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팍팍하고 생은 울컥한다

삶은 팍팍하고 생은 울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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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김연종 시인의 외면은 시류를 따라가는 듯 범속해 보이나 사실 그의 내면은 일상의 탁류를 증류하는 추상의 물결로 일렁인다. 걸쭉한 해학과 날랜 재담의 행간에서 그의 유심은 변방의 지장(知將)처럼 삶의 경계선 너머를 날카롭게 응시한다. 의학 용어와 철학 개념이 무시로 의식의 문턱을 넘나드는 가운데 그의 안팎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이어져 끊임없이 뒤바뀌는 양상을 드러낸다. 시집 곳곳에 등장하는 대구(對句)는 종종 경구적 함축미를 띠면서 그의 지적 추동력을 발현하나 그의 언어는 예지가 번득이는 방식에서보다 해묵은 욕구가 꿈길을 헤매는 방식에서 더 곡진하게 매력적이다. 몸짓이 언어를 능가하는 문장의 행간에는 결핍에 허덕이는 소년의 순수가 땅거미처럼 너울거린다 . 그의 시적 열정은 극락강과 화정동 인근에서 약관의 나이에 이립(而立)한 후 생의 정점에서 인류의 가능성과 한계를 내다보는 출사의 변을 토하다가 이제 이순(耳順)의 변곡점을 지나 운명의 길이 일으키는 현기증을 앓고 있다. 출발점과 종착점이 수시로 교차하는 김연종의 시는 그의 시적 경력이 외길에 가까운 것이었음을 알려준다. 그 길은 처음부터 무한을 향해 뻗어 있었으므로 막다른 골목은 언제나 새로운 길에 대한 허기를 일으켰을 듯하다. 왜, 라는 물음으로 살아가는 서울의 자라투스트라는 문학의 신기루를 좇는 사람이 더는 아니다. 김연종 시인은 현실을 직시하면서 어떻게 그 부조리와 불협화음을 사랑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사람, 생을 초월하기보다 견뎌내는 데서 초인의 정신을 찾는 사람이다. 시인의 운명은 꿈과 좌절의 영원한 반복이라는 형벌 속에 있는지 모른다. 영혼의 흉터 조직이 갈수록 단단해져 가는 즈음에서 김연종 시인은 어떻게 시지프스의 운명을 긍정할 수 있을까, 어찌 시를 붙들고 씨름할 수 있을까, 시에서 어떻게 용기와 행복을 구할 수 있을까, 쉴새 없이 반문하고 있다. - 양균원(시인·대진대 영문과 교수)

김연종은 의사이자 시인이고, 시인이자 의사이다. 따라서 ‘시집’과 ‘청진기’는 사실상 사내를 구성하고 있는 두 개의 자아인 셈이다. 그것들은 논리적으로는 구분되지만 실제로 분리할 수는 없다. …… 하나의 신체에서 공존하고 있는 ‘시인’과 ‘의사’라는 두 개의 자아를 화해시키는 일은 쉽게 해결되기 어렵다. 두 자아 둘 모두를 긍정하면 타협이 가능하지만, 그 경우에도 ‘시인 의사’와 ‘의사 시인’ 가운데 어느 쪽이 적확한 표현인지 의문은 남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경계인 의식, 그러니까 두 영역 모두에 속해 있으므로 정작 어느 한 세계에 온전히 포함되지 못한다는 의식은 김연종의 시의 한계가 아니라 특이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한계가 아니라 시적 발화의 조건이다.
- 고봉준(문학평론가)
저자

김연종

저자:김연종
1962년광주(光州)에서태어나전남대학교의과대학을졸업했다.2004년『문학과경계』로등단하여작품활동을하고있다.시집으로『청진기가라사대』『히스테리증히포크라테스』『극락강역』이있고산문집으로『닥터K를위한변주』『돌팔이의사의생존법』이있다.한미수필문학상과보령의사수필문학상을수상한바있으며제3회의사문학상을받았다.2018년아르코문학창작기금을수혜했고2022년<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지원사업인우수출판콘텐츠에선정되었다.한국작가회의회원이며<한국의사시인회>운영위원과문학모임<작당>회원으로활동중이다.

