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 안중근 : 투철한 국민 의식, 치열한 평화 사상

지식인 안중근 : 투철한 국민 의식, 치열한 평화 사상

$24.00
저자

이태진

저자:이태진
서울대학교학부및대학원사학과에서한국사를전공하고,경북대학교교양학부및사학과를거쳐1977년에서울대학교국사학과에부임하여2009년까지재임하였다.조선시대사회사,정치사를연구하다가1992년부터근대한일관계사,특히일본의‘한국병합’강제의불법성에관한연구에종사하였다.근대사와한일관계에관한저서로『고종시대의재조명』,『동경대생들에게들려준한국사』,『일본의한국병합강제연구:조약강제와저항의역사』,『끝나지않은역사:식민지배청산을위한역사인식』등이있다.한편,『조선왕조실록』에서자연이상현상기록2만5,300여건을뽑아이를분석하여1490년부터1760년까지270년간이이른바소빙기(littleiceage)의재난현상기란것을국제천문학저널에보고하고,『새한국사』에서조선중기의역사를천재지변극복의역사로조명하였다.진단학회회장,역사학회회장,학술단체연합회회장,한일역사가회의한국측운영위원장,국사편찬위원장등을역임하였으며,2006년에대한민국학술원회원으로선출되었다.

목차


화보
감사의말
책머리에

프롤로그나의안중근연구행로
1.‘조약강제의역사’연구에얽힌안중근연구
2.“나는대한의군참모중장으로적장을처단했다”라는외침을읽고
3.안중근,‘의사’인가‘장군’인가?
4.안중근·하얼빈학회창설:의거·순국100주년행사
5.일본에있는1차사료조사와입수―새로운연구의시발
6.‘근대국민’최우등생안중근재발견
7.국가원수에게보내는하직인사유묵3점
8.저격현장촬영필름과공판기록원본문서들의행방

1부영상과신문기사로보는사건의전말

신문기사로보는하얼빈의거현장
1.이토히로부미,왜하얼빈으로갔나?―『하얼빈웨스트니크』
2.안중근이쏜총소리에놀라달아난이토수행원들―『페테르부르크신문』
3.당황하여오보를연발한일본신문―『모지신보』

새로찾은『이토공의최후』가밝힌저격현장의진실
1.새로찾은1919년간행의『이토공의최후』
2.안중근은일본환영객군중속에서나와이토히로부미를쏜것이아니었다

2부일본탐문정보가말하는사건의배후:고종황제와대한의군

안중근:불의·불법을쏜‘대한의군참모중장’
1.안중근연구와인식의현황
2.“나는적진의포로이므로만국공법을적용하라!”
3-1.안중근의항일투쟁경력
3-2.대한의군은국군인가?
4.일본정부의사건진상은폐,축소처리
5.「이토히로부미의죄악15개조」와안중근의시국관
6.안중근최후의정체성발견:어질고약한[仁弱]나라에태어난죄

하얼빈의거,고종황제의지시라는일본측정탐보고
1.새로운자료를찾아
2.블라디보스토크에출현한고종황제의밀사
3.하얼빈의거의기획전말에관한탐문보고와제국익문사요원정재관
4.고종황제고문헐버트의상하이행,덕화은행황제예금인출임무
5.국제변호인단구성과좌절의전말
6.새자료에의한하얼빈의거의새로운정의

3부안중근의국민의식과평화사상

국민탄생의역사와안중근
1.옥중유묵의‘대한국인안중근’표기의의미는?
2.고종시대국민탄생의역사
3.1909년3월15일,태황제고종의주권이양선언
4.「안응칠역사」와안중근의국민의식
5.광무제(고종)에게남긴유묵3점에담긴국가의식

안중근의「동양평화론」재조명:칸트철학의평화사상과만남
1.「동양평화론」에대한문헌적검토:「청취서」를중심으로
2.「동양평화론」연구의두가지새로운시각
3.칸트영구평화론영향설의검증
4.3·1독립만세운동및대한민국건국이념의기초

안중근과량치차오:근대동아시아두개의등불
1.안중근에대한중국지식인·지도자들의칭송
2.량치차오의안중근칭송시2편
3.뤼순재판정방청석의량치차오―‘시치조기요미컬렉션’의사진
4.안중근과량치차오의공유사상세계

