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국가운영의‘실제’를보여주는승정원의업무편람
‘은대(銀臺)’는승정원의별칭으로,조선시대국왕의비서실에해당하는기관이었다.여섯명의승지가왕명의출납을맡고각관사와신하들이올리는문서를처리했으며,국왕과신하의접견을주선하고그대화를기록하는업무를맡았다.오늘날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으로잘알려진『승정원일기』역시이들의일상적인업무에서탄생한기록이다.그처럼막중한업무를일관되고정확하게처리하기위해승정원에는세밀한업무지침과선례가필요했다.그결과물이바로『정원고사』,『은대편고』,『은대조례』로이어지는승정원의주요업무지침서들이다.
헌종연간에편찬된『은대편고』는이가운데서도가장방대하고구체적인실무편람이다.이방·호방·예방·병방·형방·공방이라는승정원의육방체제에따라업무를나누고,특정방에국한되지않는공통업무는별도의‘통고’로묶었다.단순히‘무엇을해야한다’는규정만적어놓은것이아니라,실제업무가어떤절차를거쳐진행되었는지,어떤선례가있었는지,상황이바뀌면어떻게처리했는지를구체적으로보여준다.
따라서『은대편고』를읽는것은단순히승정원이라는한관청의내부규정을들여다보는일이아니다.인사와관료평가,국왕의행차와의례,외교와사신접대,국가제사,과거시험,군사지휘와궁궐수비,죄인의심문과사면,상소와장계의처리에이르기까지,조선후기중앙정부가실제로어떻게움직였는가를행정의현장에서확인하는일이다.그러므로『은대편고』는조선시대사료와법전뿐아니라“조선이라는국가시스템자체를이해하기위한기본서”로평가된다.
원전의신뢰성과현대독자의가독성을함께확보한‘교점역주’
이번에발간한『은대편고』는제1권『교점역주은대편고』와제2권『은대편고어휘사전』으로구성되어있다.이중『교점역주은대편고』는서울대학교규장각한국학연구원소장본『은대편고』(古5120-155)를저본으로삼아교감·표점·번역·각주작업을함께수행한결과물이다.『은대편고』의이본은물론『승정원일기』,『일성록』,『정조실록』등의해당기사와대조해오자·탈자·연자·도자를교감했으며,각조항마다원문과번역문을제시하고문맥을이해하는데필요한주석을달았다.번역문은일반교양인도이해할수있는수준을지향하면서,제도사적으로정확한의미를지켜야하는전문용어는무리하게현대어로풀지않았다.
무엇보다이작업은단기간의번역사업이아니다.2018년본격적인강독과번역을시작해표점·번역·교열·감수·윤문·교정을거치는데8년이걸렸다.앞서번역출간한『정원고사』,『은대조례』보다분량이훨씬방대한『은대편고』를여러연구자가분야별로나누어번역하고다시공동으로검증했다.그과정에서본문에모두담기어려운약1,200개의전문역사어휘를따로추려『은대편고어휘사전』을만들었다.
‘승정원3대업무지침서’완간의의미
이번출간에서특히강조할만한것은한권의고전번역서를새로내는데그치지않고,오랫동안이어져온‘승정원3대업무지침서번역사업’을사실상완결했다는점이다.은대고전문헌연구소는앞서정조연간승정원의업무사례와국왕의전교를정리한『정원고사』를『교점역해정원고사』로출간했으며,고종연간승정원의업무규정을정리한『은대조례』도번역출간한바있다.그리고이번에세문헌가운데가장방대하여마지막과제로남아있던『은대편고』를완역함으로써,승정원의주요업무지침서세종을모두우리말로읽을수있게되었다.
세책은서로겹치면서도성격이다르다.『정원고사』가정조연간의전교와업무사례를중심으로승정원의규범을보여주고,『은대조례』가고종연간의업무규정을간결하고체계적으로정리한책이라면,『은대편고』는그사이에서장기간축적된실무규정과선례를가장풍부하게담은책이라고할수있다.따라서세책을함께읽으면단순히한시대의행정규칙을아는데그치지않고,승정원의업무규정이시대에따라어떻게축적되고변화하고정비되었는지를종합적으로추적할수있다.『승정원일기』가매일의국정운영을시간순서대로보여주는기록이라면,이들업무지침서는그수많은국정행위의배후에어떤규정과관행,행정원리가작동하고있었는지를설명해주는열쇠다.
이번『교점역주은대편고』의출간은그런점에서조선의국정기록을‘읽는자료’에서‘이해할수있는시스템’으로바꾸어놓는작업의완성이라할수있다.
제1권『교점역주은대편고』
『은대편고』는여섯승지가분담했던육방의업무에따라‘이방고·호방고·예방고·병방고·형방고·공방고’로나누고,여섯방에공통되는업무와승정원자체의규정등을‘통고’로묶었다.중요한점은오늘날의사전이나법전처럼주제를추상적으로분류한것이아니라,승지들이실제로업무를처리하는절차와흐름에따라규정과사례를배치했다는것이다.각방고에수록된내용은다음과같다.
