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선지우기
저물지않는바다,저물지않는문장
김영탁(시인·『문학청춘』주필)
강정만의산문집『저물지않는제주바다의문장들』을읽는일은제주바다앞에오래앉아있는일과닮아있다.처음에는바다의빛깔이보인다.다음에는파도의결이보인다.조금더오래바라보면,물결위로지나간시간의얼굴들이떠오른다.그리고마침내독자는깨닫는다.이책에서바다는풍경이아니라문장이고,문장은삶을건져올리는그물이며,저자의생애는그그물에걸려드는빛과그늘의집약체라는사실을.
저자는작가의말에서“내삶의‘바다’에서‘문장’을찾아헤맸다”고적는다.이한문장은이산문집전체를여는열쇠다.그는바다를보았고,바다를걸었고,바다를기억했다.그러나이책이단순히제주풍경을예찬하는산문집에머물지않는까닭은,그가바다를외부의자연으로만바라보지않기때문이다.강정만에게바다는자기생의내부에출렁이는근원적장소다.그바다에는유년의가난이있고,여름날검은여의물빛이있고,보리밥과물외의맛이있고,친구들의목소리가있고,문우들의웃음과죽음이있고,문학에대한집요한열망과회한이있다.그는제주바다를쓰는것이아니라,제주바다를통해자신을읽는다.그러므로이책은‘제주바다에서길어올린삶과기억의산책’이며,자연의산문이면서동시에존재의산문이다.
이책의첫번째미덕은장소의구체성이다.성산포,오정개해안,구두미,검은여,범섬,섶섬,법환리,보목동,서귀포,칠십리공원같은지명들은이산문집에서단순한배경으로등장하지않는다.그것들은저자의생애가통과해온정서의좌표다.지명은곧기억의번지이고,바다는곧존재의원적지다.「2023년7월,바다와섬과카페」에서저자는바다와섬을앞에두고삶의변주곡을듣는다.파도는강약을반복하고,섬은바다를향해피아노를연주하는듯하다.이대목에서풍경은곧장음악이되고,음악은다시삶의은유가된다.그는바다를보고“멋있다”는진부한탄사에머물지않는다.바다와섬이품은위로,고독,연민,별리의감각을하나씩꺼내어자기언어로데운다.그래서이책의바다는그림엽서의바다가아니라,오래앓은사람이문득기대는어깨같은바다다.
특히「소년의노스탤지어」는이산문집의정서적원천을보여주는중요한글이다.휴대폰도,텔레비전도없던시절,제주소년들에게여름은곧바다였다.강을모르고개천을몰랐던제주소년들에게바다는여름그자체였고,유년의우주였다.보리밥을양푼에담고,오이를된장에찍어먹고,용천수에몸을담그고,검은여에서물장난을하던기억은가난의기록이면서도풍요의기록이다.물질적으로는궁핍했지만감각은넘쳤고삶은거칠었지만기억은눈부셨다.저자는그시절을미화하지않으면서도,그안에깃든순정한생의에너지를포착한다.개발로용천수가사라지고풍경이변해버린오늘,검은여는더이상예전의검은여가아니다.그러나사라진장소는기억속에서더짙은실재가된다.개발은물길을막았지만,문장은그물길을다시흐르게한다.이것이강정만산문의힘이다.
이산문집에서고향은언제나양가적이다.고향은그립지만마냥아름답지는않다.고향은따뜻하지만때로는무정하다.「고향무정」에서저자는옹기종기살던마을의풍문,장례,연애담,청년들의봉사,가난했던시절의거친호칭과우정을떠올린다.고향은누구의집에숟가락이몇개인지알만큼가까웠던공동체였지만,동시에소문이빠르게번지고개인의삶이쉽게구경거리가되는공간이기도했다.저자는그세계를감상적으로만그리지않는다.웃음과쓸쓸함,정겨움과불편함을함께놓는다.그래서이책의고향은박제된낙원이아니다.그것은냄새가있고,욕설이있고,술이있고,장례가있고,실패한연애가있고,가난한소년들의객기가있는살아있는장소다.
강정만산문의또다른중심축은시간이다.이책의2부제목은「나이와시간,존재의사유」다.여기서저자는칠십이라는나이,세밑의허전함,불면,유혹,죽음,책,밥같은주제를다룬다.그러나이주제들은추상적관념으로흐르지않는다.그는철학적사유를생활의냄새속으로끌어내린다.늙음은관념이아니라몸의변화이며,죽음은사전속단어가아니라주변사람들의부고와밤의불면으로다가오는그림자다.책은고상한정신의상징이면서동시에자존과허영의굴레이고,밥은생의가장낮고도끈질긴위안이다.