4부남겨진과제―저격현장필름과공판기록찾기

하얼빈의거현장촬영필름의행방
1.하얼빈에간이토히로부미를담은활동사진촬영기
2.100년후한국미디어계필름추적의노력과성과
3.이태진의조사현황(2014.10.14.~현재)―두가지필름
4.제3의필름의존재
5.잠정결론:세가지필름의존재

뤼순고등법원의‘안중근공판자료’에관한다가와고조(田川孝三)의보고서
1.안중근공판관계자료정리의필요성
2.다가와고조의「복명서」에보이는‘안중근관계자료’의내용
3.그외만주일원의사료
4.뤼순법원의‘안중근관계자료’전체를찾는날을기다리며

이책의내용이된논문목록

출판사 서평

20여년,이태진교수의안중근연구집성

-안중근이쏜총소리에놀라달아난이토의수행원들
-안중근은일본환영객군중속에서‘뛰쳐나와’이토히로부미를쏜것이아니었다!
-하얼빈의거의배후,고종과그의비밀정보기관제국익문사
-안중근이고종에게남긴유묵3점
-안중근재판정사진에서발견한량치차오
-하얼빈저격현장영상,세가지필름의존재

이태진서울대명예교수(대한민국학술원회원)가20여년간의안중근연구성과를『지식인안중근』에담았다.안중근에관해서,그리고그의하얼빈의거에관해서는다양한논점이존재하는데,저자는이책에서크게네가지로나누어논의를전개해나간다.1부에서는하얼빈의거당시의신문기사와1919년발간된『이토공의최후』를중심으로이사건의세부적인사실관계를다시금조명하고,2부에서는일본의탐문정보자료에의거하여‘하얼빈의거의배후고종황제’에관해다룬다.3부는안중근이남긴「안응칠역사」와「동양평화론」을통해그의국민의식과평화사상에관하여논하면서칸트와량치차오의사상과비교해보고,4부에서는그동안다각도로추적해온‘하얼빈의거현장필름의행방’에관하여,그리고조선사편수회수사관보였던다가와고조의‘복명서’를통해알게된‘안중근관계자료전체’의윤곽에관하여다룬다.

안중근이쏜총소리에놀라달아난이토의수행원들

저자가그동안‘하얼빈의거현장영상필름’의행방을다각도로추적한결과에따르면,하얼빈역행사현장은러시아육군소속영화촬영기사코브초프에의해촬영되었고,이필름의복사본하나가일본의한사업가에게팔려갔다.매입자는최소30분길이는될필름을잘라20초짜리로편집했는데,이토히로부미가쓰러지는장면은잘라내고안중근이러시아헌병에게잡혀가는장면은남겼다.이렇게편집된필름을이토히로부미추도식장에서상영하여많은수익을올렸다고한다.그러나이것과는별개로,일본에서도소수의제한된사람들이이토가쓰러지는장면이나오는필름을볼수있었는데,러시아『페테르부르크신문』1911년10월24일자기사는이에대해다음과같이보도했다.

“(…)필름에는혼란스러운순간에일어난모든것이담겨있다.이필름을소유한행운아는필름을상영하려고했지만,갑자기상영금지조치가내렸다.이필름은다음과같은흥미로운장면을담고있다.희생정신을발휘한V.N.코콥초프는쓰러진후작[이토히로부미]을부축하고있는반면에코콥초프와이토를수행하던인물들은깜짝놀라가까운곳으로피신하고있다.그들은정신이나가도망쳤으며,어느러시아장군은네발로기어가면서겁먹은채주변을둘러보고있다.(…)”

저자는이기사를소개하면서,안중근이쏜여섯발의총소리에이토히로부미를수행하던자들이모두놀라정신없이달아난것이현장의실제모습이었다고말한다.이광경때문에일본은필름의상영을금지시켰고,필름도숨겨버렸다는것이다.이외에,저자는이토히로부미가왜하얼빈에갔는지에대한단서를제공하는『하얼빈웨스트니크』기사,그리고사건발생직후당황하여오보를연발한일본『모지신보』의기사들도소개하는데,이로써우리는‘하얼빈의거현장’그리고그전후의상황들에대한매우구체적인모습에한발다가갈수있다.

안중근은일본환영객군중속에서‘뛰쳐나와’이토히로부미를쏜것이아니었다!

이토히로부미의10주기를맞아하얼빈일본인거류민단과『하얼빈니치니치신문』이나서서진상규명작업을했고,그결과물로『이토공의최후(伊藤公の最期)』(1919)가발간되었다.저자는2014년일본국회도서관헌정자료실에보관돼있는‘시치조기요미컬렉션’에서이책을찾아냈다.저자가특히주목한것은안중근이어느지점에서이토를저격했는지에관한것으로,『이토공의최후』는이에관한세밀한정보를제공한다.

