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보면 반할 초상 : 기억과 추모, 권위와 욕망의 그림, 초상화로 읽는 조선의 사회문화사

알고 보면 반할 초상 : 기억과 추모, 권위와 욕망의 그림, 초상화로 읽는 조선의 사회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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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외형은 물론 정신까지 담아내려 한 조선시대 초상화,
예술성 높은 그림들의 이면에는 어떤 이야기들이 숨어 있을까?

초상화에 깃든 조선의 정치, 사회, 문화 풍경
조선시대 사람들은 초상화를 왜 그렸고, 어떤 용도로 사용했을까? 초상화는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고, 사람들은 초상화를 어떻게 활용했을까? 화가들은 초상화의 주인공을 실제 모습대로 그리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으며, 그렇다고 그저 외형만 잘 닮게 그리면 되었을까? 그리고 초상화의 주인공들은 그저 “잘 그려 주시오!” 하고 가만히 앉아만 있었을까?

이 책은 조선시대 초상화들에 얽혀 있는 다양한 이야기들을 통해 당대 정치, 사회, 문화상을 추적, 해설한다.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어진(御眞)’, 충성심의 증표로 왕이 하사한 ‘신하 초상’, 각 당파나 학파의 정통성을 과시하기 위해 그려진 ‘스승 초상’, 지방 수령과 백성들의 이해관계에서 생겨난 ‘목민관 초상’, 출사(出仕)와 은일(隱逸) 사이의 고뇌가 담긴 ‘사대부 초상’, 그리고 사랑과 애도의 마음이 담긴 ‘벗과 가족의 초상’까지, 저자는 조선시대 초상화 120점을 하나하나 분석하여 미술사적 의미와 흐름을 밝힐 뿐 아니라, 그 초상화가 어떤 배경에서 그려졌으며, 그려진 초상화들은 어떤 역할을 하고 어떤 힘을 발휘했는지, 초상화를 단순한 그림 이상의 무언가로 여겼던 당대 사람들의 인식은 무엇인지, 그렇게 그려진 초상화가 정치, 사회, 문화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를 추적한다.

저자

이성훈

저자:이성훈
부산박물관학예연구사.서울대학교인문대학고고미술사학과에서「정조(正祖)의서예관(書藝觀)과서체(書體)연구」로석사학위(2005)를,「조선후기사대부초상화의제작및봉안연구」로박사학위(2019)를받았다.주요논문으로「군복본(軍服本)정조어진(正祖御眞)의제작과봉안연구-사도세자에대한정조의효심과계승의지의천명-」(2020),「조영석작〈조정만송하안식도〉연구:초상화에투영된‘은일(隱逸)의식’」(2021),「숙종대초상화제작과‘닮음’의구현」(2023)이있으며,이외에도한국미술사관련다수의논문을발표했다.우리나라초상화의예술적가치뿐아니라사회사적시각에서그제작배경,유행,기능등을분석한연구를계속해오고있다.현재고려시대및근대기에생산된초상화를조명하는논문을준비하고있으며,이러한연구성과들을토대로한국초상화를개관하는연구서집필을구상중이다.

목차


머리말

프롤로그
인류는언제부터초상화를그렸을까
중국초상화제작의초기흐름
우리나라초상화제작의시작
예술성높은조선시대초상화
특정인물의재현,그이상의의미
주인공의의사가적극적으로반영된그림

1.초상화란무엇인가?

‘닮음’을추구한그림1:외형의닮음
닮게그린다는것,<이시백초상>
“터럭하나라도더많으면,곧다른사람이다”
<장말손초상>과<이시방초상>의차이
“어진(御眞)은조금이라도미진한점이없어야합니다”
초상화표현기법의큰변화

‘닮음’을추구한그림2:내면의닮음
과장된묘사,<송시열초상>과<윤두서자화상>
‘정신’을담다,<강세황자화상>과<서직수초상>
인자한성품을드러내다,<김정희초상>

‘신명’이깃든그림
‘신명’의힘,<이제현초상>과<하연초상>
7년만에다시그려진<채제공초상>
‘나’의대체물

2.초상화의힘

‘환영’의경험
“선생은말이없고,제자는눈물을흘린다”
“구천(九泉)에서나오신듯하네”

