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이 있는 오후 (김석렬 시집)

여백이 있는 오후 (김석렬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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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처음에는, 표제 “여백이 있는 오후”가 한껏 멋스럽다 하면서, 또 한편 좀 허전하고 쓸쓸하다 하면서, 김석렬의 시편들을 읽었다. 그리고는 이내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멋을 부린 것도 아니고 쓸쓸함을 깔아 놓은 것도 아니었다. 잠시 내려놓았던 원고를 다시 펼쳐 들며 그의 삶은 오후쯤에 와 있고, 가진 것은 마음 안의 한 줌 여백뿐이란 것을 알았다. 그랬다. 백열白熱하던 청춘을 건너, 뱀 같은 지혜의 연륜을 지나, 김석렬 시인의 삶의 시절은 이제 오후 4시쯤, 그리고 그가 지녀 가진 바는 불가佛家의 공空도, 도문道門의 허무도 아닌, 오직 사람이 가슴 한쪽에 품을 만한 자그마한 여백뿐임을 깨우쳐 느낀 것이다.
“붉은 홍시 떨어질/ 하늘이 다가오면/볏짚 타는 연기로/ 밥을 짓는 마을 찾아/ 가르릉거리며 하루를 보내고 싶다”(「자전거를 타고 싶다」)나 “산 아래 바라보며/ 꽃 한 송이 피었구나// 지나가는 것은/세월이나 물길이 아니라/ 스치는 바람”(「코스모스」)나 “앙상함으로 남은 시간의 자투리를/ 여유로 만들기 위하여”(「그 끝」)나 “소나무 가지 사이 별 반짝이는 시간/철갑으로 무장한 침묵 아래/ 발길 쉬어본다”(「소나무를 안아본다」)가 다 그러하지 않은가. 멋있게 푸근하게 털털하게 수염 자라게 두고 김석렬 시인은 오늘도 “여백이 있는 오후”에 턱하니 앉아 있지 않은가.
충청도인지 전라도인지 그가 지어놨다는 집에 가을쯤에는 따라가서 한 술상을 앞에 놓고 나도 그 오후의 여백이란 것에 흠씬 등을 기대고 앉았다가 왔으면….
- 김윤식(시인)

시에 대한 순수하고 진정한 자세와 마음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는 시인의 어법과 문장은 솔직하고 소박하다. 그래서인지 전체적으로 작품들은 난해하지 않다. 그럼에도 시집의 많은 작품에는 얼핏 보아 쉽게 파악되지는 않지만 깊은 사유를 통한 철학적 통찰이 녹아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시인은 우리의 정서를 때리는 심상의 기층언어를 선별하여 작품에 구사한다. 이제 고향의 풍경 위에는 생동감의 맥박이 뛰고 작품은 성공적인 동적 예술로 변모하고 있다. 즉 작품의 ‘내용과 형식’은 예술적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있는 것이다. 고향을 그리는 시인의 혈맥에는 아직도 펄떡거리는 싱싱한 피가 돌고 있음에 틀림없다.
- 호병탁(시인·문학평론가)
저자

김석렬

김석렬시인은전남담양에서태어나45년째인천에서살고있습니다.2000년『문예사조』신인상으로등단하여,시집으로『이그리움이끝나고나면』『모두를사랑해야한다는것을알기까지는』『여백이있는오후』등을펴냈습니다.인하대사회교육원소설창작과(5,6,7기)를수료하고2001년부원문학상·2010년대한민국국회외교통상통일위원회예술인상·인천광역시예술인표창을받았습니다.칠석천제인천광역시보존위원회위원장을지내고,현재한국문인협회(인천광역시지회)회원,한국아동문학회중앙위원,인천털보식물원대표로활동하고있습니다.

목차

1부여백이있는오후

신발·12
여백이있는오후·14
상사화·15
새벽에·16
코스모스·18
길·19
차향茶香·20
등목·21
밴댕이구이·22
오일장·24
데아뜨르규호·26

2부대나무숲으로간다

목련·28
순백의시간·29
대나무숲으로간다·30
그끝·32
서각書刻·33
꽃을보는시선·34
텃밭·35
벚꽃걷기·36
가지치기·38
민초막걸리·40
월동준비·42
차탁작업·43
충전充電·44

3부지구를놓다

지구를놓다·46
일찍찾아온봄·47
멸치·48
타악기여인·50
구월·51
남해갓후리·52
얼린소주·54
주홍·56
매화를새겨본다·57
봄나들이·58
겨울·60

