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녑 (박수현 시집)

처녑 (박수현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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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사라지는 것들은 아름답지만 슬픔을 준다. … 이 시집의 시편들은 슬픔과 아름다움의 중첩을 실현하고 있다. 메아리로 들려오는 사라지는 것들의 소리는 아름답게 울린다. 그것은 둘둘 말려 응축되어 숨어 있었던 기억을 펼치면서 울리는 소리다. 기억으로 응축된 삶을 펼쳤다 접는다는 건, 삶의 시간들이 주름져 있기 때문이다. 아니, 박수현 시인은 ‘세상’ 자체가 주름져 있다고 생각한다. 주름이 그가 지닌 형이상학의 핵심 이미지다. … 시인이 정육점에서 산 ‘서너 근’ 처녑에는 “갈무리된 전 생애의 중량”(「처녑」)이 담겨 있다. … 처녑은 ‘울음의 겹’과도 같은 것이었다. 시인은 이 ‘울음의 겹’이 우리 사람에게도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는 그 처녑 같은 “울음의 겹 안에 들어가 본 적이 있다”고 하지 않는가. … 그 ‘울음의 겹’은 시인이 살아왔던 주름진 시간들이다. 기억을 통해 펼쳐질 접혀 있는 과거의 시간들. 처녑을 “씹을수록 싱싱해지”듯이, 자신의 기억을 씹으면 생생하게 그 시간들이 펼쳐질 것이다. 울음소리를 내며, 아름답고 슬프게. 박수현 시인에게 시 쓰기란 그렇게 기억을 천천히 씹으면서 살아온 삶의 시간들을 펼치는 작업이지 않을까.
- 이성혁의 해설 「주름의 기억」 중에서

보통 사람은 시력詩歷이 늘어감에 따라 욕심도 커지기 마련이지만 박수현의 겸손과 중용의 의태意態는 늘 함께하는 사람들에게 모범적이다. 굳이 이런 말을 꺼내는 이유는 이 시집의 모든 글이 곧 그녀이고, 그녀의 生이 곧 시집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삶의 ‘주름과 기억’을 시인이 어떻게 되새김하고 있는지는 이성혁 평론가의 멋진 해설을 탐독하면 될 터, 나는 단지 그 주름을 만들어낸 원천적 심상에 쓸쓸한 눈길이 간다. 시집 전체를, 혹은 그녀의 중심을 관통하고 있는 ‘상실’의 이미지가 바로 그것이다. 이미 잃어버리고 없는 것, 그리고 곧 잃어갈 것들이 그녀를 지탱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가령, ‘도난당한 나’라든가 ‘금이 간 유리’라든가, 낡아가는 ‘묵헌종택’ ‘돌아가신 어머니’나 ‘오탁번 선생’ 등. 그러니까 지금 그녀의 걸음에 동력이 되는 것은 실상 ‘상실’인 셈이다. 이런 아이러니가 읽는 이의 마음에도 가닿았으면 한다. 흔들림에 맞서 詩에 대한 열정을 버리지 않는 시인께 경의를 표하며, 슬픔이 어떻게 주름이 되는지, 그리고 그 주름이 어떻게 기어코 다시 우리를 일으키는 힘이 되는지, ‘아코디언처럼 접혔다가 수평선처럼 쭈욱’ 펼쳐질 그녀와 우리의 미래를 지켜볼 참이다. 아, 첨언 한 마디, 시가 너무 길어지는 시절에 곳곳에 놓인 짧은 시들이 ‘납매臘梅 한 포기’처럼 눈길을 끈다. 요런 수작秀作들만 모여 있는 또 한 권의 시집을 기다려 본다.
- 천서봉(시인·이마건축사무소 대표)
저자

박수현

경북대구에서태어나경북대학교사범대영어교육학과졸업.
2003년계간시지『시안』으로등단.
시집『운문호붕어찜』『복사뼈를만지다』『샌드페인팅』과
『티베트의초승달』등3권의연합기행시집이있음.
제4회「동천문학상」수상.
2011년서울문화재단작가창작활동지원금수혜.
2018년한국문화예술위원회아르코창작기금수혜.
2025년서울문화재단원로예술인창작기금수혜.
현시인협회중앙위원및한국디카시서울양천지회회장.

