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박씨의 시간 (임희숙 시집 | 양장본 Hardcover)

수박씨의 시간 (임희숙 시집 | 양장본 Hard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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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임희숙의 시는 사물에 대한 독특한 관점과 해석으로 가득하다. 시인에게 사물은 시적 상상의 토대를 제공하지만 그것을 드러내는 방식에 있어서는 일정한 차이를 보인다. 시인의 사물에 대한 이러한 차이가 미감美感을 발생하게 하고, 그것이 그 시의 정체성을 결정한다고 할 수 있다. 시인은 어떤 사물을 관념이나 이념 차원에서 드러내기도 하고 또 그것을 배제한 채 사물의 속성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도 한다. 시인과 사물 사이의 관계에서 전자를 강조하면 그것은 관념시가 되고 후자를 강조하면 그것은 사물시가 된다. 이 둘 중에서 좀 더 미학적인 시는 후자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언어 자체가 인간에 의해 고안되고 소통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순수한 사물시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시인과 사물과의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사물이 은폐하고 있는 존재성을 얼마나 온전하게 혹은 새롭게 들추어내느냐 하는 데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저자

임희숙

임희숙시인은서울에서태어났다.1991년『시대문학』으로등단했고,명지대학교대학원에서한국미술사박사과정을졸업했다.시집으로『격포에비내리다』『나무안에잠든명자씨』,산문집으로『그림,시를만나다』『살다사라지다-죽음으로보는우리미술』이있다.

목차

1부

뜨거운꽃·12
수박씨의시간·13
서낭바위그집·14
신서神書·15
소란한묵서墨書·16
능수자작한채·17
무화과를만나다·18
나의부석사·20
약서랍을열다·22
봄날가지치기·23
와흘본향단·24
잠원에대하여·26
밀가루를빚기로했다·28
홀수가옳다·30
시월,적벽赤壁의시간·32
동백,아무개아무날·34

2부

아스파라거스·36
슬쩍밀어닫은방문·37
에티오피아매화나무·38
풍설야귀인風雪夜歸人·39
저녁풍경·40
저녁을그려다오·41
오동나무가사라졌다·42
명사산은없다·43
마스카라를샀다·44
붉은새·46
니스,푸른비둘기·48
투르가는길·50
수상한그릇·52
쓰지말아야할시·54

3부

몸이말했다·58
매에찍히다·59
오십그리고오오·60
화양연화의한때·61
벌레도드리·62
멸치의이름으로·64
중력에대하여·66
거돈사가비었냐구요·68
내친구프리스카·70
모래내여지도輿地圖·71
주산지注山池·72
우체국,모래내·74
살아야겠다·75
이모든생을또다시·76
오동나무가사라졌다는시를쓴이후·78
맙소사,지나가는중·80

4부

늙은거미의노래·82
구례구역·83
목어木魚·84
사순절의어떤아침·85
꿈이다용서하지마라·86
길몽인가요·88
나는하느님이고전쟁이고슬픔이고·90
별을얻다·91
나의늙은고양이·92
중학동18번지·94
바퀴가구르는동안·96
애월,칠월·97
머나먼나무·98
누상동분꽃·100
우리의거리·101
성수대교2020·102
자가격리중·104
코로나코호트코로나·106
느티와조우하다·108

해설|이재복_주름과상징·109

출판사 서평

시인과사물과의관계에서은폐된사물의탈은폐(Revealing)의문제는시인의화두로자리잡게되고,이과정에서시인은운명적으로시간과만나게된다.하이데거의‘존재와시간(SeinundZeit)’이의미하는것이바로그것이다.하나의사물이존재한다는것은곧시간속에서그존재가발생한다는것을의미한다.우리는이것을‘존재론적사건’이라고부른다.따라서하나의사물이존재하는것은그자체로하나의사건(생명적사태)이되는것이다.이런점에서보면시간이전제되지않으면사물은그존재혹은존재성을드러낼수없는것이다.
시간이단순한직선적인흐름을의미하는것이아니라하나의사건의차원으로해석됨으로써사물은더넓고깊은존재지평을드러내게된다.사물은각자각자가저마다스스로그러한사건의발생을통해존재하는것이고,그사건의전체혹은전제로서의사건이사물의존재성이되는것이다.사건의전체가사물의존재성을드러낸다는차원에서보면그것은어느한존재(God)에의해창조되거나이미틀지워진그런존재가아니라는것을말해준다.하나의사물이존재한다는것은스스로의원인에의해그러하게된다는것이고또그것은그러한존재들과의관계속에서그존재성을드러내게된다는것을의미한다.가령「수박씨의시간」에서시인은