저자는이책에실려있는‘이토공조난현장도’와‘저격현장배치도’등을분석한결과,안중근이환영나온일본거류민단인파속에섞여자신을위장하다가뛰쳐나와이토에접근하여저격한것이아니라,“러시아의장병대열뒤쪽에서,6미터정도거리가되는대열앞쪽에서움직이는이토히로부미를겨냥하여가슴과복부부분에세발을명중시키는고도의숙련사격술로적장을처단하는작전에성공했”음을밝혀내고있다.

일본의탐문보고가말하는‘하얼빈의거’의배후

저자는2008년일본외무성외교사료관이소장한『이토공작만주시찰일건(伊藤公爵滿洲視察一件)별책』11책을입수하여『그들이기록한안중근하얼빈의거』(2021)로출간한바있는데,이자료는하얼빈사건이일어난후부터안중근의사순국이후까지일본정부관계기관사이에오간보고문과훈령을모아놓은것이다.이책의네번째글「하얼빈의거,고종황제의지시라는일본측정탐보고」는저자가이자료에서찾아낸,이사건에대한제국고종황제가개입되어있다는보고및이에근거한일본정부의판단자료에관한내용이다.저자가살펴본주요탐문보고서는,뤼순감옥에수감된안중근을러시아법정으로이관하는것을목표로,만주와연해주등지의한인들에게나서도록독려하기위해블라디보스토크에출현한고종황제의밀사에대한일본측의탐문보고서,그리고1909년12월중순이후‘하얼빈사건’관련예산증액으로한국인밀정을매수투입하여,강화된정보력으로생산된저격모의주체에관한조사보고서등이다.

이를통해저자는,고종황제가1902년에발족시킨비밀정보기관인제국익문사(帝國益聞社)의요원이샌프란시스코와블라디보스토크두공간지점을연결하는역할을했음을새롭게밝히고있다.저자는“일본측이최종적으로사건기획의중심으로판단한정재관이제국익문사소속샌프란시스코지역중심역할을한인물이란점,블라디보스토크에나타난황제의밀사송선춘과조병한또한제국익문사요원으로간주하지않을수없는조건등은이사건의기획자체를새롭게조명해야할필요성을느끼게한다.”고말한다.이기관의해외요원으로보이는이들은모두고종황제정부의관력(官歷)과외국어구사력을가지고있는것이공통점이다.

국제관계에서국가장래의출구를찾던고종황제는이토히로부미제거후에닥칠지모를대결상황에대비하기위해상하이덕화은행(德華銀行)에예치한15만엔을인출하고자했고,이것이황제에게는주권수호를위한최후의대결이나마찬가지였다.이렇듯,‘한성의고종황제측이사건기획의진원지’라는일본측정보망의판단은이사건의본령으로주목할만한새로운정보라고저자는말한다.

안중근이고종에게남긴유묵3점

안중근은옥중에서56점가량의유묵을남겼다.이들대부분에는남기고자하는문구가가운데적혀있고왼쪽가장자리에“庚戌二月(또는三月)大韓國人安重根書”즉“경술2월(또는3월)뤼순옥중에서대한국인안중근이쓰다”라고적혀있다.이밖에,특별히유묵을받는사람이있는경우오른쪽가장자리위쪽에받는사람을표시하고,끝에는“大韓國人安重根謹拜(대한국인안중근이삼가절함)”이라고썼다.이두가지의다른점은“安重根書(안중근이쓰다)”와“安重根謹拜(안중근이삼가절함)”로,글씨를받는특정인의유무에따라달라진다.

그런데저자는유묵3점,즉<위국헌신군인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나라를위해몸을바치는것은군인의본분이다),<임적선진위장의무(臨敵先進爲將義務)>(적을만나먼저나아가는것은장수된자의의무이다),<사군천리망안욕천이표촌성행불부정(思君千里望眼欲穿以表寸誠幸不負情)>이위두가지부류와다른형식임을발견하고는새로이주목한다.이세유묵에는“安重根謹拜”곧“삼가절함”이라는문구가있음에도불구하고받는사람이표시되어있지않다는것이다.저자는이에대한답을세번째유묵<사군천리…>에서찾고있다.

