따라 ‘이야기꾼과 서사 예술의 종언’이라는 사유의 축이 어떻게 형성되고 진화했는지 벤야민 사유의 궤적을 복원한다. 그 사유를 보다 심층으로 읽어내기 위해 헤로도토스, 몽테뉴, 헤벨, 블로흐, 발레리, 루카치 등 여러 사상가와 작가들의 글을 함께 수록함으로써 벤야민의 논의가 서사와 경험, 역사와 문학을 둘러싼 장구한 지성사의 흐름 속에서 더 깊게 이해될 수 있도록 했다.
이 책에 실린 각각의 글은 길이도 종류도 밀도도 제각기 다르지만 ‘이야기 기술의 종언’이라는 문제의식으로 귀결된다. “이야기가 사라지는 자리에 정보가 채워지고, 경험이 단절된 자리에 고립된 개인만 남았다”라는 벤야만의 진단처럼, 그는 이야기 기술의 소멸을 단순한 문화 현상이 아니라 삶의 의미를 엮어내는 인간적 능력의 상실로 보았다. 그렇다고 이 책이 단지 이야기에 대한 벤야민의 ‘조사弔詞’인 것만은 아니다. 그는 노동, 기술, 매체가 급속히 변하는 시대에 이야기 기술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가를 물으며, 조언과 경험이 다시 움트는 말의 ‘발아력’, 정보의 즉시성과 검증의 강박을 비켜 가는 이야기의 ‘여백’, ‘경험의 알을 낳는 권태’의 미학을 제안한다. 즉 “수천 년 전부터 직조되어온 삶의 그물망이 도처에서 올이 풀리고 있다”는 자각 속에서도 이야기가 다시 발아할 수 있는 조건을 탐색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데이터와 정보의 과잉 속에서 ‘서사’ ‘스토리텔링’ ‘콘텐츠’ ‘내러티브’ 등으로 치장되는 온갖 수사가 공허한 유행어로 전락하지 않게 하는 최소한의 비평적 실천이다. 『이야기꾼 에세이』가 지금 우리 시대를 설명하는 데 여전히 유효한, 이야기와 경험의 힘을 되돌아보게 하는 고전이 아닐 수 없는 대목이다.

“경험의 물성과 무관한 서사, 재료의 물성과 무관한 작품이 ‘이미지’가 되어 마치 화폐처럼 유통되기 시작했다. 지금 되돌아보면 엄청난 선견지명이다. ……스토리텔링이니 내러티브니 하는 용어들은 업체 브랜딩의 어휘와 정치 프로파간다의 어휘에서 쟁점을 흐리는 핵심어가 되어왔고, 정보의 범람과 알고리즘의 확산으로 인해 이야기를 잃어버린 것이 우리 현대인의 삶이라는 깨달음에 도달하는 길은 더욱 요원해졌다. ……그런 의미에서 벤야민이 쓰는 글은 그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마리 모니에가 바느질한 수예와도 어딘가 비슷한 것 같다. 에세이스트 벤야민이 레스코프라는 독특한 이야기 장인의 후예로 느껴지는 것은 이렇게 시대를 거스르는 방식 때문이다.” -「서문」에서

