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을 심다 - 황금알 시인선 307

연을 심다 - 황금알 시인선 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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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홍매화의 만개를 묘파한 시다. 홍매화가 아니라, 벚꽃이라고 해도 좋다. 시인은 이것을 소신공양으로 비유한다. 불 속에 스스로 몸을 태워 자신의 몸을 바치는 것. 불교에서는 가장 극단적인 죽음이다. 홍매화, 벚꽃 등의 모든 꽃은 마침내 지고 만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런 꽃들의 낙화는 불교적 죽음의 비극적 황홀처럼 느껴진다. 홀로 앉아서 자신의 몸에 불을 사르는 고승의 고행의 상처럼 말이다.
이 고행의 상에는 인간의 비애 및 고독마저 초월한다. 꽃의 피고 짐을 불꽃 속에서의 죽음으로 비유한 것을 보면, 낙화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죽음 중에서도 가장 덜 고독한 죽음, 가장 덜 비애적인 죽음, 아니 무(無)로 회귀하는 우주적 죽음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바슐라르는 자신의 저서 『불의 정신분석』에서 사람들에게 불이 모든 것을 정화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고 보았다. 주지하듯이 불은 빛을 뿜어낸다. 그에 의하면, 불빛이 하나의 상징인 동시에 순수성을 대리하는 물질이다. 이 물질적 상상력은 사람들을 생각의 심연으로 빠지게 한다. 불이 빛을 발할 때, 사람들은 난로의 불 가에 앉아 고독하게 사색에 잠긴다.
- 송희복(문학평론가)

저자

우정연

저자:우정연
전남광양에서태어나2013년『불교문예』가을호로등단하였다.
시집으로『송광사가는길』『자작나무애인』이있고,제7회불교문예작가상을받았다.

목차

1부

가을문턱·12
고생이라는말·13
괜찮다·14
길고양이놀기좋은오후·15
기울어진다는것·16
꿈틀꿈틀,꿈을틀다·18
등짐·20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21
먹심·22
고르는일이란·24
오후,푸른날개돋다·25
입학다완立鶴茶·26
그대가주인―수처작주隨處作主·28
조혼早婚·29
토굴土窟·30
풀꽃의미·31
평상심,건져올리다·32
한여름낮의피서록·34

2부

그리움은땅을뚫는다·38
네잎클로버·39
나무화석·40
녹아내린다·42
누운주름꽃·44
대숲의시간·45
모란이피고지는사이·46
목화꽃벙그는밤·47
뭇꽃보다그대·48
본색을드러내다·49
봄볕에핀해바라기두송이·50
비밀정원·51
상강아침·52
새깃유홍초·53
히말라야오로벨·54
손톱을자르는남자·56
여름,동백꽃피다·57
화살나무단풍·58

3부

납월홍매·60
서있다는것·61
사랑,그거별거아니더라·62
성스러운기운·63
노숙막사발대접하기·64
먹대·66
살속에박힌씨앗·68
연을심다·70
세상속으로스며들다·71
압해도,아기동백꽃아말문을열어다오·72
여자만달·74
열화정기와지붕위동백은푸르고·76
화사花蛇,화사華死·77
지척지간咫尺之間·78
팽나무그림자·80
풍경소리·82
힘든일·84

4부

소신공양燒身供養·86
너덜범종·87
통通·88
금동여래좌상앞에오른무릎을꿇고앉아·90
금와보살죽비·92
눈물한방울차·94
대자보大慈報·96
능견난사能見難思·98
방생·99
방생2·100
사사불공事事佛供·101
이름바위·102
자장동천연리목·104
운주사와불·106
열반종涅槃鐘·107
향기보시·108
와온낙조·109

해설|송희복_땅의상상력과,스며듦의몽상·110

출판사 서평

땅의상상력과,스며듦의몽상
송희복(문학평론가)