思君千里천리밖의임금을걱정하며
望眼欲穿(그쪽을)바라보는내눈이(허공을)뚫으려하네
以表寸誠작은충성표하였으니
幸不負情저의충정을저버리지마소서

저자는‘천리밖에있는임금’을‘광무제고종’으로보았고,이내용을대한의군참모중장안중근이광무제에게‘적장을처단하는작은충성을표했으니저의충정(衷情)을저버리지마소서’라는작별의인사말로해석한다.이렇게해석하면앞의두유묵은‘저는나라를위해몸을바치는군인의본분을다하였고’,‘장수된자로서적을앞에두고먼저나아가적장을처단했습니다’라고국가원수인황제에게보고를올리는것으로해석된다는것이다.

이러한저자의해석에따르면안중근과고종의관계가새로이해석된다.안중근은고종의지시로결성된대한의군의지휘관으로서적장이토히로부미를처단하고사형을선고받은몸이되었다.그는이제자신에게부과된최대의임무를성공적으로수행하고하늘나라인‘운재(雲齋)’또는‘천당(天堂)’(두문구모두안중근이남긴유묵)으로갈날을기다리면서국가원수인고종에게하직인사를올린것이다.

안중근재판정사진에서찾은량치차오

「안중근과량치차오:근대동아시아두개의등불」에서는안중근에대한량치차오의칭송시2편을소개하고그의미를짚어보며,안중근재판정사진에서한손으로가볍게턱을고이고앉아있는사람이량치차오임을발견하고,량치차오의뒷줄에앉은한국인변호사가안병찬,량치차오와함께앞줄에앉은서양인이영국인변호사가더글러스임을소개한다.

이어서안중근과량치차오의공유사상을소개하는데,저자는“안중근과량치차오두사람은동아시아전통유가(儒家)의인본(人本)사상을지닌상태에서칸트의개인자유의지와국가주권,그리고이를보장하는‘영구평화론’에접하여크게공감했을것”이라고하면서,“안중근이거짓동양평화의이름으로대한제국의주권을빼앗은이토히로부미를처단한것이나량치차오의‘민족제국주의’곧민족국민국가들의공존체제에대한신념은뿌리가같은사상체계였다”고말한다.그리하여“량치차오는자신이가장위험시하던‘거대한제국주의의외압’의실체가된일본제국을응징하는결단을내린안중근의의연한모습에경탄과존경을아끼지않았”던것이라고말한다.

‘저격현장영상필름’과‘공판기록’찾기

저자는‘하얼빈의거현장영상필름’의존재가알려진이래지금까지그필름을찾으려했던노력들을이책에서총정리하는데,결론적으로는세가지필름의존재를상정한다.

첫번째는러시아육군소속촬영기사코브초프가현장을촬영한필름이다.특별열차가하얼빈철도정거장으로들어오는장면에서부터안중근이체포되어어디론가끌려가는장면까지담은필름으로,이에관해『페테르부르크신문』(1911.10.24.)에서는총소리가나자이토히로부미가쓰러지는가운데수행하던일본고위관리들이모두달아나는정황을전했고,『도쿄아사히신문』(1910.2.1.)에서는촬영기사가러시아육군소속이라는점을밝혀주었다.이필름은사건후하얼빈에서상영될예정이었지만,일본당국의요청이있었던지하얼빈영화관에서상영이조기에중단되었고,일본인과프랑스기업인에게매각된사실이확인되었다.일본측이상영금지를요구한중요한원인은일본고위관리들이놀라서도주하는장면때문으로보인다.이토국장추도기간에일본도쿄료고쿠국기관에서상영된것은이장면을빼고저들이말하는‘흉한’이잡혀가는모습을보여주는데역점을두어편집한것이었다.

둘번째는프랑스의저명한영화제작사‘파테형제’가제작한<이토공작의장례식―1909>란이름의필름이다.『황성신문』(1910.3.29.)에서블라디보스토크에서상영될예정이었지만곧당국의제지로이루어지지못했다고한것이다.이필름서두에도저격장면이담겼던것이확실하다.프랑스기업인이하얼빈에서사간필름의저격장면을활용했을것으로추측되는이필름은파리의국립영화센터소장목록에서도확인되었다.그러나2010년신건물(미테랑도서관)준공으로수장기관의이전과정에서생긴비치위치정보의혼란으로,현재수장위치를확인하기어려운상황이다.

세번째는러시아육군소속촬영기사코브초프가하얼빈철도정거장에서의상황이끝난후에도멈추지않고이토히로부미의시신이열차로운구되는장면에서부터그유해가일본요코스카항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