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눈을 밟으며 (황형자 시집)

숫눈을 밟으며 (황형자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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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황형자 시인의 시는 본질적으로 모성적인 사랑을 토대로 고향 강진에서의 가슴 저린 기억과 같은 장작들이 모여 시적 언술 방식으로 타오름으로써, 모닥불의 온기를 느끼게 하고 있다. 시인은 바다와 섬을 근간으로 살아가는 존재들에게도 따스한 눈빛을 보내고 있으며, 삶의 본질과 실존에 대해서 고민하기도 하고 그리움과 사랑의 풍경을 짙은 페이소스로 형상화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깊이 있는 자아 성찰과 함께 생태시의 가능성까지 보여주고 있다. 나지막하지만 흡입력 있는 황형자 시인의 시는 진정 우리가 무엇을 소망하고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준다. 이런 맥락에서 강진의 자연환경과 삶, 그리고 자아와 세계를 둘러싼 시인의 진솔한 메시지들은 우리 시의 서정적 휴머니티라는 질감을 고양하는 데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

황형자

전남강진출생
국립목포대학교국어국문학과졸업
2019년『해남문학』신인상당선
2020년『시조시학』(시조),2023년『문학청춘』(시)등단
한국문인협회회원,강진문인협회감사,
해남문학회회원,현대시아카데미회장

목차

1부마량에가다



마량에가다·12

어느소아병동에서·14

열려라,참깨·16

대흥사동백·17

겨울,김유정역·18

숲으로·20

고무줄놀이·21

작은댁할머니·22

겨울을요리하다·24

붉은바람이·26

생일도生日島·28

어느가을,고성사·30

에두아르레옹고르테스그림속으로·32

철새는날아가고·34

장롱안의사랑·35

엄마생각·36

우항리에서·38

간이정류장·40



2부강진만갈대밭



강진만갈대밭·44

다시석류꽃은피고·45

살구나무그녀·46

정석丁石을읽다·47

구강포장터·48

비래도飛來島·49

갈대·50

가우도·51

박꽃·52

새해·53

넝쿨장미·54

곡우穀雨·55

모란의집·56

홍시·57

산댓잎흔들리는·58

봄은·59

들개·60



3부빈집



어머니·62

밀죽의전설·63

빈집·64

살구·66

설야雪夜·68

요양병원에서·69

늦서리몰고온너·70

일포스티노·72

하의도·74

늙어가는사랑·75

가을·76

활·77

골목길·78

한정식·80

애저녁에·81

미자·82

KBS가요무대·83



4부눈길



까치·86

찔레꽃·87

풍금이있던자리·88

그리운할머니·90

사월·91

우리동네노총각·92

1974년5월·94

사의재四宜齋에서·96

소·98

땅끝에선연인·99

곡예사·100

그녀는연보라색을좋아하셨어요·102

수채화역·103

별·104

오월의길목·105

눈길·106



해설|박성민_순수와진실을갈망하는인간회복의꿈·110

출판사 서평

순수와진실을갈망하는인간회복의꿈

박성민(시인)