목차

1부

강릉·10
칠월·11
처녑·12
무한계단육면체·14
등·16
미음·18
나팔꽃·19
납매臘梅·20
새장·21
똥을위한사소한반성·22
지금·24
누가나를이숲에혼자세워놓았나·26
김치전·27
돌의자·28
빨강을고백하다·30
파본破本·31
주름들·32
꽃기린·34
천년수담千年手談·36
보라를헹구다·39
그집·40
칼레이치의유리창·42
산딸나무·44

2부

슬픈알리바이·46
기별·48
슈바비슈할중세인형박물관·50
우물,십일월·52
사춘기·54
우산·56
처서處暑·57
자술연보·58
소행성B-612·60
묵헌종택·61
피팅룸·62
벚꽃유감有感·64
예후豫後·66
능소화·67
쥐똥나무·68
앵두·70
시집詩集·72
그·73
구멍가게·74
텀블위드·76

3부

이른눈·78
섬·80
묵언默言·82
중이염·83
두루치기백반·84
흉터·86
나팔꽃·87
그남자·88
그냥그렇다는말이다·90
동지·92
적막의둘레한뼘·94
창문잎사귀들·96
차경借景·98
신행오는날·100
남산돌부처·105
무인옷가게,압구정·106
김치밥국끓이는아침·108
로즈힙·110
산양유요구르트·111
늪·112
버슨분홍으로저렇게봄날은가는데·114
나비국수나무·117

해설|이성혁_주름또는기억을위한음화와양화·118

출판사 서평

주름의기억

이성혁(문학평론가)


박수현시인의네번째시집『처녑』원고를정독하고서좀숙연한마음이들었다.단어하나하나를어떻게공들여선택하는지,그렇게선택한단어들을엮어문장하나하나를어떻게정밀하게만들어내는지느껴졌기때문이다.사실내가모르는단어들이나와서놀라기도했다.얼마나많은한국어단어들이사라지고있는가.박수현시인은어떤사명감을가지고시를쓴다는생각이들었다.죽어가는한국어를되살리고자하는열정,시의본령을지키고자하는뚝심같은것을갖고있는시인.그런데시인자신이바로「시집」이라는시에서자신의시집이어떻게만들어진것인지밝히고있어서주목된다.이산문시내용은이렇다.알라딘중고서점에갔더니그의세번째시집「샌드페인팅」을발견했다는것.그시집앞에“이름이서명된페이지는찢겨나갔다”고.즉시인이직접보내준시집을누군가중고서점에판것이다.시인은이시집에실린육십여편시중에서“눈맞출만한시는한편도없던터였겠다”며씁쓸해하면서이시집을사들고집에온다.그리고다음과같이쓰고있다.

시집의‘집(集)’자는나무위에새가앉은형상이라는데그는종종거리며슬프고안타까운새의낌새조차알아채지못한것이리라새들이애면글면날아가나뭇가지하나물어오고다시또물어오며알뜰히쌓아올렸을집한채,나는새한마리깃들지않은나의폐갱廢坑같은새집에게미안해졌다그날오후,그해내몸과영혼의구석진곳샅샅이아침에도울고저녁에도울었을새들을생각하며,내가여운새집을오래된아궁이불씨뒤적이듯뒤적거릴따름이었다
-「시집詩集」후반부