목차


1부오이디푸스나무그늘아래서설핏잠들었다
디폴트·12
파놉티콘·13
오이디푸스나무그늘아래서설핏잠들었다·16
호스피탈로피테쿠스·17
코로나블루·18
비만을연구하는비만의사·20
미완성진단서·22
좌뇌형인간우뇌형인간·24
메나키·26
메노포즈·27
상자의세계·28
삶은팍팍하고생은울컥한다·30
폐업직전늙은의사의진료실풍경·32
뼈를묻다·34

2부이제는집으로돌아가야할때
악어새는어디로갔을까·36
사각지대·38
고시원·40
B주류·42
너에게묻는다·44
짜라투스트라의말만믿고·46
이제는집으로돌아가야할때·48
다시극락강역에서·50
길의현상학·52
나에게쫓기다·53
가랑잎처방전·54
시한부와종신형의동거·56
生來美요양원·58
커밍아웃·60

3부악수와포옹
비핵화선언·64
독설·66
뒤집힌팬티·67
돌연변이피타고라스·68
화정동·70
네일아트·72
악수와포옹·74
목도리도마뱀·76
로시난테를빌려타고·78
손금을따라가다·80
두채의집·82
양자역학·84
차명계좌·85

4부허무하거나맹랑하거나
가방들·88
미깡약전·90
범인은바로너·92
어딜도망가?·94
꼬리에꼬리를물다·95
소설을쓰다·96
행운목을기루다·98
중간결산·100
우는법을배우다·102
베이비부머·104
허무하거나맹랑하거나·106
초성퀴즈,너의클리셰·108
ADHD·110

해설|고봉준_어느호모메디쿠스의불안과욕망·111

출판사 서평

어느호모메디쿠스의불안과욕망

고봉준(문학평론가)


김연종의시집을읽다보면불현듯한중년사내의형상이떠오른다.사내는“베이비붐세대”(「베이비부머」)의일원으로태어났다.가난했던유년시절그는송정리역을이용해먼거리를통학했다.이때문에그에게“KTX에정토를내어주고/간간이무궁화만정차”(「다시극랑강역에서」)하는극락강역은유년과광주에대한추억과동일한의미이다.유달리병약했던사내는80년5월광주를목격한후의과대학에진학했고,졸업후에는의사가되었다.첫시집에등장하는“낮게드러누운풀밭사이로더욱몸을낮춰/여시같은역무원의날카로운더듬이를피해야만/극락으로향하는길은있었다”(「극락강역」)라는진술에서알수있듯이‘극락강역’은그를고향과가난했던유년의세계로데려다주는장소이자,“내문학의출생의비밀을간직한”(「다시극락강역에서」)시원으로기억된다.김연종의초기시는‘가난’과‘병마’로기억되는이세계에대한그리움,혹은그곳으로되돌아가려는귀향의식이주조를이루었다. 

한곳에오래머무르다보니단골들이자꾸떠나간다돈벌어떠나고나이들어떠나고이러다가이곳마저문닫는게아니냐며아직못떠난단골들이앞날을걱정한다꼬맹이때떠났다가꼬맹이손을잡고온젊은엄마가여기는어릴적추억이남아있는곳이니제발떠나지말라고애원하며떠난다그녀가떠난빈자리가동굴처럼적막하다동굴속사내는낡은청진기처럼더듬거린다손놀림이더디고심술주머니가도드라진다정수리가휑하고새치가반짝거린다검은머리원숭이가직립의길을떠난다다크서클이두려워땅만보고걷는다검은모자를쓰고진한선글라스를낀다눈썹문신을하고갈색염색을한다진화를거듭한유인원이새단장을마쳤다낡은몸은수선을마쳤지만한번굽은등은곧게펴지지않는다
-「호스피탈로피테쿠스」전문

극락강역을오가던그‘소년’은지금중년의의사가되어“동굴처럼적막”(「호스피탈로피테쿠스」)한“사각의진료실”(「상자의세계」)에앉아“감옥같은일생이/감쪽같이지나갔다”(「파놉티콘」)라는사실을곱씹고있다.김연종시의화자는의사이다.그는자신을호모메디쿠스Medicus나호스피탈로피테쿠스라고소개한다.호모메디쿠스는라틴어로의사를가리키는말이며,호스피탈로피테쿠스는현생인류의조상으로알려진오스트랄로피테쿠스Australopithecus를변형하여만든의사-인간(의학적인간)이라는유사학명이다.그런데김연종의시에등장하는의사화자는우리가상상하는,혹은영화나드라마에등장하는의사와는사뭇다른모습이다.위의인용시는시인이묘사한호스피탈로피테쿠스의초상이다.의사-인간은사람들이끊임없이어디론가떠나가는서울외곽의병원에서“낡은청진기처럼”더듬거리며살아간다.그가일하고있는곳은응급환자로분주하거나쾌적함과화려함을자랑하는그런병원이아니다.진료가끝난환자가떠나고나면병원은‘동굴’처럼‘적막’한곳이된다.그곳에서그는“낡은청진기”처럼변해간다.그는시간이지날수록“손놀림이더디고심술주머니가도드라”지는자신을발견한다.“정수리가휑하고새치가반짝거”리는상태에이른그는“다크서클이두려워땅만보고걷”기도하고,때로는“눈썹문신을하고갈색염색”을함으로써“낡은몸”을수선한다.하지만시간의법칙에서자유로운사람은없으니“한번굽은등은곧게펴지지않는다”.