4부아침이좋다

아침이좋다·62
나태한여름·63
하얀발걸음·64
작업·65
겨울동화·66
광덕산가을·67

5부거꾸로도는물레방아

거꾸로도는물레방아·70
소나무를안아본다·72
젓가락·73
귀머거리의집·74
어버이날·75
투병기·76
이장·78
당신이걸으셨듯이·80
가야한다·82

6부문득

문득·86
촛불·88
세면대에서·89
자정에서있는이유·90
선학동거리·92
소래좌판·94
단비·96
작은하늘·98
설무雪舞안에서·99
백양사굴참나무·100
우리들·102
가을이지나가는길목·103
일지춘화一枝春花·104
대나무·105
쑥떡·106
자전거를타고싶다·107
한번더살아야할까·108

해설|호병탁_나직한목소리로간절히노래하는‘사모곡’·109

출판사 서평

시에대한순수하고진정한자세와마음에서비롯된것으로보이는시인의어법과문장은솔직하고소박하다.그래서인지전체적으로작품들은난해하지않다.그럼에도시집의많은작품에는얼핏보아쉽게파악되지는않지만깊은사유를통한철학적통찰이녹아있음을발견하게된다.우선시집의첫번째작품을읽으며논의를계속하기로하자.

햇살들이
그대의속삭임되어어깨에내려오네요
오늘은한가롭게여백이란그림을그려
가슴에남기고싶습니다

그안에서
그대의작은밀알들이자라
숲이되고거대한산이되고
그아름다운산하가
익어익어
이가을날햇살로풍성해지도록

시원하게맑은하늘
붉게물들어가는감몇알로가슴까지익어가는오후엔
그대가그려줄화폭을펼쳐두고
기다림만그리렵니다.
-「여백이있는오후」전문

햇살이좋은한가로운어느가을날오후다.햇살은마치“그대의속삭임”과도같이어깨에내려와부서지고있다.참아름다운정경이다.우리는여기서‘그대’로불리는한사람을생각하며그리워하고있는화자의마음을느낄수있다.화자는이처럼한가로운날,“한가롭게여백이란그림을그려/가슴에남기고”싶다는자신의희망을피력하며작품첫째연의문을연다.
그런데“여백이란그림”이란말이벌써예사롭지않다.‘여백餘白’은그림에아무내용도없이비어있는부분을말한다.즉화폭에붓자취하나없이‘하얗게빈공간whitespace’을가리키는것이다.그렇다면‘여백이란그림’이란말에는모순이발생한다.‘그림’은본래어떤형상을평면위에선또는색채를써서나타낸것이기때문이다.‘역설’이고개를든다.
그러나우리는동양화,특히문인화에있어여백의미가얼마나중요한역할을하는지잘알고있다.서양화는화폭을꽉채워서그림을그리고색을칠하는경향이크지만,동양화의경우는일부러여백을남기면서전체적인공간을활용한다.이때의여백은단순한빈공간이아니다.붓질한부분과빈공간은필연적으로결합되어조형의미를극대화하고여운을통해우리를사유의세계로인도하게되는것이다.
둘째연에서시인은그텅빈공간안에서“그대의작은밀알들이자라”숲이되고산이되어마침내“아름다운산하”가되기를바란다.그리하여“이가을날햇살로”풍성하게익어가기를희망하고있다.그러나이런모든것들은구체적인현실의그림이아니다.여백속에그려지지않은그림,즉화자의마음이어른대고있을뿐이다.
셋째연이자마지막연에서는다시화자의현실세계다.시인은우리에게아름다운가을풍경을다시보여준다.“시원하게맑은하늘/붉게물들어가는감몇알”…,‘파란’하늘과‘빨간’감의강한색채대비가강력한시각적심상을유발하고있다.얼마나선연한모국의가을풍경인가.
그런데화자는“화폭을펼쳐두고”이런현실적이고구체적인풍경대신“기다림만그리”겠다고다짐하고있다.‘기다림’은마음속의생각이다.당연히형체도색채도없다.첫연에서화자가‘여백이란그림’을그리겠다는말이상기되며고개가끄덕여진다.가을하늘아래익어가는감은선과색채가분명하지만‘기다림’은아무것도볼수없는빈공간에불과하다.그러나이작품에서잘붓질된가을풍경과기다림이라는텅빈여백은내적사유로강하게결속되며작품전체의조형미를극대화하고있다.동시에화자가얼마나‘그대’라고불리는사람을그리워하며기다리고있는지그간절한마음이독자의가슴을치며다가오게되는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