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봉스님의 천자문 공부 10

동봉스님의 천자문 공부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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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가장 자세한 천자문 해설서
한문에는 언어학, 과학, 역사, 철학, 예술이 함께 있다.
예전에는 아이들의 첫 책이 천자문이었다.
지금도 아이들의 첫 책이 천자문이어야 하겠다.
단지 한문을 배우는 것만으로도
언어의 이치에 대해서, 자연의 이치에 대해서, 관계의 이치에 대해서 배우며
인문학적인, 과학적인, 예술적인 소양이 높아진다.
그래서 현대 교육에서는 한문 교육을 영재교육으로 보기도 한다.

한자에는 글자 자체에도 많은 이야기들이 들어 있는데,
글자 한 자 한 자에서 그러한 이야기들을 들어 보면
왜 한문 교육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인지를 알 수 있다.

우리의 언어는 어느 날 하루 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역사를 통해서 다양한 경험과 노하우들이 축척되어 있는 것이고, 그러한 것을 뜻글자인 한문은 그대로 담고 있다.
동봉 스님의 천자문 해설서는 그러한 자세한 이야기들을 매우 상세하게 담고 있다.
단지 한문에 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철학, 수학, 물리학, 생물학, 언어학, 종교, 예술 및 일상에 대한 이야기까지.
한자 한 글자에 이렇게까지 다양한 이야기들이 들어 있을 수 있는지 놀랍다.
한자를 파자해 보면 더욱 잘 알 수 있다.

한자 한 글자를 놓고
아이들의 안목이 넓어지고, 깊어지니
현대적인 영재교육으로 보아도 전혀 손색이 없는 것이다.

또한 저자가 스님이니 불교에 대한 이야기도 빠지지 않는다.
불교 교육은 현대 과학의 발전과 함께 더욱 그 가치가 높아지고 있다.
그 어떤 것에도 의지하지 않고,
그 어떤 것에도 속박되지 않는
해탈을 지향하는 불교의 컨셉이 합리성을 추구하는 현대 문명과 잘 통하기 때문이다.
40여 년을 수행자로 살아온 동봉 스님의 글 속에는
읽으면서 수행이 되는 매우 특별한 내용적 특징이 있다.

천자문을 보면서 자기 자신을 보는 마음이 생긴다면
스스로의 잠재력을 스스로 이끌어낼 수 있는
그 또한 멋진 공부이며 수행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저자

동봉스님

강원도 횡성에서 태어나 1975년 불문에 귀의하였다. 해인사 승가대학, 중앙승가대, 동국대 불교대학원에서 공부했다.
법명은 정휴正休, 자호는 일원一圓, 법호는 동봉東峰, 아프리칸 이름은 기포kipoo起泡다.
1993~1997년 BBS 불교방송에서 <살며 생각하며>, <자비의 전화> 등 26개월에 걸쳐 생방송을 진행하였다.
동아프리카 탄자니아에서 52개월간 머물며 말라리아 구제 활동을 했으며 한국 불교인으로서는 최초로 아프리카에 ‘학교법인 보리가람스쿨’을 설립하였고 탄자니아 수도 다레살람에 매입한 학교 부지 35에이커와 킬리만자로 산기슭에 개척한 부처님 도량, 사찰 부지 3에이커를 조계종 산하 ‘아름다운 동행’에 기증하여 종단에서 ‘보리가람농업기술대학교’를 세워 2016년 9월 개교, 운영하고 있다.
곤지암 ‘우리절’ 창건주이자 회주로서 책, 법문, 소셜미디어 등을 통해 부처님 법을 전하고 있으며, 특히 <기포의 새벽 편지> 연재는 3,700회가 넘었다. 지금은 광주 우리절 주지로서 수행자로서의 삶을 이어가고 있다.
《사바세계로 온 부처님의 편지》, 《마음을 비우게 자네가 부처야》, 《아미타경을 읽는 즐거움》, 《불교 상식 백과》, 《밀린다왕문경》, 《평상심이 도라 이르지 말라》, 《반야심경 여행》, 《법성게》, 《내비 금강경》, 《음펨바 효과》, 《시간의 발자국이 저리 깊은데》, 《동몽선습 강설》, 《디마케터 스님》등 70여 권의 저서와 역서가 있다.

목차

차 례_


227 주誅참斬적賊도盜. . . . . . . . . . . . . . 9
228 포捕획獲반叛망亡. . . . . . . . . . . . . 22
229 포布사射료僚환丸. . . . . . . . . . . . . 36
230 혜嵇금琴완阮소嘨. . . . . . . . . . . . . 48
231 념恬필筆륜倫지紙. . . . . . . . . . . . . 60
232 균鈞교巧임任조釣. . . . . . . . . . . . . 73
233 석釋분紛이利속俗. . . . . . . . . . . . . 85
234 병竝개皆가佳묘妙. . . . . . . . . . . . . 100
235 모毛시施숙淑자姿. . . . . . . . . . . . . 114
236 공工빈顰연姸소笑. . . . . . . . . . . . . 128
237 년年시矢매每최催. . . . . . . . . . . . . 140
238 희曦휘暉랑朗요耀. . . . . . . . . . . . . 154
239 선璇기璣현懸알斡. . . . . . . . . . . . . 168
240 회晦백魄환環조照. . . . . . . . . . . . . 183
241 지指신薪수修우祐. . . . . . . . . . . . . 198
242 영永수綏길吉소劭. . . . . . . . . . . . . 212
243 구矩보步인引영領. . . . . . . . . . . . . 221
244 부俯앙仰랑廊묘廟. . . . . . . . . . . . . 232
245 속束대帶긍矜장莊. . . . . . . . . . . . . 248
246 배徘회徊첨瞻조眺. . . . . . . . . . . . . 263
247 고孤루陋과寡문聞. . . . . . . . . . . . . 271
248 우愚몽蒙등等초誚. . . . . . . . . . . . . 280
249 위謂어語조助자者. . . . . . . . . . . . . 291
250 언焉재哉호乎야也. . . . . . . . . . . . . 305