비자금이꽃비처럼쏟아지면
장미를살까권총을장만할까

내안에여정을마무리하고
또다른세계로떠난다면

장미는알까
권총같은부채를안고
오지않는그날을기다린다는것을

내안에타래를풀려면
시집을펼쳐야할까
청진기를꺼내야할까

고독한타투마저지워지면
어떻게나를증명할수있을까

꽃잎은시들었고가시도무뎌졌는데

-「디폴트」전문


이시는김연종의시가본질적으로실존적이라는사실을보여준다.디폴트default는흔히채무자가채무를이행하지못하는상태를의미한다.시의화자에게‘부채’가“권총같은부채”로인식된다는사실에비춰보면이시에서디폴트가채무불이행이나신용불량을뜻한다고해석할수도있다.그러나이시에서의채무는경제가아니라실존문제이다.빌린돈을갚는일이아니라는의미이다.이시에서화자의채무는“어떻게나를증명할수있을까”라는문제와연결된다.앞의사례와마찬가지로이시의화자를의사화자라고상상하고읽어보자.화자는30년정도의경력을지닌의사이다.하지만그는‘시집’과‘청진기’를나란히놓는존재,즉시인이기도하다.그런그가“비자금이꽃비처럼쏟아”지는일을상상해야할정도의‘부채’를안고있다.여기에서‘부채’는부채감이나부채의식,즉심리적인것이다.이런상황에서화자는자신의정체성에관해본질적인질문을던진다.이질문의형식이바로“장미를살까권총을장만할까”이다.여기에서‘장미’는아름다움또는생명을연상시키고‘권총’은죽음을떠오르게한다.이‘장미’와‘권총’의대립이4연에서는‘시집’과‘청진기’의대립으로변주되고있다.여기에서“내안에타래를풀려면”은자신내부에존재하는마음이표현되는것을의미하므로이는곧‘나’라는존재의본질이‘시집’과‘청진기’가운데어느쪽에가까운가를자문自問하는것이라고말할수있다.
김연종은의사이자시인이고,시인이자의사이다.따라서‘시집’과‘청진기’는사실상사내를구성하고있는두개의자아인셈이다.그것들은논리적으로는구분되지만실제로분리할수는없다.“나의상자는/문학과의학의연리지다”(「상자의세계」)라는진술이이것을증명한다.하지만마음한구석에는‘시집’과‘청진기’모두에대해소임을다하지못하고있다는죄책감이존재하는듯하다.이런맥락에서보면디폴트default는두개의자아가공통으로느끼고있는부채감,즉시인-화자는자신이제대로된시를쓰지못하고있다는사실에,의사-화자는반대로자신이의사로서의책무에충실하지못하고있다는사실에대해느끼는죄책감을비유적으로표현한것이라고말할수있다.김연종의화자들은이들두개의정체가하나의신체에공존하고있음을예민하게인식하고있으며,그렇기에이시의화자또한‘타투’라는표식이지워지면과연그신체가어떤화자의것으로인식될것인지상상하고있는것이다.하나의신체에서공존하고있는‘시인’과‘의사’라는두개의자아를화해시키는일은쉽게해결되기어렵다.두자아둘모두를긍정하면타협이가능하지만,그경우에도‘시인의사’와‘의사시인’가운데어느쪽이적확한표현인지의문은남을수밖에없기때문이다.하지만이러한경계인의식,그러니까두영역모두에속해있으므로정작어느한세계에온전히포함되지못한다는의식은김연종의시의한계가아니라특이성이라고말할수있다.그것은한계가아니라시적발화의조건이다.

길고양이두마리가자동차바퀴밑에엉켜있다불금보다뜨거운소란이지나가고나른한수염처럼고요가밀려온다그곳에닿으려면좁고어두운터널을통과해야한다미등에비친실루엣이납작하다