이방고(吏房攷)
관료제의인사와승정원의핵심운영을다룬다.관원의선발·임명과정사,근무평가·포폄,휴가와사직,왕명전달과회계,대리청정,승지의직제와업무,대신·감사·수령등의선임에이르기까지조선의인사행정이실제로이루어지는절차와관행을담았다.
호방고(戶房攷)
국가재정과관련문서의처리규정을중심으로한다.호조·선혜청과지방의전곡회계,공상관련장부등재정문서의처리와함께국왕이상전을내릴때사용하는새서(璽書),재정·사송·공물관서의구임관원차출과근무규정등을수록했다.
예방고(禮房攷)
『은대편고』에서가장방대하며조선국가운영의의례적측면을총망라한다.국왕의일상의례와행차,경연과기록,중국·일본과의외교,왕실의상례와혼례,국가제향과능묘관리,칙사접대뿐아니라생원·진사시와문과등각종과거시험의운영절차까지폭넓게다룬다.
병방고(兵房攷)
군사행정과궁궐·도성의안전,무관선발의실무를보여준다.국왕행차때의군사호위,표신·밀부·발병부등군사명령수단,군사훈련과궁성·도성경비,숙위,군관인사와군율을비롯해무과·시사·전강등각종무관시험의세부운영규정을담았다.
형방고(刑房攷)
언론기관의활동과형사행정의절차를함께담고있다.사헌부·사간원의상소와피혐·처치등대간업무를비롯하여친국·정국·추국·삼성추국등죄인심문,소결과계복,의금부·형조의업무,사면과처벌명령에이르는사법실무를정리했다.
공방고(工房攷)
문서행정과국왕에게의견을전달하는절차를중심으로구성된다.각종문서에사용하는인신의관리와승지의숙직관련규정,감사·수령등외관직관원에게국왕의뜻을전달하는선유의절차,관원과유생등이국왕에게올리는상소의처리방식을담았다.
통고(通攷)
어느한승지방에만속하지않는승정원공통업무를모은부분이다.국왕의연중일정,승정원의역사와원규,승지·주서의인사와복무,휴가·복제규정을비롯해패초·회계·추고·비망기등공통업무와지방관이국왕에게올리는장계의형식·처리절차를수록했다.
이처럼각방고는서로독립된행정분야를설명하면서도서로촘촘하게연결된다.같은‘동가(動駕)’(임금이거둥하는것)라도의례의관점에서는예방이,군사호위의관점에서는병방이맡는식이다.바로이점때문에『은대편고』는추상적인행정제도의목록이아니라조선의국정이사람과문서와절차를통해실제로작동하는모습을재현한기록이라는특징을갖는다.
제2권『은대편고어휘사전』
번역서의부록이아닌,독립적인‘조선시대행정용어사전’
『은대편고어휘사전』은『교점역주은대편고』를읽기위한보조적인책인동시에,그자체로활용가치가높은조선시대제도·행정어휘사전이다.
조선시대법전과행정문헌을번역할때가장어려운문제가운데하나는전문용어다.현대어로지나치게풀면당대제도의정확한의미가사라지고,원어를그대로남기면독자가뜻을이해하기어렵다.연구진은이문제를해결하기위해본문의전문어휘를무리하게풀어쓰는대신,약1,200개에이르는주요역사어휘를별도의사전으로독립시켰다.
‘가승지’,‘감결’,‘각군문’,‘대리청정절목’,‘표신’,‘해유’처럼오늘날에는뜻을짐작하기어려운용어를단순히한줄짜리사전적정의로처리하지않고,그용어가어떤제도속에서누구에의해,어떤상황에서사용되었는지를설명하는방식으로풀이했다.따라서하나의표제어를읽는것만으로도조선시대관직·문서·의례·인사·군사·사법제도의한단면을파악할수있다.
『은대편고어휘사전』의특징과가치
첫째,『은대편고』에실제로등장하는용어를중심으로만든‘문헌기반사전’이다.표제어를일반적인역사용어에서임의로선정한것이아니라『은대편고』의편명과각조항에서직접추출했다.가나다순으로배열하고,해당어휘가『은대편고』의어느편,어느조항에등장하는지도표시하여『은대편고어휘사전』과『교점역주은대편고』를오가며확인할수있도록했다.
둘째,단순한한자풀이를넘어제도와용례를설명한다.같은말이라도시대나문맥에따라의미가달라질수있는만큼,실제행정에서의기능과사용맥락을풀어줌으로써고전번역자와역사연구자가정확한의미를판별하는데도움을준다.
셋째,『은대편고』한책을넘어‘승정원3대업무지침서’를함께읽는도구가된다.『은대편고』가『정원고사』와『은대조례』의주요업무와제도를폭넓게포괄하고있기때문에,여기에수록된어휘는세문헌을함께읽고비교연구할때에도유용하다.
넷째,향후조선시대법제·행정용어연구로확장될수있는기초자료다.관직명이나기관명뿐아니라행정행위,공문서,의례절차,인사·군사·사법용어가한데모여있어,조선후기국가운영의개념체계를복원하는자료로활용할수있다.역사학·법제사·고문서학·한국학연구자는물론『승정원일기』나조선시대법전을번역·해독하는연구자에게도실용성이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