『이야기꾼 에세이』, 10여 년에 걸친
치열한 사유의 결정체이자 다양한 시도의 콜라주

「이야기꾼」은 지금까지 가장 많이 인용되는 벤야민의 글 가운데 하나로, 그의 “비평가적 역량이 지진계처럼 예민하게 드러난 글”이다.「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과 「보들레르의 몇 가지 모티브에 관하여」와 나란히 그의 저작의 중심부에 위치한다. 「이야기꾼」은 벤야민의 베를린 학창 시절에 시작되어 1920년대 후반기에 추진력을 얻은 긴 사유의 결과물로, 그가 1926년부터 1936년까지 발표한 에세이, 신문기사, 서평, 단편 등등의 여러 글에서 시험한 개념, 심상, 논의들이 이 글로 최종 수렴된다. 『이야기꾼 에세이』는 「이야기꾼」과 이러한 글들을 함께 엮어냄으로써 벤야민의 생각들이 어떻게 발전했는지를 더 분명히 드러내고자 했다. 「요한 페터 헤벨」(1926)에서는 “역사가는 세계사를 다루는 반면, 연감 편찬자는 세상만사를 다룬다”라며 이미 이야기꾼과 정보제공자의 구별을 예고하고, 뒤이어 라디오 강연집인 「리스본 지진」(1931)에서는 이야기꾼의 목소리로 재앙을 전하며 한 도시의 재난을 세계사의 파장으로 확장하고, 경험·전통·서사의 연결을 라디오라는 매체 속에서 실험한다. 「손수건」(1932)에서는 실제 이야기꾼의 구술 형식을 구현하며 벤야민의 서사적 실험을 절정으로 끌어올린다. 이어서 「경험지와 부족함」(1933)에서는 기술 문명과 전쟁이 인간의 경험과 전통을 어떻게 붕괴했는지 분석하며, 벤야민 사유의 핵심 주제인 ‘경험의 상실’과 ‘새로운 시작’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한다. 이처럼 서로 다른 형식의 텍스트들이 서로 반향하며, 종국에는 「이야기꾼」(1936)에서 모든 조각이 하나의 콜라주로 결합한다. 이렇듯 이 책은 ‘이야기 기술의 종언’을 이야기하기 위해 벤야민 자신이 거쳐야 했던 이야기의 과정이 고스란히 전해지는데, 이를 통해 각각의 글이 그의 더 큰 주제들과 어떻게 공명하며, 벤야민의 글쓰기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그 역동을 일별할 수 있다는 것도 이 책의 중요한 의의 중 하나다.

“이야기란 삶이라는 소재에 조언을 짜 넣은 것,
그것이 바로 서사 진리이자 삶의 지혜다”

벤야민의 「이야기꾼」은 ‘이야기꾼의 쇠퇴’에 대한 애도에서 시작한다. “우리에게 이야기꾼이란 이미 먼 존재이자 점점 멀어지고 있는 존재다. ……우리는 거의 매일 그 사실을 확인한다. 우리의 안전자산 중에 가장 안전했던 자산, 곧 경험을 공유하는 능력이라는 자산을 누가 훔쳐 가기라도 한 것 같다.” 이야기꾼의 부재가 남긴 침묵은 정보의 언어가 대신 채워버렸다. 사건의 끝없는 흐름, 그 무수한 설명들 속에서 정보는 과잉 상태다. “매일 아침 우리는 세계 곳곳의 뉴스 기사를 접한다. 하지만 독특한 사건을 알게 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사건들은 전부 다 처음부터 끝까지 설명으로 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벤야민은 이야기가 설명되지 않을 때 오히려 활짝 피어난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헤로도토스의 『역사』에서 한 가지 일화를 찾아낸다. “이집트의 왕 프사메니투는 페르시아의 왕 캄비세스에게 패배하여 포로가 되었다. 역시 포로가 된 딸이 여종 차림으로 물을 길어가는 모습을 눈앞에서 보았을 때, 그는 무표정하게 땅만 내려다볼 뿐이었다. 아들이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모습을 보았을 때도 그는 여전히 무표정했다. 하지만 곁에 두었던 하인 하나가 포로로 끌려가는 것을 본 그는 자기 손으로 자기 머리를 세게 내리치면서 통곡하기 시작했다.” 왜 그랬을까. 벤야민에 따르면, 헤로도토스는 그 이유를 설명해주지 않는다. 이 역사적 에피소드를 두고 여전히 많은 해석이 오가는데, 시간이 흐르면 무가치해지는 정보와는 달리 이 이야기가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발아력을 간직할 수 있었던 이유는 설명이 없다는 바로 그 지점에 있다. 그것은 “공기가 통하지 않는 피라미드의 밀폐 공간에서 지금까지 수천 년간 발아력을 잃지 않고 있는 밀알”과 같다.
이야기는 ‘신비로움’을 품고 있다. 그것은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으며, 동시에 여러 의미를 지닌다. 전해질 때마다 세부가 달라지고, 새롭게 다시 쓰인다. 이처럼 이야기의 모태가 되는 경험은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는 경험이다. 이 경험이야말로 모든 이야기꾼이 이야기를 길어 올렸던 이야기의 샘으로, 세대로부터 세대로 전수되는 집단적 경험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야기는 일종의 ‘지혜의 서사’이며, 이야기꾼은 ‘삶의 공동체적 경험의 매개자’이자 삶을 영위하는 방식과 태도에 관한 ‘조언자’이다.
벤야민은 경험을 전달하는 방식을 두고 “수공업적 전달 형식” “권태와 은밀하게 연결된 행위” “검증되지 않더라도 그것에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권위”로 표현했는데, 이러한 맥락에서 이야기 기술은 ‘장인적 솜씨’에 닿아 있는 것이다. 비록 산업화·전쟁·매체 변화가 공동체와 이야기 기술의 생태를 잠식하고 있지만, 머리와 손이 다시 만나는 자리에서 그 기술은 되살아날 수 있지 않을까.