씨앗이흩어진풀꽃무늬쟁반위로
여름비가내리고
우물처럼깊어진풀꽃의집
벌레가두고간껍질과짐승의터럭을안고
꽃은제시절에늙어갔다
우물이마르고눈이내리고
어긋난무릎의각질이나이테로쌓이는동안
다시풀이자라고꽃이피고
수박씨의수액이붉은홍수처럼흘러내리도록
빙하기는오지않았다

질긴방패를뚫고흘러나오는
수박씨가우물을삼킨시간
온갖풀꽃들과짐승들을키워낸씨앗

누구나한생은그렇게시작된다
-「수박씨의시간」전문

라고고백하고있다.시인이노래하고있는대상은“수박씨”이다.그런데시인은그것을“수박씨”라고하지않고“수박씨의시간”이라고명명하고있다.하이데거적인관점에서보면“수박씨”라는존재는이미그안에시간이라는지평을지니고있는것이다.따라서“수박씨의시간”은“수박씨”를존재론적인차원에서풀어쓴것에지나지않는다.하지만이렇게풀어씀으로써“수박씨”를고정된실체로인식하게하는것이아니라그것을끊임없이움직이고변화하는생성의과정으로인식하게한다.
시속의“수박씨의시간”에는커다란두사건이동시에존재한다.여기에서의두사건이란생(生)과사(死)혹은펼침(伸)과돌아감(歸)을말한다.일반적인시간개념에서는생다음에사가오고펼침다음에돌아감이온다.하지만“수박씨의시간”에서는그둘이동시에발생한다.이것의보다선명한예를우리는나무에게서발견할수있다.나무를보면아래부분은검고딱딱하다.이에비해위부분은밝고부드럽다.나무밑동의검고딱딱한껍질은죽음과돌아감을,위의밝고부드러운잎들은삶과펼침을표상한다.이렇게두사건이나무에서동시에일어나고있고그것이바로나무의존재성을드러내는것이다.삶과죽음이끊임없이교차하고재교차하면서‘지금,여기’의존재성을드러내고있기때문에생과분리된죽음의세계가어디따로존재하는것이아니라고할수있다.
“수박씨의시간”속에는‘흩어짐’,‘내림’,‘깊어짐’,‘두고감’,‘안음’,‘늙어감’,‘마름’,‘내림’,‘쌓임’,‘자람’,‘핌’,‘흘러내림’,‘뚫고흘러나옴’,‘삼킴’,‘키워냄’등이동시에존재한다.시간이일직선적으로,규칙적이면서질서정연하게,투명함을유지하면서흘러간다고보는것은우리의인식이만들어낸환상일뿐이다.“수박씨의시간”이잘보여주고있는것처럼그것은비선형적이고불규칙하게,동시적으로작동하고있는불투명하고가물한(玄)존재라고할수있다.우리는하나의사물혹은존재를투명하게그실체를해명할수없다.“수박씨의시간”에서처럼그것은그존재의심층을헤아릴수없는“우물을삼킨시간”으로드러날뿐이다.이렇게“수박씨의시간”에서처럼하나의사물을동시적인사건이나가물한존재로인식한다는것은곧그사물의지평을더확장하고심화한다는것으로이해할수있다.사물에대한시인의이러한인식은그녀의시를관통하는중요한원리로볼수있다.이런점에서“누구나한생은그렇게시작된다”는고백은의미심장한데가있다.이것은,시인이모든사물을대하는관점이면서동시에태도라고할수있다.“수박씨의시간”에잘드러나있듯이모든사물의“한생”은가물하고모호한깊이와관계의동시성과자기원인을은폐한,끊임없는생성의과정속에놓인그런존재론적인사건인것이다.
-이재복(문학평론가·한양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