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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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이정현의 시집을 읽는 독자들은 고요와 안식, 그리고 평화를 느낄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성급하게 대답과 결론과 해결을 원하는가. 우리는 얼마나 모든 것의 자명함과 명쾌함을 갈구하는가. 우리의 피로는 원칙적으로 대답이 없는 공간에서 성급한 대답을 기대하고 찾는 행위에서 축적된다. 우리는 화끈하고 명쾌한 길을 원하며, 불분명함, 대답 없음 혹은 대답할 수 없음의 희미한 상태를 견디지 못한다. 우리가 이렇게 성급하고 천박한 진리-경쟁의 공장에서 숨을 헐떡이며 확실한 성과물을 향해 돌진할 때, 이정현은 그런 기계적이고 야만적인 행위들을 “하지 않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아무도 없는 숲속 오두막 조그만 창에 그림처럼 가득한 초록 나뭇잎들, 목적도 성취도 없이 흘러가는 강물, 겨우내 키우고 키워 더 이상 견딜 수 없이 커진 꽃망울을 터뜨려 봄을 알리는 목련,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항상 처음 같은 풍경으로 흘러가는 구름, 이런 것들은 해명해야 할 진실도, 끝내 구해내야만 할 명쾌한 해답도 가지고 있지 않다. 이런 것들은 인간보다 먼저 무명, 무념, 무상, 무위의 상태에 가 있으며, 차지도 넘치지도 않는 ‘존재의 충만’에 도달해 있다. 이정현의 이 시집은 정복과 성취의 담론에 지친 독자들에게 이런 고요와 평화와 안식의 풍경도 있다는 사실을 섬광처럼 보여준다. 이 시집을 읽다 보면 독자들은 때 절은 옷을 벗고 맑고 푸른 숲속에서 영혼의 삼림욕을 하고 있는 자신을 느낄 것이다. 평화는 거기에서 온다.
저자

이정현

이정현 시인은 1964년 강원도 횡성에서 태어나 동국대 대학원 선학과를 졸업하고, 2007년 『수필춘추』(수필) 2016년 『계간문예 』(시)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살아가는 즐거움』 『춤명상』 『풀다』 등과 시선집 『라캉의 여자』, 평론집 『60년대 시인 깊이 읽기』, 산문집 『내 안에 숨겨진 나』가 있다. 문학비평가협회상, 문협서울시문학상, 수필춘추문학상, 한국시원시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관공서, 동국대 평생교육원에서 요가와 명상을 강의하고 있다.

목차

1부

점點·10
환장할 봄날·12
여름비·14
선방에 들이기 전·16
비결·18
그네·20
살생·22
당신·24
무위진인無位眞人·26
꽃게·28
나비 한 마리 머물다·30
금장대 나룻배·32
계곡물·34
부도浮圖·36
은행나무·38
팬데믹·40
화두·42
바람을 엮다·44
편식·46
퍽치기·48
불면증·50
화장터에서·52
꽃이 꽃으로 보이질 않는다·54
낚시·56
운명·58

2부

자화상·62
감자꽃·64
동백꽃·66
지심도只心島·68
파도·70
친정엄마·72
바람 들다·74
아버지·76
온난화溫暖化·78
핵폭탄·80
유산·82
요즘 뉴스·84
보물찾기·86
칼의 소리·88
고기잡이·90
그들만의 법·92
오후 불식·94
푸른 사랑법·96
하마터면·98
바다 사막·100
즐거운 식사·102
즐거운 술·104
동안거·106
춤·108
시詩 한 갑·110

해설 | 오민석_무슨 종이냐고 누가 묻거든·114

출판사 서평

주신 엽서에 “밖으로 모든 연緣을 쉬고 안 마음이 헐떡임이 없어야 가可히 써 도道에 든다 하심이여, 이는 방편문方便門이라” 하셨느니라.
-「비결」 전문

이 시집 모든 시의 끝에는 위에서처럼 “선문답식 노트”가 달려 있다. 이것은 일종의 ‘시작 노트’라고 할 수도 있는데, 일반적인 시작 노트와 달리 본문과 화학 반응을 일으키며 본문의 영역을 더욱 확장한다. 이런 형식은 중국 남송대의 선승 무문혜개가 지은 (선 사상의 고전이라 할) 『무문관無門關』의 구조와 유사하다. 『무문관』은 총 48칙則의 공안을 싣고 있는데, 각 칙의 본문이라 할 “고칙”은 “무문의 말”과 “무문의 송”으로 이어지며, 말미엔 항상 “군소리”라는 형식이 따라붙는다. 그야말로 선문답인 고칙의 의미는 말과 (게)송을 거쳐 군소리에 이르면서 더욱 분명해지는데, 이 시집의 “선문답식 노트”는 바로 그 “군소리”의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시의 바깥이 아니라 안에 있다. 말하자면 이정현의 선시에서 “선문답식 노트”는 시의 일부이지 시의 설명이 아니다. 위의 작품은 짐짓 가벼운 위트를 동원하며 ‘도에 이르는 길’의 핵심을 보여준다. “꽃 같은 나이”의 화자는 선방에서 도를 가르치는 선승에게 가르침을 받기는커녕 깨우침을 준다. 잠을 잘 자는 비결이 뭐냐는 선승의 질문에 화자는 “그냥 앉아 있었다”고 말한다. 화자는 역설적이게도 깨우침의 열성조차 버리고 “졸다가” 깨우침의 경지에 이른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이 시의 “선문답식 노트”에 그 답이 있다. 집착을 버렸을 때 “밖으로 모든 연緣”의 쉼이 오고, “안 마음이 헐떡임이 없어야” 도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