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밤의 폭풍은 감추어 두겠습니다

간밤의 폭풍은 감추어 두겠습니다

$16.80
Description
이 책의 제목에서 가장 주목하게 되는 것은 “감추다”라는 동사이다.
“감춘다”는 것은 단순한 은폐가 아니라, 삶이 주는 고통과 회오리를 스스로 견디어 내기 위한 행위다. 시인은 일상의 가장 작은 결에도 세계의 진실을 새겨 넣는다. 정능소의 시에서 “감추어진 것”은 단순한 비밀이 아니라, 인간이 살아내는 슬픔과 사랑, 상처와 기억의 또 다른 얼굴이다. 감춤을 통해서만 비로소 드러나는 진실, 그것이 이 시집이 독자에게 전하는 시적 울림이다.
종이책의 자취마저 희미해지는 시대에, 정능소의 시는 묻는다. 격랑의 끝에 무엇이 남아 있는가. 우리는 무엇으로 남을 것인가. 그 물음은 독자를 삶의 가장 내밀한 층위로 이끌고, 언어로 도달할 수 있는 진실의 한 귀퉁이를 보여준다.
저자

정능소

출간작으로『간밤의폭풍은감추어두겠습니다』등이있다.

목차

시집을내면서

고요한밤거룩한밤

새벽/겨울나무/구름집/우물이야기
재/하느님의눈/발찌/새와아이/꽃상여
빨간차/흘러서/응달/가을정변(政變)
별사이에두다/봄눈/고요한밤거룩한밤
여우비/샐비어/쪽지편지/절대신공
대숲바람/썩은이/하찮은사랑/중절모쓴가을
자작나무/달무리/잔혹동화/밤눈
흔들리는둥지/나방/사월/장구치는여인
콩새/장미한다발/조등(弔燈)/부러진말뚝
이사를하고싶소/불멸의사랑/지저깨비
오이꽃/그/툰드라/달래꽃


남의달덩이

달걀한판/오래된병/꽃병/겨울냄새
매구/황혼이혼/눈발자국/줄기
평상천하/하이에나/잎새/물고기
감자가싹이나서/보푸라기/마개/지렁이의꿈
생선칼/콩죽/달밝은밤/해후
노각/개울가에앉아/보쌈집에서
굵은소금/쥐불놀이/카멜레온의눈/들창
살파먹히기/불여우/엉겅퀴/미운달
문/똥막대기/쇠똥구리의초상/자반
남의달덩이/매나니/복숭아의품격
입동/새살/바람의언어

매화가지는까닭은

변명의조각/찬탈의날/바람의껍질
휘파람새/무심천/매화가지는까닭은
폭풍이지난후/말똥가리/잎새바람
샛강의반란/괭이갈매기/생선구이집
봄바람에/오래된강/뿔/장마
양귀비/소슬바람인그대/금간기둥
늙은풍경/매듭/희망이란알/몽환의달
벚꽃아래서/나는보았네/바위에앉아
내일/설마가일어설때/풍창파벽의날
보리타작/고목/노을비치는창
여린날/여름고개/턴/어름사니
소금기둥/11월중순쯤/걸신/숙살지기
봄/돈


창백한말

피흘리는꿈/노거수/미로
왜바람부는날/손가락/공작새/비석
등불을들고/늪/껍데기/구린내
쓸쓸함의정의/싹/빈병/불꺼진창
무서운미소/섬세한바람/달콤한봄
달항아리/유성/녹두꽃/습작의하소연
나비발톱/가난한겨울/무명천
무한속의당신/굼벵이/비눗방울/광야로
거머리/영산홍/고추먹고맴맴/망각초
현(絃)/불의뼈/파리/기억의덫
창백한말/적셔지다/방구리

[발문]소슬바람,그대

출판사 서평

소슬바람,그대


지난밤,한바탕폭풍이다녀갔다.세찬바람잦아들고,귀를찢는울음소리도멈춘후에야,비로소보이는것들이있다.무너진자리에서만오롯이쓸수있는문장이있다.
〈간밤의폭풍은감추어두겠습니다〉는폭풍이후에비로소시작하는시집이다.정능소의시는폭풍그자체가아닌,그것이휩쓸고간풍경의뒷면을오래들여다본다.

시인에게생은신비와비정함이공존하는공간이다.“한줄기실바람에도목련은부서지고”(무명천),“살아숨쉬는풀잎사귀하나에도강이깊고,불길이흐”(달항아리)른다.“우연이란이빨사이로요리조리잘도피해”왔으나,“한치오차없이떨어지는기요틴의칼날”(부러진말뚝)을맨몸으로마주하는곳이다.

시인은생의낙차를고스란히견뎌낸자리에남은것들,허물어지고무너지고부서진것들의목소리에주목한다.실금간채가까스로버티는이들을향해몸을돌린다.시인은고통을바로보되,결코고통에매몰되지않는다.‘산다는일은슬픔을느낄일이많’음을깨닫는과정이지만,한편으로‘사람마음에는슬픔을무디게받아들이도록/한겹깔판이있다는것’을역설한다.

폭풍이휘몰아치는밤에그대,세상없이
곤히자더군요

나뭇가지가부러지고지붕은들썩이며고양이울음이폭풍속에서메아리쳐도

꿈속고요함을즐기듯미동이없었습니다

어둠속으로모든것이빨려들어빙빙도는소용돌이기둥을보았습니다

밤하늘가득혼돈의신(神)이핏발선눈으로구리종울리는소리로울부짖으니

잡신들두려움으로벌벌떨어도
고른숨을쉬던그대여,

심장이쿵쿵뛰어도그대는아무일없는듯평온하게아침을맞더군요

간밤의폭풍은감추어두겠습니다

〈폭풍이지난후〉

폭풍은지나갔고,흔적만남았다.시인은헤집어드러내는대신,감춤을선택했다.폭풍을온전히품은자만이보일수있는지긋한배려다.말하지않고도말해지는것들이있음을,잊힌듯하지만결코사라지지않은것들이있음을아는까닭이다.

시를쓴다는것은결국자신을,자신의세계를써내려가는일일테다.시를읽는일또한그러하다.어떤고통도함부로위로하지않고,슬픔을회칠하여치장하지않는정능소의한세계를통해독자는역설적으로알게될것이다.애써감추었던격랑의시간이결코혼자만의것이아님을,누군가의시가당신을위해,그밤을함께견뎠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