초상화봉안과서원의건립
소수서원의<안향초상>
임고서원과숭양서원의<정몽주초상>
노동서원의<최충초상>과오봉서원의<공자초상>
선현(先賢)초상화의힘
사당과영당으로옮겨간초상화
김시습영당,청일사와청절사
포은선생영당이지어진사연

초상화봉안의정치학
기념공간에서제향공간으로
스승의철학과사상을느낄수있는공간

이모본초상화의제작
이모본,조선후기초상화제작의특징
<안향초상>이모에들인노력
<안향초상>재(再)이모과정의전말
봉안과보존의가치

3.기억과추모의그림

어진목민관을기리다
살아있는목민관을제사지내다
명나라장수들이요구한생사당과초상화
생사당조성유행의시초,이원익생사당
평양에조성된생사당과그들의초상화
지방화가들이그린젊은목민관의초상
생사당난립의폐해와철폐령

스승을추모하다
평생학문에천착한학자의모습,<장현광초상>
노론의영수(領袖),<송시열초상>
몰래그린스승,<윤증초상>
권상하의제자,<한원진초상>과<윤봉구초상>
스승을영원히추모하는가장효과적인방법

사랑하는벗과가족을그리다
이서와윤두서가사랑한벗,<심득경초상>
요절한아들을그린아버지,<이산배초상>
86세어머니를그리다,<복천오부인초상>
아버지와아들의합작,《칠분전신첩》

4.성대(盛代)의기록

공신에게초상화를하사하다
“공신의형상을그려후세에널리알리라”
보사공신김만기와김석주
영조,공신들의초상화를어람(御覽)하다
“분무공신들의초상화를다시그리라”
《권희학충훈부초상첩》과<박문수초상>
분무공신초상화의도상(圖像)과표현형식

나이든신하를예우하다
300년만에성사된왕의기로소입소,《기해기사계첩》
51세영조의기로소입소,《기사경회첩》
영조,나이든신하의초상화첩제작을정례화하다
별본으로남은기로소신하의초상1-이산두와이익정
별본으로남은기로소신하의초상2-강세황과구윤명
별본으로남은기로소신하의초상3-김치인과채제공

현신(賢臣)과충신(忠臣)을기억하다
숙종이왕자에게하사한<연잉군초상>
등준시(登俊試)무과합격자들의초상화
정조,근신(近臣)들의초상화제작을수시로지시하다
정조가가장총애한채제공의초상화
왕의초상화하사에대한신하들의반응
《해동진신도상첩》과《명현화상첩》
관복본초상화의걸작,<유언호초상>과<오재순초상>

5.‘나’를표현한그림

숙종어진,성군(聖君)의현현(顯現)
초상화와정체성의표현
숙종,화려한‘어진(御眞)시대’를열다
1713년작<숙종어진>이제작되기까지
완벽한어진제작을위해숙종이온힘을다한이유

군복본정조어진,지극한효심의표현
군복본정조어진의실마리,<철종어진>과<이창운초상>
<이창운초상>과<이삼초상>의차이
군복본정조어진의세부요소-깍지,등채,환도,통개
영원히부모곁에남고자-육상궁냉천정과현륭원재실
정조가현륭원행차때마다군복을입은이유

야복(野服)에투영된염원
‘출사(出仕)’와‘은일(隱逸)’사이의고뇌
탈속(脫俗)의삶을염원하다,<김진초상>
“몸뚱이는공허한것이고,그림또한진짜가아니다”
양겸과죽서초당
은일의삶을갈구하다,<조정만송하안식도>
초상화대신그려준<송계도>,신분차별의한이담긴<검선도>
심의(深衣)와복건(幅巾)의의미
“도(道)도선(禪)도아니요,은거한것도쫓겨난것도아니다”
“정자관을쓰고심의를입은이사람은누구인가?”
‘나’를드러낸그림,자찬문(自贊文)있는초상화
상의하상(上衣下裳)과난삼(?衫)