저자의나이듦에대한태도는특별히흥미롭다.그는노년을성스럽게포장하지않는다.오히려스스로를향해“근천스럽다”고말하고,“폼잡으랴”살아온시간을자조하며,때로는늙어가는몸과마음을짓궂게바라본다.이자기풍자의감각이산문을살아있게한다.강정만의문장은나이듦을말하면서도늙지않는다.늙음의쓸쓸함을인정하지만,거기에완전히굴복하지않는다.그는노년의복도끝에서서성이는사람처럼말하지만,그손에는아직꺼지지않은등잔이들려있다.그등잔이바로문장이다.
이책의문장은종종회고적이지만,회고에만갇히지않는다.저자는과거를소환하되그것을오늘의사유로다시읽는다.예컨대검은여의여름을떠올릴때,그는단순히“그때가좋았다”고말하지않는다.사라진용천수와난개발의흔적을함께본다.구두미바다의달빛을보면서는한기팔시인의시세계를떠올리고,성산포오정개해안에서는이생진시인의「넋」을듣는다.바다를보는일은문학을읽는일이되고,문학을읽는일은다시자신의삶을되묻는일이된다.이처럼강정만의산문은풍경,기억,문학,인생이서로를비추는다면체의구조를지닌다.
3부「시와문학,읽고쓰는운명」은이산문집의비평적성격을잘보여준다.강정만은대기자이면서,산문가이면서동시에문학독자이고,문학현장에몸담은사람이며,문단의안팎을오래지켜본증인이다.그는글쓰기가얼마나어려운일인지,책읽기가얼마나불편하고도필요한일인지,문학이어떻게허영과자존사이에서흔들리는지를솔직하게말한다.이대목에서그의산문은단순한감상문을넘어문학적자의식의기록이된다.
특히AI시대의문학을다룬글은오늘의문학환경속에서주목할만하다.저자는AI가문장을생산하는시대가왔음을인정하면서도,문학의본령이인간고유의체험과상상력에있음을강조한다.AI가기존의것을조합하고모방할수는있지만,인간이살며사랑하고미워하고용서하며겪은고통의결정까지대신할수는없다는인식이다.이것은단순한기술비판이아니다.오히려문학이왜여전히인간의일이어야하는가에대한물음이다.저자는문학을신성화하지도않지만,문학이단지문장생산기술로환원되는일에는분명한거리를둔다.그에게문학은삶의상처를통과한언어이고,기억의심연에서건져올린결정이다.
「문단은언제부터장터가되었나」에서는문학현장의세속화에대한비판적시선이드러난다.강정만은문단을낭만적공동체로만바라보지않는다.그는문학이사람의이름값,자리,이해관계,허영과뒤섞이는현실을알고있다.그러나그현실을안다고해서문학자체에대한애정을거두지는않는다.오히려그의비판은문학을향한기대와애정이남아있기때문에가능하다.사랑이식은사람은비판하지않는다.아직문학을믿는사람,적어도문학이사람의내면을건드릴수있다고믿는사람만이문단의경박함을견디지못한다.강정만의문학론에는이런쓴맛나는애정이배어있다.
이산문집에서가장깊은울림을주는부분가운데하나는4부「사람과인연,시대의얼굴」이다.여기에는오승철,문무병,신구범,김호,나기철등제주문학과지역사회의여러얼굴이등장한다.저자는이들을거창한기념비로세우지않는다.대신술자리,여행,문학행사,사소한대화,떠나간뒤의허전함속에서그들의모습을되살린다.특히오승철시인을고별하는글과문무병선생영전에바치는글은한시대의문인을떠나보내는마음의기록이다.이대목에서강정만의산문은사적추모와지역문학사의기록사이에선다.한사람을기억하는일은곧한시대의문학적공기를붙잡는일이된다.
문무병에관한글에서저자는그를제주신화와무속연구에헌신한향토학의중요한인물로기억한다.몸은불편했지만언어는또렷했고,문학과제주신화에대한열정은후배들에게방향을가리키는아우라처럼남았다고적는다.이기록은제주문학과제주정신의한계보를보존하려는산문적행위다.지역문학은작품목록만으로이루어지지않는다.그것은함께걸었던길,함께마셨던술,함께나눈말,병든몸으로도놓지않았던열정의기억으로이루어진다.강정만의산문은바로그런비공식의문학사를기록하고있다.