경험과 지혜의 회로가 끊긴 시대,
우리는 어떤 형식과 태도로 다시 이야기를 할 것인가

오늘날 우리는 벤야민이 예견한 세계 한가운데 있다. 우리는 이미 책이나 드라마를 보는 대신 유튜브에서 요약본을 찾아보고(그것도 배속으로), 얼굴을 보거나 목소를 들으며 대화를 나누는 대신 문자로만 메시지만을 주고받는 데 익숙하다. 경험을 나누고 공동체의 기억을 전승하는 힘이 이러한 소비적·도구적 맥락에서 사라지고, 공동체의 지혜와 경험을 매개하던 이야기꾼은 가속화된 사회에서 도파민 노예로 전락해버렸다.
이야기는 입에서 입으로 생명력을 이어간다고 했다. 벤야민에 따르면 그러한 이야기가 움트기 위해서는 ‘권태’, 즉 자본의 시간 밖에서 생겨나는 멈춤의 시간이 필요하다. “권태라는 꿈꾸는 새가 경험이라는 알을 품듯이” 가만한 시간의 샘에서 이야기는 솟아나는 것이다. 삶의 여유도 없고, 지루함을 견디는 힘도 잃은 우리에게는 요원한 일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벤야민은, 마치 환자가 의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치료의 첫 과정이듯이, 이야기에는 치유의 힘이 있다고 강조한다. “병을 이야기의 강물 위로 흘러가게 할 수만 있다면, 병이 그렇게 충분히 긴 강을 따라 하구까지 흘러갈 수만 있다면, 어떤 병이라도 치유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맥락에서 이 책은 오늘날의 독자에게 여전히 살아 있는 물음을 던진다. 우리는 어떻게 다시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가? 이야기는 어떻게 우리의 삶을 구원할 수 있는가? 이 책이 비단 과거의 향수가 아니라 미래의 공동체를 가능하게 할 경험의 새로운 언어를 찾는 요청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저자

발터벤야민

저자:발터벤야민WalterBenjamin
독일출신의유대계철학자,문예학자,미학자,비평가,번역가.1892년7월15일독일베를린에서태어났다.독일프라이부르크대학,베를린대학,뮌헨대학,스위스베른대학에서철학,독일문학사및예술사,심리학을공부하고,1919년6월베른대학에서『독일낭만주의의예술비평개념』으로박사학위를취득한다.1925년교수자격논문『독일비애극의기원』으로학계에진입하는데실패하지만,같은해알게된연인아샤라치스이외에베르톨트브레히트에게서유물론적사유의영향을받으면서비평,번역,방송활동을펼쳐나간다.파시즘의먹구름이드리우기시작한유럽에서스스로를좌파아웃사이더로이해한그가택한길은교조적마르크스주의에거리를두고,유대신학적사유와유물론적사유,신비주의와계몽적사유사이의미묘한긴장을유지하면서아방가르드적실험정신에바탕을둔글쓰기를통해현대의변화된조건속에서지식인의역할에대해성찰하고정치적영향력을행사하는일이었다.1940년,당시뉴욕에서사회연구소를이끌던아도르노와호르크하이머의지원아래미국으로망명하기로결심하고실행에옮기지만,프랑스-스페인국경통과가좌절되자그날밤스스로목숨을끊는다.게오르그짐멜의에세이적글쓰기스타일이엿보이는벤야민은뛰어난산문가였고,모더니티,매체미학,언어철학,역사철학에대한글들을비롯해인문사회과학의다양한모티프들을풍부하게담고있는그의사상은21세기들어서도여전히주목받고있으며,자크데리다,조르조아감벤등현대철학자들에게도많은영향을주었다.주요저서로『독일낭만주의의예술비평개념』『괴테의친화력』『독일비애극의기원』『일방통행로』『사유이미지』『1900년경베를린의유년시절』『모스크바일기』『아케이드프로젝트』(미완성)등이있고,「기술복제시대의예술작품」「이야기꾼」「프란츠카프카」「언어일반과인간의언어에대하여」「번역가의과제」「폭력비판을위하여」「역사의개념에대하여」등의에세이를남겼다.

