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허기

관계의 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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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정능소의 시는 언제나 균열과 결핍의 자리를 응시한다. 허물어짐이 예정된 벽과, 금 간 뼈와, 곧 무서리에 덮일 꽃 한 송이까지- 그는 사라져가는 것들의 얼굴을 끝내 놓치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의 시편들 속에는 관계의 단절과 상실, 불안과 고통이 반복되지만, 그 언어의 밑바닥에는 끝내 삶을 향한 고요한 애정이 깔려 있다.
이 시집은 결국, 상처와 허무가 가득한 자리에서도 시가 어떻게 다시 피어날 수 있는지를 증언한다. 정능소의 시 세계는 그렇게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그 속에서 언어의 존엄과 생의 울림을 끝내 지켜낸다.
저자

정능소

출간작으로『간밤의폭풍은감추어두겠습니다』등이있다.

목차

시인의말


꿈을꾸다

구름의자/여름에내리는눈/동고비/꿈을꾸다
무생채/살아난이미지/겨울해변/심봉사의비애
별총총한밤에/겨울국화/박제된화양연화
집들이초대장/싸리울타리/가을부고장
꿈꾸는자/촛불,타오르다/개울물소리
풍경,1970/동숙이/돈벌레/터
새해/가출/신의바퀴/단주
종소리/황반변성/객동(客冬)맞이/바랜사진
그겨울의악취/별아,내가슴에/목침의기억
헌것/난간에나홀로/대못/목련이오는길
한송이의전령/관계의허기/흐린날의풍경/홍운탁월(烘雲托月)

배냇저고리

들녘바람/사소한날/난파선/가을새
배냇저고리/이상한나라앨리스/알
벼랑과벼랑사이/건어물가게/개복숭아
홀애비나무/행장/올빼미/빗소리궤적
명자야,명자야/섬뜩한칼날/쭉정이끼리
낙과/묵은번데기/길몽꾸는밤/애옥살이
칡넝쿨/낭패란골목에서/병어/해국
정거장/소돔의서막/그림자의뼈
마른내/가시숲/칼날위에서/웅덩이속악마
깊은못/여행의정설/삭풍/방아깨비
된여울/잔인한계절/소금쟁이/머리를판사내


기억이란무덤

물넘치던날/풀바람/깨진종소리/황소
생각하는나무/맥장꾼/마음속의세상/헛간에서
묵은이빨/별의눈초리/까마귀울음/소박한소망
흩날리는불티/자전거도둑/향/소한
손돌이바람/귀신탈/배꼽의때/그해여름
깃발/오일장개암나무/백발의날에/일그러진얼굴
별빛흐르는밤/아귀입/썩고삭은것/아기단풍
흠뻑젖은날/기품이란가면/촉/마른벼락
기억이란무덤/고비사막/비늘
달랭이진주목걸이/모닥불꺼진후/두려움이란손님
12월달력/벼랑을건너서


홀아비바람꽃

강의노래/바람의기억/까마귀부리/동창회
디오게네스의변론/군병들의노래/바퀴빠진기차
고통의끝/비정한달/시작과끝/섣달,긴긴밤에
숨/불놀이/모락모락/슬픈바다
잿빛흐린날/중환자실에서/모래나신상
얼룩/똥파리의꿈/물메기/폭풍속에서
홀아비바람꽃/둑/갈대밭에서/장마
난쟁이느릅나무/예번즉란/살모사
이끼낀우물/묵화/바위어른/꽃무늬이불
오래된식탁/당나무/종합병원에서/빗소리
샹그릴라/겨울모기/이징가미

[발문]벼랑과벼랑사이

출판사 서평

벼랑과벼랑사이

오래된것들에는서늘한어둠이배어있다.대개끝에가까운것부터차례로닳아가기에.무릎꿇기직전의늙은노새정강뼈(〈둑〉)처럼,아무리금간곳을덧칠해보아도끝내허물어지고말오랜벽(〈시작과호사〉)처럼.내일쯤무서리뽀얗게뒤집어쓸구절초한뭉치(〈잔인한계절〉)처럼.

〈관계의허기〉가보여주는정능소의세계는이처럼허물어짐이예비된곳이며,비정함그리고허망함을도처에서발견하는잿빛공간이다.‘모든것들이바래지는흐릿한날’쓰인그의시안에서죽음과삶,환희와슬픔,아름다움과추함의경계또한무너져내린다.

생채기로가득한생을이어가면서도,시인의시선은결코가시에찔리는아픔과핏물이배어든상처에만머물러있지않는다.아니,오히려그의결기는천길벼랑앞에서더욱빛난다.

중심을잡자,
내가흔들리는게아니라땅이비틀리는중이니까

벼랑과벼랑사이
아득해도

절묘한줄타기로쓰러지지않으리

〈황반변성〉

‘내가흔들리는게아니라땅이비틀리는중’이라는문장은일종의선언이다.모든것이허물어지는와중에도,더는견디지못할듯한순간에도,그는한발더내딛기를선택한다.철길이끊어진곳까지죽어라달려야하는기차처럼,그는끊긴길위에서생을이어쓸수밖에없는시인의천명을기꺼이감수한다.

정능소의시를읽는순간에도,여전히,우리는생이라는비정한바퀴를굴려야만한다.사람과사람사이,그관계는또얼마나허망한가.말들은홑겹벽처럼너무도쉽게부서져내리고,떠도는마음은제때수신되지않는다.

하지만그의시는이메마른세상에서끝내살아남을것임을,안다.우리가살아,아직신발이필요한지상에머물러있는한은.허물어지는순간에도누군가는끝내말을건네야하는한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