박수현시인은한자‘集’자가“나무위에새가앉은형상”이라는데서착안하여시집을새집으로비유한다.새들이“나뭇가지하나물어”와서“알뜰히쌓아올”린것이시집,자신의시집도역시그렇게만들어졌다는것이다.그집안에는새들이살고있다.「샌드페인팅」을판사람은이“슬프고안타까운새의낌새조차알아채지못”했던것,그시집은“내몸과영혼의구석진곳샅샅이”아침저녁으로울고있는새들을찾아내집에데려와만든것이지만,누군가에겐‘폐갱’같이되어버린시집이된것이다.필자에게는이시가인상적으로읽혔다.박수현시인이시를어떻게쓰고시집을어떻게생각하는지엿볼수있었기때문이다.그는한땀한땀정성들여바느질하여옷한벌을지어내듯이(시집을읽어보면알겠지만,시인의어머니도옷을만들어팔아식구를먹어살렸던것같다)시를쓰는사람이며,그시쓰기는단순히아름다운언어를찾아내엮는것이아니라영혼의깊고구석진곳에있는울음을끌어올리는작업이라는것을말이다.
우리가읽은이시집에는어떤울음이담겨있는가.시집첫머리는보통그시집의시세계를대표해주는시가실리곤한다.이시집의첫머리에실린시는「강릉」이다.“일년만에당도”한편지의내용을말해주는시다.그편지속엔무엇이있었나.어떤소리만,“해식애海蝕崖너머알수없는곳으로부터와서괭이갈매기무수한울음너머알수없는곳으로사라지는내청춘의휘파람소리”만실려있었다고한다.이시집의주된주제가바로이사라지는청춘의휘파람소리아닐까.그소리는새-괭이갈매기-의울음소리의이면에스며들어있다.다시말해시가내는울음소리뒤에는사라져가는청춘의기억이숨어있는것이다.이휘파람소리를박수현시인은“파도에닳아조금씩없어지는모래펄의낯선발자국같은”것이라고말한다.이제낯설게보이는,게다가조금씩사라져가고있는,이제“황폐한별자리처럼자꾸어두워지는”청춘의기억들이이시집의새울음같은시편들에는스며들어있는것아닐까.하나그렇게사라져가는기억들이지만그것들은“내청춘의불온하고아름다운파일들”이라는것임을시인은느낀다.지금붙잡으려고해도붙잡을수없는기억들이지만,그것들은아름다움을진하게남기며사라지는것이다.
사라지는것들은아름답지만슬픔을준다.괭이갈매기의울음소리로시가표현되는것은시인이슬프기때문이다.하여이시집의시편들은슬픔과아름다움의중첩을실현하고있다.메아리로들려오는사라지는것들의소리는아름답게울린다.그것은둘둘말려응축되어숨어있었던기억을펼치면서울리는소리다.다시말해기억저구석진곳에웅크리고있었던기억들이펼쳐지며사라지는소리가‘새-시’가내는아름답고슬픈울음인것이다.「우산」에서박수현시인은“접었다다시펼치는/추억같은것”으로우산을정의하고있는바,접혀져있던주름진기억들이팽팽하게펼쳐지는것이추억이며이추억의메아리가그의시인것이다.“젊은그때를펼쳤다/다시접는”시는“망가진살대밑에”있는“살짝은밀”하거나“살짝부끄러운”비밀을은근히드러낸다.이러한펼치고접는행위는“사소한슬픔”을불러낸다.추억을펼치고접을수있는‘우산’은시와같다.시는추억을아름답게펼치지만그추억은사라질-접힐운명이다.그리고그운명은시를슬픔으로젖어들게한다.
기억으로응축된삶을펼쳤다접는다는건,삶의시간들이주름져있기때문이다.아니,박수현시인은‘세상’자체가주름져있다고생각한다.주름이그가지닌형이상학의핵심이미지다.「주름들」에서그형이상학이펼쳐진다.시인은동사무소에인감떼러갔는데“피부주름인지문”이지워져지문인식기가“나를읽어내지못했다”면서시적사유를전개한다.세상은주름으로이루어졌다고그는생각한다.“세상은차라리주름의촘촘하고슬픈서사”이며“산맥의능선이나계곡은땅의주름”,“사막의사구는바람의주름”이고,“해안의파도는물의주름”이라는것이다.자연뿐만이아니다.“아코디언,오르간같은악기”도주름을원리로음을발한다.시인은“하늬바람이나빛광자광풍光風은어여쁘게주름진바람의맑은아미”라는아름다운이미지도생각해낸다.그리고우리‘호모사피엔스’의‘삶의행려行旅’역시“고사목껍질처럼딴딴한주름을등고선처럼가슴에새기며어느해변기슭에서쓸쓸히좌초되기마련”이라는운명을지니고있다.그리고죽음은이“다랭이논처럼이어지며흐르는주름사이로/물새떼가날아”갈때,“빛과어둠이서로의주름을바꾸며나부”낄때현현한다.이주름의세상을살아가는주름진삶을,그야말로육신자체로드러내는것이소의‘처녑’이다.「처녑」은“천장의잎새라는뜻”의‘처녑’-소의세번째위장-에대한시인의‘이미지-사유’가깊이있게펼쳐지는시다.

여름나기로단골정육점에서처녑을샀다
소의세번째위장인처녑은
천장의잎새라는뜻이랬다
검정비닐봉지에싸인채서너근으로
갈무리된전생애의중량
밀가루를묻혀아코디언같은주름을치댄다
위장하나다스리는일이
첩첩산중만경창파를이고넘는것같다는데
어쩌자고이초식성짐승은
깊고어둔위장을네개나붙잡고있는걸까
쇠뜨기,둑새풀의독하고푸른숨결과
매미의울창한울음과
마지기마지기쏟는작달비를오래되새김질했겠다