엮음:새뮤얼타이탄SamuelTitan
브라질을기반으로활동하는편집자이자문학번역가.프랑스,독일,아르헨티나작가들의여러작품을포르투갈어로번역했으며,에리히아우어바흐와클로드레비스트로스의에세이선집을편집했다.현재상파울루대학에서비교문학을가르치고있다.

역자:김정아
에밀리디킨스의시로영문학석사학위를,소설과영화의매체비교연구로비교문학박사학위를받았다.옮긴책으로『폭풍의언덕』『오만과편견』『3기니』『프닌』『버지니아울프라는이름으로』『고독의이야기들』『아카이브취향』『에세이즘』『카프카의마지막소송』『자살폭탄테러』『마음의발걸음』『걷기의인문학』『발터벤야민과아케이드프로젝트』『발터벤야민평전』『역사:끝에서두번째세계』『비폭력의힘』『진실과회복』『고독의이야기들』등이있다.

목차

서문?7

『이야기꾼에세이』
요한페터헤벨?35
소설의위기:되블린의『베를린알렉산더광장』에관하여?48
산딸기오믈렛?62
리스본지진?65
오스카마리아그라프:이야기꾼?77
속담에관하여?83
손수건?85
이야기와치유?94
소설읽기?96
이야기기술?98
벽난로에서:한소설의출간25주년을기념하며?102
경험지와부족함?112
이야기꾼:니콜라이레스코프의작품에대한고찰?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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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모니에의수예폴발레리?194
『소설의이론』중에서게오르크루카치?197
슬픔에대하여미셸드몽테뉴?210
『역사』중에서헤로도토스?219
『보물상자:온가족의친구』중에서요한페터헤벨?223

텍스트출처?234
찾아보기?236

출판사 서평

『이야기꾼에세이』,10여년에걸친
치열한사유의결정체이자다양한시도의콜라주

「이야기꾼」은지금까지가장많이인용되는벤야민의글가운데하나로,그의“비평가적역량이지진계처럼예민하게드러난글”이다.「기술복제시대의예술작품」과「보들레르의몇가지모티브에관하여」와나란히그의저작의중심부에위치한다.「이야기꾼」은벤야민의베를린학창시절에시작되어1920년대후반기에추진력을얻은긴사유의결과물로,그가1926년부터1936년까지발표한에세이,신문기사,서평,단편등등의여러글에서시험한개념,심상,논의들이이글로최종수렴된다.『이야기꾼에세이』는「이야기꾼」과이러한글들을함께엮어냄으로써벤야민의생각들이어떻게발전했는지를더분명히드러내고자했다.「요한페터헤벨」(1926)에서는“역사가는세계사를다루는반면,연감편찬자는세상만사를다룬다”라며이미이야기꾼과정보제공자의구별을예고하고,뒤이어라디오강연집인「리스본지진」(1931)에서는이야기꾼의목소리로재앙을전하며한도시의재난을세계사의파장으로확장하고,경험·전통·서사의연결을라디오라는매체속에서실험한다.「손수건」(1932)에서는실제이야기꾼의구술형식을구현하며벤야민의서사적실험을절정으로끌어올린다.이어서「경험지와부족함」(1933)에서는기술문명과전쟁이인간의경험과전통을어떻게붕괴했는지분석하며,벤야민사유의핵심주제인‘경험의상실’과‘새로운시작’의문제를본격적으로제기한다.이처럼서로다른형식의텍스트들이서로반향하며,종국에는「이야기꾼」(1936)에서모든조각이하나의콜라주로결합한다.이렇듯이책은‘이야기기술의종언’을이야기하기위해벤야민자신이거쳐야했던이야기의과정이고스란히전해지는데,이를통해각각의글이그의더큰주제들과어떻게공명하며,벤야민의글쓰기가어떻게움직이는지그역동을일별할수있다는것도이책의중요한의의중하나다.