출판사 서평

천자문 들어가는 시_

나
우리
아버지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아버지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
끝없는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
거기에는 아으! 하늘이 있었습니다.

나
우리
어머니
우리 어머니
어머니의 어머니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
끝없는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
거기에는 아으! 대지가 있었습니다.

하늘이라는 랄라Lala와
대지라는 룰루Lulu가 만나
파릇파릇靑한 마음忄을 섞었는데
그게 정情이었고
거기서 내가 생기고
우리가 생기고
사랑하는 가족이 생기고
소중한 벗이 생기고
생명이 마구 생겼습니다.

어느 날 벗이 물어왔습니다.
"스님, 질문이 있습니다."
"네, 뭐가 궁금하신지요?"
"네 스님. 십이연기에 대해섭니다."
십이연기十二緣起라면
다른 말로는 십이인연이지요.
두 가지는 같이 쓰이지만
나는 '십이인연'이란 말을 즐겨 씁니다.

내가 되물었습니다.
"십이연기나 십이인연이라면
인터넷 보살에게 물으시면 되는데
어떤 점이 궁금하신지요?"
묻는 자가 답하는 자가 되고
답하는 자가 묻는 자가 되었습니다.
대화對話talk에는
그래서 이른바 갑질이 없습니다.

갑질은 묻는 자는 영원히 묻는 자
답하는 자는 영원히 답하는 자
그 두 상황이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묻는 자는 언제나 묻고
답하는 자는 늘 답하는 자이지요.
보고하는 자는 늘 보고만 하고
보고 받는 자는 늘 받기만 합니다.

그러나 대화에는 그런 갑질이 없습니다.
한자의 대화對話라는 말은
상대가 있어 주고 받는 것입니다.
주고 받음 속에는 주는 행위자와 받는 행위자가
반드시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주는 자가 곧 받는 자고
받는 자가 곧 주는 자입니다.

영어 토크Talk 속에
일방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컨버세이션Conversation에도
컨Con이라는 '함께'의 뜻이 있고
다이얼로그Dialogue에도
다이얼Dial이라는 '둘 이상'이 있습니다.
여기 혼자는 없습니다.

혼자 지껄이는 것은 독백獨白입니다.
곧 혼자獨 중얼거림白이지요.
혼자獨라고 하는 것은 사랑을 키우는 촛불燭에서
촛불火은 사라지고 그 촛불을 밝힐 자리에
애완견犭이 자리한 것입니다.

게다가 중얼거림白이 무엇입니까?
말曰이 수평으로 오가지 못하고
수증기丶처럼 위로만 오르니
모놀로그Monologue는 되겠으나
다이얼로그는 아예 되지 못합니다.

얘기가 옆길로 새고 있습니다.
질문한 벗이 답했습니다.
"글쎄요. 십이연기의 주체가 ㅡ
십이연기의 주체가 무엇일까요?"
"십이연기의 주체요?"
"네. 스님 그게 식識일까요?
무명無明에서 행行이 행에서 식이~
식에서 명색名色이 명색에서~"

십이연기는 곧 생명의 법칙입니다.
생명이 순환하는 법칙이요
한 생명이 그 생명의 윤회 속에서
끊임없이 갈마드는 법칙이고
이 생명이 저 생명으로
저 생명이 또 다른 생명의 세계로
바뀌고, 바뀌고, 바뀌어가는
이종교류의 법칙이기도 합니다.

십이연기에 대해서는
초기불교의 뿌리 줄기根幹이기에
아주 상세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따라서 십이연기를 알면
그는 온전한 불교신자이고
십이연기를 모르면
그는 아직 문밖에서 서성이는 자
곧 문외한門外漢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내게 궁금했던 점들을 물은
그 벗의 생각이 충분히 이해됩니다.
절집에 들어온 지 만 44년을 맞이하지만
나는 아직 십이연기를 모릅니다.
설명이야 얼마든 가능하겠지만
솔직히 내면의 세계에서는
아직은 '모름'이란 불이 깜빡거립니다.

그러나 내가 통째로 이해하는 십이연기는
생명 순환의 법칙 중에
이보다 완벽한 건 없다는 것입니다.
이 십이연기를 제대로 안다면
이 속에 생명의 질긴 역사와
생명과 생명들의 관계성과
생명과 환경의 세계와
환경이란 공간과 시간의 역사가
술술 풀릴 것이라 믿습니다.

분명히 얘기합니다만 십이연기는
식에서 비롯된 게 아니나
식을 떠나서는 설명이 불가능하고
분명 무명에서 비롯되었지만
무명 저 혼자 만들어낸 작품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