에필로그
부록-그밖의주요초상화14점

주(註)
인명및초상화작품명찾아보기

출판사 서평

닮게그린다는것-“터럭한올이라도더많으면곧다른사람이다!”
조선시대에초상화제작을의뢰받은화가에게요구된가장중요한사항은누구라도주인공을단번에식별할수있을정도로‘닮게’표현하는것이었다.그래서송나라유학자정이(程?)의“터럭하나라도더많으면곧다른사람이된다.”라는말이자주인용되었다.이에따라화가들은주인공의모습을더닮게그리기위해많은노력을기울이면서회화기법상의큰진전을이루었다.저자는1700년을전후하여초상화표현기법에일대변화가있었다고하면서,김진규가그린것으로추정되는〈김만중초상〉(1600년대말)과〈김진규초상〉(1710년대)을통해이러한변화를잘알수있다고설명한다.
한편,실제모습에가깝게그리는쪽으로만초상화기법이발전해나가지만은않았다.김진여가그린〈권상하초상〉(1719)은서양의명암법이잘반영되어있어사실적재현솜씨가뛰어난작품으로평가할수있는데,이보다후에그려진진재해의〈유수초상〉(1726)은서양화법을반영하지않고따뜻한질감의피부색을표현하는데집중했다.결과적으로〈권상하초상〉은사실적이기는하나어둡게그려진반면,〈유수초상〉은매우온화한성품의소유자로재현되었다.오늘날사람들도자기얼굴의주름이나잡티가드러나지않기를원해서사진을보정하는것처럼,당대사람들도사실적인그림만을지향하지는않았던것이다.

과장된묘사로내면을드러내다-〈송시열초상〉,〈박세채초상〉,〈윤두서자화상〉
외형못지않게내면즉주인공의정신적인면을드러내는것도중시되었는데,이때는주인공의특징적인면을의도적으로과장되게부각한경우가많았다.얼굴곳곳의굵직하고구불구불한주름,붉은색의두꺼운입술,무성한수염과눈썹,큰몸체등매우강렬한인상의인물로보이게하는〈송시열초상〉,떡벌어진어깨,넓은팔소매등덩치가매우커보이게그려져서그의제자가“높고큰산의형상”이라말한〈박세채초상〉이대표적인사례다.특히한쪽귀밑에서다른쪽귀밑까지빙둘러나있는수염한올한올이서로얽히지않고가지런히바깥쪽으로뻗은모습으로그려진〈윤두서자화상〉을두고,저자는“윤두서는자신이평생쌓은학문적·예술적성취와자신감의근원을자화상에담아내고자했으며,자신의머리(얼굴)에서기가발산되는듯한모습으로수염을표현함으로써이를실현할수있다고믿었던것같다.”고말한다.

초상화는곧‘주인공의대체물’-〈안향초상〉도난,훼손사건
조선시대사람들은닮게그려진초상화를주인공의‘대체물’로인식했다.1684년소수서원에도둑이들어그곳에봉안돼있던〈안향초상〉이도난당하는사건이일어났다.도둑은〈안향초상〉을훼손한뒤고을의성서쪽큰길가에버렸다.당시이지역에서는순흥부를다시설치하기로함에따라여러관공서의신축을자체적으로진행하면서많은백성들이부역에동원되었고,이때문에지역양반들에대한백성들의원성이자자했다.우의정남구만은이러한백성들의원성을안향초상화도난및훼손사건의주요원인으로지적했다.즉당시사람들은안향의초상화를한낱그를재현한‘그림’으로보지않고바로‘안향’자체로보았고,안향은곧양반사대부의대명사였으며,그래서안향의초상화를훼손함으로써불만을표시했던것이다.

초상화봉안의정치학-추모를더욱간절하게만드는힘
16세기중반이후훈구세력을누르고권력을쟁취한사림세력은선현을기리는작업을본격적으로전개했으며,전국각지에서원을건립해나가면서‘초상화의힘’에주목했다.초상화가선현을사모하고기리는마음을더욱간절하게만드는중요한매개체라고인식하기시작한것이다.1814년소론계유학자강필효가유봉영당(酉峯影堂)에서윤증의초상화를보고“마치,그때선사(先師)앞에서친히말씀을듣는듯했다.”라고한것,17세기를대표하는남인유학자장현광이정몽주의초상화를첨배한뒤“거슬러당시를멀리상상하니구천(九泉)에서다시나오신듯하네.”라고한것등이그예로,저자는16세기이후초상화는단순히특정인물을재현한그림이아닌,위패에버금가는봉안대상으로서의권위를갖게되었다고말한다.