질기고무더웠던여름날을견뎌내느라
크고순한짐승의위장같은
울음의겹안에들어가본적이있다

처녑한젓가락을기름장에찍는
적막한허기의저녁,
씹을수록싱싱해지는천장의이파리가
가망없이몸을뒤집는다
-「처녑」전문


시인이정육점에서산‘서너근’처녑에는“갈무리된전생애의중량”이담겨있다.소가살았을그고난의삶의시간들이“천장의잎새”로차곡차곡몸에새겨져“아코디언같은주름”이만들어진위장이그것이기에.그처녑의주름은소가몸으로받아들였을“쇠뜨기,둑새풀의독하고푸른숨결과/매미의울창한울음과/마지기마지기쏟는작달비를오래되새김질”한시간들이중첩되고중첩되면서형성된것이다.그것은‘울음의겹’이다.이“크고순한짐승”인소는자신의슬픈운명을알고삶을살았을터,그래서더욱모든존재자들을허투루대하는것이아니라몸으로받아들이며오래되새김질했던것이다.그렇게되새김질할수록슬픔은더욱짙게처녑에고이게되었을터,하여처녑은‘울음의겹’과도같은것이었다.시인은이‘울음의겹’이우리사람에게도있으리라고생각한다.그는그처녑같은“울음의겹안에들어가본적이있다”고하지않는가.그것은자신안의‘울음의겹’일것이다.타인의‘울음의겹’속에들어간다는것은정말어려운일이다.적어도자신안의‘울음의겹’은직접적으로대할수있고그속으로들어갈수도있는것이다.
그‘울음의겹’은시인이살아왔던주름진시간들이다.기억을통해펼쳐질접혀있는과거의시간들.처녑을“씹을수록싱싱해지”듯이,자신의기억을씹으면생생하게그시간들이펼쳐질것이다.울음소리를내며,아름답고슬프게.박수현시인에게시쓰기란그렇게기억을천천히씹으면서살아온삶의시간들을펼치는작업이지않을까.

박수현시집『처녑』은언어의뿌리와존재의주름을더듬는시인의내밀한여정이다.시인은사라지는한국어를되살리고,언어의생명력을회복하려는사명감으로시를쓴다.「시집」에서그는자신의시집을‘나무위새의집’으로비유한다.새들이가지를물어다쌓듯,시인도영혼의울음을모아시집을만든다.그러나그것이중고서점에팔린이야기를통해,시인의시가세상속에서얼마나외롭고고독한존재인지를드러낸다.

시집의첫시「강릉」은‘사라지는청춘의휘파람소리’를통해상실과기억의정서를제시한다.괭이갈매기의울음,파도에닳은발자국같은기억은모두지나간청춘의흔적이다.이휘파람은시인의내면에서되살아나는울음이며,그울음이곧시의본질이다.

시인은세상을‘주름’의형상으로본다.「주름들」에서그는세상과인간,자연을모두주름으로구성된존재로인식한다.땅의능선,사구,파도,그리고악기의주름이모두생명의흔적이된다.대표작「처녑」에서는소의세번째위장을통해이러한주름의형이상학을구현한다.‘천장의잎새’같은위장은생의기억과울음이중첩된공간이다.시인은이‘울음의겹’속으로들어가인간존재의깊은정서를응시한다.

시의세계는개인적기억으로확장된다.「납매」에서는함박눈속에서잃었던어린시절과첫사랑이되살아난다.납매는겨울속에서피어나는순수의상징이며,시인은무의지적기억의방식으로과거의삶을불러낸다.이러한기억은‘주름진시간’으로존재하며,「김치밥국끓이는아침」에서는가난한시절어머니의밥국냄새로되살아난다.가난과모성의기억은따뜻하면서도서글픈정조로남는다.

후반부의시들은상실과병,그리고치유의과정으로이어진다.「예후」에서시인은병든몸의고통속에서봉합되지않는상처와기억의파도를마주한다.그러나「창문잎사귀들」에서는구멍난몬스테라잎을통해빛을나누는존재의아름다움을발견한다.기억의상처가상상과교감으로전환되는지점이다.

마지막시「지금」에서시인은얼어붙은과거를‘찌개냄비에붓고끓이는’행위로표현한다.과거와현재,미래가뒤섞인‘지금’의시간속에서시인은새로운삶의리듬을찾아낸다.냉동된기억이해동되어일상의순간으로살아나는것이다.

결국『처녑』은주름진삶의기억을시로되새김질하는여정이다.그주름속엔슬픔이,그러나동시에존재의깊은아름다움이깃들어있다.박수현의시는기억의울음을품은언어이며,사라져가는것들의아름다움을‘지금여기’에되살려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