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러진 달 (달의 공전에 관한 고찰 | 이태형 시집)

이지러진 달 (달의 공전에 관한 고찰 | 이태형 시집)

$9.00
Description
비애(悲哀)의 비의(秘義),
그 펄럭이는 남루(襤褸)의 미학

주룩주룩 비가 와요
대책도 없이 비가 오네요

(중략)
세상의 모든 길들
흥건히 빗물에 잠기어

아무런,
대책도 없네요

젖은 바짓가랑이
그 슬픔 그대로

〈홍수〉 중에서

전작 〈펨브로크 가는 길〉에서 방랑의 시학을 노래하던 시인은 어느새 차갑고 딱딱한 아스팔트 도로로 돌아와 있다. “세상의 모든 길들”은 “흥건히 빗물에 잠”긴 지 오래인데, 그는 대책도 없이 빗속을 제 몫의 슬픔을 지고 걸어가야만 한다.
그가 발 디디고 선 오늘은 비바람의 혹독함과는 또 다른 비애로 다가온다. “그리운 것들 모두 뭍에다 남겨두고” 그는 그저 걷는다. “어질어질 아지랑이 따라서 꿈속인 듯” 걸어간다.

숨조차 쉬기 싫은 날
눈물조차 말라버린 날

바닷가 자그만
조약돌 하나

천 계단을 내려가고
만 계단을 내려가서

너는 얼마나 깊으냐
너는 얼마나 막막하냐

그대 가슴에
두 눈 감고 풍덩

〈바다와 조약돌〉 중에서

때로 삶이란 얼마나 막막한 것인가. 바람에도 어스름에도 기댈 수 없는 나날. 어제의 “꽃시절”은 끝내 저물고, “알지 못할 전언”만 남긴 채 시간은 속절없이 흐른다. 흐른다는 것은 지나감을, 지나감은 다시 상실을 내포하고 있다. 세월의 빠른 유속 앞에서 가슴속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자주, 얼마나 세게 어금니를 깨물어야만 했던가.

펄럭이는 남루(襤褸)는
나의 지조(志操)

참새 무리는
하늘을 날고

추수를 마친 농부는
집으로 돌아가고

무망(無望)한 미소는
나의 표지(標識)

〈허수아비〉 중에서

그러나 시인은 결코 겨운 슬픔에만 젖어 있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남루를 지조로, 무망을 표지로 삼는다. 누추함과 상처, 곤고함 모두 제 삶의 일부로 끌어안는다.

조등(弔燈) 그늘 아래
망자(亡者)들이 느릿느릿
갈까마귀 울음 우는 계곡을 건너는 밤

충혈된 두 눈 껌뻑이며
나누어 마시는 소주 한 잔에
저마다 가슴속 부싯돌이 켜진다

돌아다보니
삶이란 환한 꽃밭이구나

〈회귀(回歸)〉 중에서

어느 순간, 삶은 환한 어딘가로 우리를 데려간다. 이 시집은 바로 그 순간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는 기록이다. 남루하고 쓸쓸한 세상임에도, 역설적으로 삶의 비의는 가장 낮고 어두운 자리에서 피어난다. 조등 아래 흔들리는 그림자 같은 생의 순간들 속에서, 시인은 끝내 아름다움을 발견해낸다. 어쩔 도리 없이 아름다운 이 세상을, 시인은 또한 어쩔 도리 없이 사랑한다. 내가 그렇고, 당신이 그렇듯이.

〈자서〉에서 시인은 단어 하나하나를 허투루 쓰지 않았을까 염려한다. 허나 시를 읽다 보면 누구나 알 수 있다. 그가 한 단어, 한 문장 앞에서 얼마나 망설였는지, 서성였는지. 그렇게 시인이 마침내 다다른 풍경이 이 책을 읽는 당신에게도 닿기를, 기도해 본다.
저자

이태형

淸道 출생으로, 고려대 법학과를 졸업했다. 2002년 격월간 〈시사사〉로 등단했다.

목차

自序

제1부 고달픈 너의 몸 아슬한 그곳에서
(초생(初生)달 편)

바이올렛
새벽 산책
숨바꼭질
눈짓
들꽃
산나리꽃
이지러진 달의 비가(悲歌)
박제된 인형
그 옛날
Jenny꽃
항아(姮娥)를 그리며
뻐꾸기 울면
산골 마을
연두(軟豆)
소아마비 그 소녀
돌멩이
낮달
에밀리(Emily)
빈자(貧者)의 별

제2부  길을 잃어버리는 건 내 오래된 습관
(반달 편)
오래된 습관(習慣)
모서리 어둠 아래
쓸쓸한 거리
바하의 French Suites를 들으며
Anima
비의 계절
하조대 풍경
하늬바람
홍수
적멸(寂滅)을 찾아서
별똥별
배낭을 메고
옹달샘
미류(美柳)나무
비(悲)
바다와 조약돌
일출(日出)
망월사(望月寺)

제3부  그렇게 나는, 무언가를 놓아버렸다
(그믐달 편)
그믐
어스름
구봉도 외솔
낙화유수(落花流水)
파도
마지막 잎새
사자암(獅子庵)
겨자씨만 한 햇살
어금니 깨물며
이별
Oro 소녀
초지진에서
회귀(回歸)
쓸쓸한 소묘
보문사에서
봉정암 면벽(面壁)
잎새에 스치는 가을
코스모스
허수아비
아하, 저 별 하나가

[서평] 비애(悲哀)의 비의(秘義), 그 펄럭이는 남루(襤褸)의 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