생사당봉안용초상화-목민관과백성들간의결탁의산물
조선시대초상화중상당수는주인공이화가에게의뢰해제작한것이아니라,그를추모하고자하는사람들에의해‘그려진’것이었다.이중에는한고을에서선정(善政)을베풀고떠난목민관을기리기위해고을사람들이제작한‘생사당(生祠堂)봉안용초상화’라는것이있다.생사당은제향대상인물이살아있는데도그를제사지내기위해세운사당을말한다.1595년경평안감사이원익을위해지역백성들이세운생사당이그시발점으로여겨지는데,저자는생사당의유래및성행의흐름을평안감사허적ㆍ이만원ㆍ홍만조,평양서윤성수웅등의초상화를들면서살핀다.
한편,생사당조성은17세기말이후전국적으로확산되었는데,이시기에조정에서는생사당의무분별한난립에따른폐단에대해거듭논의했다.즉지방관들이‘양리(良吏)’라는명예를얻을요량으로세금을무분별하게경감하는등필요이상의은혜를베풀고,지역민들은이에대한보답으로생사당을건립해주었던것이다.영조는1724년이후평안도에건립된관찰사의송덕비(頌德碑)와생사당을모두철거할것을지시했다.결국,생사당봉안용초상화는17~18세기에출몰한특수한그림이되고말았다.

제자들이화가를시켜몰래그린스승의초상화-〈윤증초상〉
1711년여름,도화서화원변량은윤증의초상화두점을그렸다.이때의초상화제작은윤증의제자들이주관했다.제자들이윤증에게초상화제작계획을말하자그는“나의부친도초상화가없는데내가어떻게그것을가질수있겠느냐.”며제의를거절했다.이에제자들은향음례(鄕飮禮)행사를진행하는중에화가변량을무리중에들어가게해몰래스승의모습을그리게했다.이로써윤동수는이런기록을남길수있었다.“하늘이도우심에힘입어스승의형상을그려초상화를얻었다.완연히양기(陽氣)가만물을기르는듯한용모이시니,춘풍의기운을띠신것같네.지금에이르러목소리와형상이영원히사라진후에도첨배하여우러러바라볼수있으니,후덕한품성이어렴풋하나기상이방불하여웃고말씀하는소리가들리고귀한가르침을받는듯하네.어찌사림과후학의큰다행이아니겠는가!”

먼저죽은벗을떠올려그린윤두서의역작-〈심득경초상〉
윤두서는친한벗심득경이세상을떠난지4개월만인1710년11월에그의모습을머릿속으로떠올려가며〈심득경초상〉을완성했다.이초상화에는이서가짓고윤두서가쓴찬문두편이있다.심득경보다이서는열한살이많았고,윤두서는다섯살이많았지만두사람은심득경을친구로여겼다.심득경이죽은지2개월여에이서는그를위한제문에서“아!내가공을잃은뒤로정신이나간모양이다.좌우에서공을보고,앞뒤에서보고,오가면서함께했던장소에서보고,꿈에서도보고,어른어른하고희미한사이에도보았다.아!공의모습을어느날에잊겠는가!공의덕스러운모습을어느날에놓겠는가!”라며애통해했는데,이후심득경의모습을윤두서가재현해놓은것이다.『연려실기술』에는“득경이죽은후두서가득경의초상화를추작(追作)하여그집에보냈더니온집안이놀라서울었”다고적혀있는데,그만큼실제모습대로재현해낸윤두서의솜씨를짐작할수있는일화인것이다.

86세노모의모습을영원히간직하고자한그림-〈복천오부인초상〉
〈복천오부인초상〉(1761)은영조대의대표적인왕실인사였던밀창군이직의부인동복오씨의86세때초상화다(복천은동복의옛지명으로,지금의전남화순군동복면을가리킨다).이그림은그녀의아들이익정이평소가깝게지내던강세황에게의뢰하여그려받은것이다.인물의사실적재현을통해정신적인면까지도그림에담아낼수있다고믿었던강세황은오부인을매우왜소하고마르고병약한,당시모습그대로표현했다.탈모가진행된듯한머리,깊은얼굴주름,왼눈만살짝뜬모습등은그녀의건강상태를여실히보여준다.오부인은1762년3월13일에세상을떠났다.화기가작성된1761년9월경에그림이그려졌다고가정하면,초상화제작후약6개월뒤에사망한셈이다.저자는당시오부인이침상을벗어나지못할정도로건강이매우나빴을것으로짐작하면서,“시간이흐를수록더욱몸이야위어가는데다지병으로계속누워있어야하는노모를보는아들이익정의심정”,“머지않아모친을다시는볼수없을지도모른다는두려움”때문에이그림이그려졌을것으로추정한다.