수입보다지출이더많다

머리숱은줄고배둘레는늘었다
혈압이오르고당수치도간당간당한다

겉은멀쩡한데
내면의몰골은처량하다

감정의찌꺼기가혈관에남아
소소한일상에도뒷목이뻣뻣해진다

조금만관심이떨어져도오금이저리고
신용불량의관절마디엔마찰음이요란하다

잔고장이많아
수시로지갑을보충하고스마트폰을충전한다

사이드미러엔
솔깃한명함이따라붙는다

스킨십의온도가높지않아
사소한격려에도온몸이팔랑거린다

이마와뱃살을어루만져
카톡의프사를다시바꾼다

새벽존엄은사라진지오래

육십갑자에도
조동버릇은하나도버리지못했다
근시안이라마음을살필여유조차없다

적자투성이육신은원래부터약골이었다

-「중간결산」전문


김연종의이번시집에는‘시집’과‘청진기’로표상되는존재의분열만이아니라한인간으로서그가느끼는생에대한불안의감각이진솔하게표현되어있다.가령시인이“나는늘바른사나이라고/외치고다니지만/심장은왼쪽으로치우쳐있다”라고말할때,혹은“바른손으로/밥을먹고글씨를쓰고/남은소변을털어내지만/왼쪽을능멸하는데능숙하게사용되었다”(「좌뇌형인간우뇌형인간」)라고말할때,‘좌뇌’는논리적사고와분석적능력을,‘우뇌’는감정과창의력,즉예술적능력을말하는것이다.‘바른사나이’라고말하지만심장은‘왼쪽’에치우쳐있다거나,반대로‘바른’손으로삶을살면서도그손으로‘왼쪽’을능멸하기도했다는고백에서‘왼쪽’과‘오른쪽’은‘시집’과‘청진기’사이에서의갈등처럼존재의분열이라는의미를갖는다.이런의미에서「좌뇌형인간우뇌형인간」의마지막에등장하는“황색신호에갇혀버린나는/안개등처럼깜빡거리고”라는진술은“길을잃었다”(「허무하거나맹랑하거나」)라는고백과비슷한울림을갖는다.
반면인용시에서느껴지는실존적불안은그것과는층위가다르다.이것은한중년사내의삶에대한‘중간결산’보고서라고말할수있다.여기에서화자는시인이나의사이전에한인간의형상으로등장한다.인간의일생은수많은항목들의비산술적인총합으로이루어져있다.다니엘페나크의소설『몸의일기』에등장하는한구절(“난이제몸에이상한일이생겨도놀라지도않는다.점점짧아지는보폭,몸을일으킬때의현기증,굳어버린무릎,터지는정맥,또다시비대해진전립선,쉰목소리,백내장수술,이명,광시증,자꾸만헐어달걀노른자처럼돼버린입술가장자리,바지입을때의어설픈동작,자꾸만잊고잠그질않는바지앞지퍼,갑작스런피곤,점점잦아지더니이젠일상이되어버린낮잠.”)에등장하듯이일생을산다는것은나이를먹는다는것이고,그것은“신체의존재로서의몸”이활력을점차상실해간다는의미이다.인간의일생이‘몸’의상태로환원되는것은아니지만우리가‘몸’의변화를통해늙어감을인지한다는것은사실이다.이런의미에서‘육십갑자’,혹은일생의‘중간’을넘어섰다는것은‘몸’이젊을때의그것과확연하게달라졌다는의미이다.“의사)50대후반남자,키171㎝체중71㎏BMI32중등비만/비만학회종신회원이며현재비만클리닉을운영하고있음”(「비만을연구하는비만의사」)이라는진술에서알수있듯이이러한‘몸’의변화는의사에게도예외가아니다.요컨대김연종의이번시집은이중적인층위에서한개인의실존적위기를보여준다.그가“내안에타래를풀려면/시집을펼쳐야할까/청진기를꺼내야할까”(「디폴트」)라고질문할때그것은‘시인’과‘의사’로분열된자아의불안을드러낸것이며,“생의조타실에서/어디로갈지모르는게아니라/어디로가지말아야할지모르는게더문제다”(「나에게쫓기다」)라고말할때그것은‘육십갑자’를살았음에도불구하고여전히불투명한삶의방향성을표현한것이라고말할수있다.

늘어진청진기를목에두르고있다
빛바랜와이셔츠에넥타이는매지않았다
하늘색단추가느슨하게풀려있다
출퇴근도휴식시간도명확하지않다
벽시계의초침은미동도하지않는데
진한하품소리가대기실까지전염된다
거식증인지폭식증인지
묻기도전에바람의몸무게를잰다
이제막사랑을끝낸중년부부처럼
이미잠든사람을깨워수면제를권한다
철지난잡지가여기저기흩어져있다
푸른색다이아몬드를찾아
독수리타법으로자판을두드린다
텅빈진료실엔
아직목숨을의탁할만한가벼운안도감이
듬성듬성자리잡고있다

은폐가불가능한새끼고양이수염처럼
자꾸만져도자라지않는토끼인형처럼
만질수록쭈그러드는방울토마토처럼

시詩든것들은모두바람에날리기를원한다

-「폐업직전늙은의사의진료실풍경」전문


이시는실존적관점에서는불안/권태가그린근미래의초상이라고이해할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