“이야기란삶이라는소재에조언을짜넣은것,
그것이바로서사진리이자삶의지혜다”

벤야민의「이야기꾼」은‘이야기꾼의쇠퇴’에대한애도에서시작한다.“우리에게이야기꾼이란이미먼존재이자점점멀어지고있는존재다.……우리는거의매일그사실을확인한다.우리의안전자산중에가장안전했던자산,곧경험을공유하는능력이라는자산을누가훔쳐가기라도한것같다.”이야기꾼의부재가남긴침묵은정보의언어가대신채워버렸다.사건의끝없는흐름,그무수한설명들속에서정보는과잉상태다.“매일아침우리는세계곳곳의뉴스기사를접한다.하지만독특한사건을알게되는경우는별로없다.우리가접할수있는사건들은전부다처음부터끝까지설명으로무장하고있기때문이다.”
벤야민은이야기가설명되지않을때오히려활짝피어난다는점을보여주기위해헤로도토스의『역사』에서한가지일화를찾아낸다.“이집트의왕프사메니투는페르시아의왕캄비세스에게패배하여포로가되었다.역시포로가된딸이여종차림으로물을길어가는모습을눈앞에서보았을때,그는무표정하게땅만내려다볼뿐이었다.아들이처형장으로끌려가는모습을보았을때도그는여전히무표정했다.하지만곁에두었던하인하나가포로로끌려가는것을본그는자기손으로자기머리를세게내리치면서통곡하기시작했다.”왜그랬을까.벤야민에따르면,헤로도토스는그이유를설명해주지않는다.이역사적에피소드를두고여전히많은해석이오가는데,시간이흐르면무가치해지는정보와는달리이이야기가그토록오랜세월동안발아력을간직할수있었던이유는설명이없다는바로그지점에있다.그것은“공기가통하지않는피라미드의밀폐공간에서지금까지수천년간발아력을잃지않고있는밀알”과같다.
이야기는‘신비로움’을품고있다.그것은한방향으로만흐르지않으며,동시에여러의미를지닌다.전해질때마다세부가달라지고,새롭게다시쓰인다.이처럼이야기의모태가되는경험은입에서입으로전달되는경험이다.이경험이야말로모든이야기꾼이이야기를길어올렸던이야기의샘으로,세대로부터세대로전수되는집단적경험이다.이러한점에서이야기는일종의‘지혜의서사’이며,이야기꾼은‘삶의공동체적경험의매개자’이자삶을영위하는방식과태도에관한‘조언자’이다.
벤야민은경험을전달하는방식을두고“수공업적전달형식”“권태와은밀하게연결된행위”“검증되지않더라도그것에정당성을부여해주는권위”로표현했는데,이러한맥락에서이야기기술은‘장인적솜씨’에닿아있는것이다.비록산업화·전쟁·매체변화가공동체와이야기기술의생태를잠식하고있지만,머리와손이다시만나는자리에서그기술은되살아날수있지않을까.

경험과지혜의회로가끊긴시대,
우리는어떤형식과태도로다시이야기를할것인가

오늘날우리는벤야민이예견한세계한가운데있다.우리는이미책이나드라마를보는대신유튜브에서요약본을찾아보고(그것도배속으로),얼굴을보거나목소를들으며대화를나누는대신문자로만메시지만을주고받는데익숙하다.경험을나누고공동체의기억을전승하는힘이이러한소비적·도구적맥락에서사라지고,공동체의지혜와경험을매개하던이야기꾼은가속화된사회에서도파민노예로전락해버렸다.
이야기는입에서입으로생명력을이어간다고했다.벤야민에따르면그러한이야기가움트기위해서는‘권태’,즉자본의시간밖에서생겨나는멈춤의시간이필요하다.“권태라는꿈꾸는새가경험이라는알을품듯이”가만한시간의샘에서이야기는솟아나는것이다.삶의여유도없고,지루함을견디는힘도잃은우리에게는요원한일처럼느껴진다.
하지만벤야민은,마치환자가의사에게들려주는이야기가치료의첫과정이듯이,이야기에는치유의힘이있다고강조한다.“병을이야기의강물위로흘러가게할수만있다면,병이그렇게충분히긴강을따라하구까지흘러갈수만있다면,어떤병이라도치유될수있지않을까?”이런맥락에서이책은오늘날의독자에게여전히살아있는물음을던진다.우리는어떻게다시경험을공유할수있는가?이야기는어떻게우리의삶을구원할수있는가?이책이비단과거의향수가아니라미래의공동체를가능하게할경험의새로운언어를찾는요청인이유가여기에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