아버지와아들의애절함이담긴초상화모음,《칠분전신첩》
화가임희수는1750년7월27일18세의나이로요절했다.그는유일한작품으로《칠분전신첩(七分傳神帖)》을남겼는데,이화첩에수록된〈강세황자화상〉과확인되지않은인물의초상화한점을제외한17점은모두임희수가그린것이고,부기(附記)는그의부친임위가임희수사망후에초상화첩을꾸미는과정에서기록해넣은것이다.
이화첩에서가장특기할만한점은얼굴이조금씩다르게표현된임위의초상화다섯점이다.저자는이그림들을‘임희수가부친의모습을단순히묘사한그림’이아닌,‘자기모습을완벽하게재현해달라는아버지의거듭된요청끝에완성한그림’으로본다.부자가나눈애절한혈육의정에서나온산물이라는말이다.특히유탄(柳炭)으로얼굴윤곽과수염만소략하게그린미완성초상은임희수가죽기불과10여일전에그린것으로,“손이떨려미처몰골법으로채색하지못하고죽고말았다.”는아버지임위의기록은의미심장하다.저자는“이부기를읽고나서이초상화를보면,몸이성치않아손을떨면서도부친의초상화를완성하려한임희수와그의죽음을예감하며자신을그리는모습을지켜보는임위의모습이자연스럽게겹쳐떠오른다.또한자신이사랑한아들이세상을떠난후그가남긴자신의초상화를보는임위의마음이얼마나비통했을지공감하게된다.”고말한다.

자신의어진제작에온힘을쏟은숙종
숙종은조선시대초상화연구에서매우중요한인물이다.무엇보다도그가세차례에걸쳐자기어진을제작함으로써재위중인국왕이어진을제작하는관행을거의200여년만에복원시켰기때문이다.이후거의모든후임국왕들이그가마련한어진제작관행과의례절차를좇아재임중에다수의어진을제작했다.결과적으로숙종은조선중기의이른바‘무어진(無御眞)시대’를마감하고조선후기의화려한‘어진시대’를열었던임금으로평가된다.
저자는숙종이자신의어진을세차례에걸쳐제작한과정을상세히설명하면서숙종본인이어진제작에얼마나어떻게깊숙이관여했는지를보여준다.결국숙종은자신의모습이핍진하게재현된초상화를통해자신의모습이후대자손및신하들에게정확하게전해지고,태조및세조등국초(國初)의공적이큰왕들처럼성군(聖君)으로기억되기를간절히염원했을것이라고저자는말한다.그러나안타깝게도1954년궁중유물창고화재로그의모습이온전히남겨진어진은오늘날까지전해지지못했다.

격식에맞지않는관모와의복차림의초상화
〈강세황자화상〉은주인공의내면의식이강하게드러난것으로평가되는대표적인작품이다.이초상화에서강세황은오사모(烏紗帽)를쓰고,옥색도포를입고,허리에는붉은띠를맸다.그런데오사모는관리가관복(단령)과함께착용하는관모이고,도포는사대부가벼슬에서물러나있을때입는옷을통칭하여부르는야복(野服)의하나다.오사모와도포의차림은격식에안맞는옷차림인것이다.강세황은자화상에남긴자찬문에서“관리의갓을쓰고야복(野服)을입었네.마음은산림(山林)에있으나이름은조정의명부에올라있음이보인다.”라고했다.저자는오사모는‘출사(出仕)’를,야복은‘은일(隱逸)’의상징물이라고해석하면서,강세황이“자신의마음은산림에있으나이름은조정의명부에올라있다는말로써출사와은일이라는상반된가치사이에서고뇌하는자신의정신세계를드러내었다.”고설명한다.이처럼조선시대초상화는주인공의의사가깊숙이반영된그림이면서,단순히보이는모습대로만그려진것이아니었음을알수있다.

유학자들의초상화에표현된복식의의미
저자는이책에서특히조선시대유학자들의초상화에표현된복식의의미에대해많은페이지를할애하며그의미를밝힌다.그중하나가‘심의(深衣)와복건(幅巾)’인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