자아와세계의본질을투시하는사유

황형자시인은2019년『해남문학』신인상에당선된후2020년『시조시학』에시조로,그리고2023년『문학청춘』에시로등단하여치열하게시작(詩作)하고있는시인이다.고향인강진의아름다운자연풍광과어우러진사람들의따스한정에대한기억,그것을잊지않기위한시·공간적기록이라고볼수있는이번첫시집은인간과자연과의공감,사라져가는것들에대한안타까움과함께그것들을지금이자리로호명하여대모적(大母的)감성으로품고다독거리는면모를보여주고있다.
이시집의특성은시와시조가함께실린시집이라는점이다.전체4부로구성된시집에서1부,3부,4부는시,2부에서는현대시조만을모았다.현대시조는사유의집약성과언어의응축성이돋보인다.황형자시인은3장6구12음보라는시조의기본골격안에서배행과배연을자유롭고비약적으로함으로써삶의외로움이나그리움을통찰하고강진의자연물과사람들을형상화하고있다.황시인은전통적으로시조가지켜온3장의형태적인정형성을여러방식으로변형시키면서시적형식의긴장과이완을실험하기도한다.특히단시조가추구해온시적주제의압축,긴장과함께정형의틀안에서시적의미를심화하고확대하려는시적전략을보여주고있다.
황형자시인의시편은고향강진에대한따스한기억,바다와섬을보며자란존재들이잉태한욕망과좌절의존재론적고독을형상화하고있으며이는강진의역사에대한비망록이라는의미망을형성하기도한다.더나아가자연사물을통한자아성찰은물론문명비판적시선을견지한시편에서는생태시의가능성까지타진해볼수있다.가슴밑바닥에서솟는정한이오롯하게곰삭아있는황형자시인의시세계를살펴보겠다.

고향강진,가슴저리고따스한기억들

지나간시대의삶은회상,혹은환기라고하는기억기제를거쳐시인의언어로재현된다.황형자시인의시는유년부터성장기를거쳐중년에이르기까지고향에서의가난하고힘겨웠지만따스했던과거의기억을되살리면서그것과화해하거나치유하기위한글쓰기로볼수있다.개인의기억에관한문제는공동체적기억이나정체성과도직접관련되어있다는측면에서그것이작품속에서어떻게형상화되고있는지를살펴보는일은중요한작업이라할수있다.

신작로따라모퉁이들어서니
울넘은호박꽃순한얼굴내밀고
토담의거친손
유년이서있다

푸르스레한저녁이몰려오면
아궁이에쪼그리고앉은어린동생들
허기진졸음에자꾸꾸벅거리고…….

어머니는늦은저녁을굽는다
멸치육수에호박된장국끓여주시던날이면
배가따뜻하고온몸이포근한가족

찌든땀훔쳐가며일하던엄마는
일년내내밭에쪼그리고앉아있었지
어쩌다한번엄마가분홍립스틱바르는날이면
내유년은행복했어라

거미줄은빈집을쉼없이다독거리고
호박꽃은흑백의필름속
유년을보듬어보는데
-「빈집」전문

이제는빈집이되어버린어린시절화자의‘집’은그리움과동경의낭만적대상으로만존재하지않는다.늦은저녁때가되어서야어머니가멸치육수에호박된장국을끓여줄때까지“허기진졸음에자꾸꾸벅거리”면서“아궁이에쪼그리고앉은어린동생들”을다독거리며배고픔을참아야했던처절한가난과고통의공간이기때문이다.고향공간은일년내내밭에서일하다가어쩌다한번“분홍립스틱바르”고외출하는어머니에게도힘겨운생존의공간이었으리라.그래도“배가따뜻하고온몸이포근한가족”속에서자란화자는“내유년은행복했어라”라고말하면서이제는쇠락해버린옛집을보며“흑백의필름속/유년”을더듬는다.
이시는자신의과거를탐색하는과정에서옛집의이미지를‘만들어’내고있다고볼수도있다.시인이어린시절가난하고외로웠던기억을은폐하고고향의옛집을이상적공간으로설정하는까닭은,옛집을떠난삶이힘겹고각박하기때문이다.옛집에서의삶이보릿고개를견뎌야했던우리네1960년대사람들의삶과달리낭만적일리가없지만,이제는돌아올수없는과거유년의옛집을이상적공간으로재구성하려는무의식적행동이라고볼수있다.이는프로이트가말한‘은폐기억’(隱蔽記憶)’으로볼수있다.그에의하면인간은불안을해소하려고현실에서어떤상징적질서를찾으려무의식적으로노력한다.그런데이런노력이실패했을때인간은‘행복했던과거’를먼저떠올린다는것이다.흥미로운것은이같은무의식이플라세보효과(Placeboeffect)를나타낸다는점이다.어린시절기억을소급해서재구성하는동안황형자시인의유년기는가난했지만아름다운‘옛집’이라는상징적공간으로그려진다.
이러한공간성은요양병원에서“축늘어진흰장미로임종을맞아누워있”는어머니(「요양병원에서」),“꽃잎이꽃불처럼분분히휘날리는”초등학교교정에서“가슴속에서아직도숨을쉬는/아이들을가만히불러보”는행위(「풍금이있던자리」)로이어지며이는‘장롱’에서“갈래머리,땡땡이리본을머리에달고/빨간책가방”을맨손녀의사진을꺼내보며회상에잠기는화자(「장롱안사랑」)의모습에서도여실히형상화되고있다.