1
우정연의시들을내처읽으면서,나는가스통바슐라르의명저로손꼽히는『대지그리고휴식의몽상』(1948)을생각하지않을수가없었다.인간의역사는땅의역사다.땅을기반으로해삶의터전을마련하고,또이것을다져간다.땅도흙으로된땅이었다.땅에도흙으로된땅이있고,시멘트바닥으로된땅이있다.도시인들은흙땅을밟지않고살아간다.시골사람도마찬가지다.다만시골사람들중에서도농사짓는사람들만이흙땅을밟고사는특권을향유한다.오히려흙땅을밟는것이특권이되는시대다.국어사전에‘흙땅’을등재된낱말로아직도대접을해주지않을만큼,그동안푸대접을받아온것이흙땅이다.
바슐라르는시골사람이었다.가계도변변찮은서민출신이었고,프랑스의엘리트코스인소위‘그랑제콜’을나온것도아니었다.시골에서과학교사를하다가학생들의상상력을죽이는교육에환멸을느끼고물질적상상력의이론을계발해20세기프랑스최고의문학이론가가되었다.그의물질적상상력은땅과물과불과공기로환원되는질료였다.『대지그리고휴식의몽상』은『대지그리고의지의몽상』(1947)을이은흙땅상상력이론의놀라운비평적업적이요,사상적결과물이었다.이를염두에두고우정연의시편「모란이피고지는사이」를읽으면뭔가감이잡히는듯하다.

꽃밭에자갈고르고흙을북돋는다사이사이이랑만들어
모란몇촉,사이좋을간격으로자리잡아주었다
(……)
모란이피고지는눈물의시간
별똥별떨어지고소우주하나생겨나는,차마어쩌지못하는사이

-「모란이피고지는사이」부분

꽃밭을가꾸는일,모란을심고키우는일은공간을만들어서시간을관리하는자연의작업이다.이시에서의이른바‘사이’는공간의틈새이기도하지만시간의연장선이기도하다.이연장선은모란이피고지는일을반복한다.모란이한번피기까지소우주가하나씩이생겨난다.우정연의시에는소우주라고한시어가몇몇적혀있다.
가스통바슐라르는대우주와소우주,그러니까자연과인간,아니면밤낮으로바뀌는명암의하늘과작은텃밭이라고하는이분적인사유나몽상이모든변증관계를설명하기에더이상충분하지않을수없다고말했지만,그의대지의상상력은마침내‘대우주-소우주’의행복한상응관계로귀결하고있다.이글에서자주쓰는용어인몽상(reverie)은꿈그자체가아니라,마치꿈을꾸듯이생각하는것을말한다.그러니까현실적으로이루어지지않은생각이다.물론그렇다고하더라도,몽상은현실을넘어서는힘을가진다.이힘이상상력이다.그것은정신분석에서말하는욕망이나소원충족과는미세한차이가없지않다.

붉은벽돌색고무통에진흙을반쯤채우고연을몇뿌리묻었다
나는연의집에샘물찰랑찰랑부어놓고날마다주변을서성거린다
줄기가진흙속에서햇살을먹고하루새끼손가락한마디만큼오른다
손바닥만한잎들,위로무성하니얼마후엔고운꽃볼수있겠지
연을심으면서바닥에그윽한마음함께심어놓았을까,흙속에서
연들이든적도난적도없는향기를머금어통통하게살을채운다
진흙을뚫고오르는푸른연잎도세수했는지말끔하다

-「연을심다」전문

시편「연을심다」는연을심고키워가는과정을잘보여주고있다.화자는고무통에다진흙을채우고연뿌리를심었다.여기에서연의뿌리는전술한바뱀의이미지와등가의상관물이된다.대문자S는진흙속에뿌리를내리는형상이야말로뱀이기어가는형상처럼살아움직이는것같다.사람들의인생살이도뿌리처럼,뱀처럼얽히고,설키고,꼬이고,칭칭감긴다.뱀과뿌리는지탱하는힘인동시에,찌르는힘이기도하다.이런점에서도엇비슷하다.다만,뱀의이미지와뿌리의이미지가유사하지만,차이가있다면동물과식물이지닌물성의차이라고할수있다.
연의줄기는진흙속에서햇살을먹고한마디씩오른다.해바라기가해의움직임에따라,달맞이꽃이달의움직임에따라움직이듯이,연의줄기역시소위‘태양감응(heliopathie)’에서자유롭지않다.흙속에뿌리를내리는만큼,지상에서는연꽃을활짝피워간다.연꽃이활짝피는것은후술하겠지만불(꽃)의이미지로전이된다.연꽃의고운색은불의현현(顯現:epiphanie)이며,연꽃은빛의실재(본질)가된다.

시인의말

때론울음을건너듯
말을지켜야할때가있다
긴겨울입을다물어
그견딤연초록빛눈으로온다
시멘트바닥에서도씨앗이었던그들
오래물기젖어촉촉하니
외길로걸어온삶의출구다

거친바람도기다림의다른몸짓이라
결코,흔들거리지않았다

2024년겨울延迂亭에서
禹政延合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