이책을관류하는정조는‘연민과따뜻한성찰’이라할수있다.그러나이연민은무른감상과다르다.저자는사람을쉽게미화하지않는다.자신도,친구도,문인들도,문단도,고향도모두결점과허술함을가진존재로바라본다.그럼에도그는그허술함을버리지않는다.그의문장은불완전한것들곁에오래머문다.늙은친구들,떠난시인들,사라진용천수,개발로변해버린바닷가,책읽기의불편함,글쓰기의난감함,술자리의허무,노년의불면.이모든것은아름답기만한대상이아니다.그러나강정만은그것들을오래오래따뜻한성찰로보듬으므로써,문장의품안에들인다.그때연민은삶을견디는태도로융숭깊은삶과문장이하나로응집한다.
강정만의산문에는익살과비애가함께있다.그는진지한이야기를하다가도불쑥자기를낮추고,장중한문장을펼치다가도농담의고개를넘는다.이리듬은제주바다의물결처럼느슨하면서도끈질기다.어떤문장은문인특유의서정으로흐르고,어떤문장은기자로서관찰의정확성을보이며,어떤문장은문학청년의울분처럼튄다.이잡종성은단점이아니라,이책의개성이다.산문이란본래한사람의호흡이가장직접적으로드러나는장르다.강정만의호흡은정제된단정함만을추구하지않는다.그는때로장광설을늘어놓고,때로비약하고,때로투덜거리고,때로감탄한다.그런데바로그흔들림으로그의산문은살아서움직이고사람의말처럼들린다.
『저물지않는제주바다의문장들』의바다는반복적으로등장하지만,같은의미로반복되지않는다.어떤글에서바다는유년의놀이터다.어떤글에서바다는시인의영혼이머무는장소다.어떤글에서바다는노년의회한을비추는거울이다.또어떤글에서바다는떠난사람들의넋이파도로돌아오는자리다.바다는하나의상징으로고정되지않고계속변주된다.이것이책의제목이지닌힘이다.‘저물지않는제주바다’란실제로해가지지않는바다가아니라,저물어가는생의시간속에서도끝내사라지지않는기억의바다,문학의바다,고향의바다를뜻한다.저녁은오지만바다는완전히어두워지지않는다.문장은그어둠속에서물빛을붙잡는다.
책의후반부에이르면산문집은개인적회고를넘어문학공동체의기록으로확장된다.「시로봄을여는서귀포」「강문신문학관개관」,오사카여행기,서귀포문협문학관탐방기,낭만파모임과송년회기록등은문학이책상위의고독한작업만이아니라사람들과만나고걷고먹고떠들고헤어지는생활의일부임을보여준다.문학은작품속에만있는것이아니라,사람사이의안부와농담,술잔과밥상,여행길과행사장,송년회의어수선함속에도있다.강정만은그현장을빠짐없이챙기는기록자다.그는제주문학의성대한대문보다그뒤편의작은마당을더오래바라본다.거기서문학은제도나명예가아니라,살아있는사람들의기척으로남는다.
이책이독자에게주는감동은결국‘사라지는것들에대한충실한응시’에서나온다.저자는사라지는것들을붙잡으려한다.그렇지만그것들을박물관의유물처럼보존하려하지않고,그는오히려사라짐자체를인정한다.다만사라지는것들이아무말없이없어지도록내버려두지않는다.한번더불러보고,한번더바라보고,한번더문장으로적어둔다.산문은그렇게소멸에맞서는가장인간적인방식이된다.
강정만의산문에서눈에띄는또하나의특징은‘읽는사람’으로서의태도다.그는풍경만읽는것이아니라책을읽고,시를읽고,사람을읽고,술자리를읽고,시대를읽는다.이책에는한기팔,오승철,이생진,강문신,김원욱,정영자,나기철등여러문인의이름과작품이등장한다.저자는그들의문장을자기삶의풍경속에자연스럽게놓는다.인용은장식이아니라대화다.선배시인들의문장은제주바다와만나고,그바다는다시저자의사유를흔든다.이점에서이산문집은제주문학에대한하나의독서록이기도하다.강정만은책을읽으며제주를다시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