시린꿈의숫눈을밟고온길

이시집의맨마지막에수록된다음작품은시인의삶을압축적으로제시하고있다.따라서시집의표제이기도한「눈길」을살펴보자.

숫눈을밟는다
산기슭쭈뼛쭈뼛일어서는바람맞으며
마디굵은흉터남긴소나무처럼
시린꿈의우듬지가자꾸흔들리던겨울

가장추웠던시절이지나가고
내생에서막막했던날들이지나가고
나여기까지는걸어왔구나
새벽의내재율이내몸을감싼다

큰딸로잠든동생들이불을덮어주고
큰며느리가되어혼자서울어야했지
어떤무늬도일렁이지못하고입다문물병속에선
푸른물소리출렁이는데

항상파리한낮달이결빙된하늘에
보이는듯안보이는듯떠있었지

숫눈이나를밟는다
꿈결처럼나를다녀간이길을
한번은걸었던것같기도하고
영영처음걷는길인것같기도한
미몽의새벽이면
발자국이내생애를밟는다
-「눈길」전문

화자에게‘눈길’은큰딸과큰며느리로살아온생애의통점,그트라우마를의식의표층으로끌어들이는공간이며그것은“시린꿈의우듬지가자꾸흔들리던겨울”이라는시간과함께존재한다.‘숫눈’은눈이내려쌓인후아직아무도밟지않은눈이다.모두가잠든새벽에내려서쌓인다는점에서혼자눈물을삼켜야만하는큰딸과큰며느리의성정과유사하다.요즘은많은것이변하고있지만,예전의가족제도에서‘큰아들,큰딸,큰며느리’등‘큰~’자가붙은존재들은다른사람에비해더무거운기대감속에서심적부담에짓눌린채살아가야했다.이런역할을하나만하기에도버거운데,화자는살림밑천이라고부르던‘큰딸’에,시부모님을모시고살면서다른며느리들의형님노릇을해야하는‘큰며느리’의역할까지맡았으니그부담감은상상하고도남음이있다.대식구들이모이는‘명절’과같은전쟁을한바탕치르고나면큰며느리는드러누울수밖에없을정도로정신적·육체적힘겨움에시달려야했으니말이다.그러므로속울음을삼키며새벽녘에숫눈을밟는정경은이런삶은수용해야만하는화자의모습이기도하다.
“가장추웠던시절”과“생에서막막했던날들”을지나힘겹게도‘여기까지는’걸어왔음에화자는안도의한숨을내쉰다.“입다문물병”과보이는듯안보이는듯떠있는“파리한낮달”은큰딸,큰며느리로살아온화자의객관적상관물이다.하여결말부분의“숫눈이나를밟는다”와“발자국이내생애를밟는다”라는언사에는철없는동생들을다독거려야했던큰딸,혼자속울음을삼켜야했던큰며느리로보낸세월에대한자기연민이스며있다.
나지막하지만흡입력있는황형자시인의시는진정우리가무엇을소망하고살아가야하는길을시인의길로잘보여주고있다.이런맥락에서강진의자연환경과삶,그리고자아와세계를둘러싼시인의진솔한메시지들은우리시의서정적휴머니티라는질감을고양하는데에기여할수있을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