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그를늦게불렀다.그러나김윤신은한번도늦은적이없다.그는조금일찍미래로가있었다.
그는전쟁과피란을지나살아남았고,한국현대미술의한복판에섰으며,삶이안정되어가던마흔아홉에문득안정된교수직을뒤로하고아르헨티나로떠났다.낯선언어로둘러싸인이국의땅,야생의나무앞에서전기톱을들었다.그리고아흔을넘긴지금,세계는열렬히환호하며그를다시부른다.새로운시작이다.
2024년베니스비엔날레본전시초청
세계가주목한91세현역
마흔아홉에안정된자리를떠나지구반대편에서전기톱을들고,아흔을넘어세계미술사의호출을받은사람이있다.오늘날불확실성이지배하는세상은불안으로가득하다.‘내가선택한삶이틀린것은아닐까’‘너무늦은건아닐까’‘안정된자리를떠나도괜찮을까’.그런두려움앞에서김윤신은자신의삶으로답한다.아직자기세계를조각할시간은남아있다고.아주충분히.
김윤신은세계가뒤늦게발견한90대현역작가다.1936년생인그는2023년서울시립남서울미술관전시이후2024년베니스비엔날레본전시에초청되며전세계미술계에서새롭게호명되기시작했다.아트시‘2024가장영향력있는작가10인’에선정되고,문화체육관광부보관문화훈장을수훈했으며,2026년에는호암미술관최초한국여성작가대규모회고전의주인공이됐다.구순을넘긴나이에이어진이놀라운장면들은김윤신이‘늦게발견된작가’가아니라오래전부터자기세계를완성해온예술가였음을새삼확인하게한다.동시에많은이들은여전히작업복을입고붓과전기톱을드는그의모습에서,멈췄다고생각한자리에서도다시시작할수있다는힘을얻는다.
너무늦은시작이란없다
마흔아홉,안정된삶을떠나아르헨티나로
1935년원산에서태어난김윤신은일제강점기와한국전쟁의파고를겪고살아남았다.홍익대학교조각과를거쳐파리국립고등미술학교에서유학하고,귀국후엔상명여자대학교교수로부임했다.그러던어느날,그는마흔아홉의나이에안정된교수직을뒤로하고지구반대편아르헨티나로떠났다.
“작업하는데가내나라이고,내고향이에요.”
우람한나무와야생의자연,자유를찾아낯선언어를쓰는땅으로떠났다.그리고그곳에서40여년간오직창작에몰두하며자신만의세계를조각했다.
전쟁과이주,파리와남미의낯선땅의시간을지나
매순간을예술로새기다
김윤신의삶은그자체로드라마다.일제강점기함경도원산에서태어나광복이후에는두만강을건너귀향하며죽음의풍경을지났다.오빠를만나기위해38선을넘어남하하던길에서도,한국전쟁중서울에서전쟁의참상을마주하면서도그는순간순간생의위태로움을통과해야했다.이후아르헨티나에정착한뒤에도낯선환경과현실적인어려움은계속되었지만,40여년간오직창작에몰두하며자신만의세계를만들어갔다.
평탄하지않았지만삶은순간순간이축제였다.그에게는언제나생을향한환희와,어디로튈지모르는엉뚱한에너지가함께있었다.파리유학시절에는이응노와우정을나누고,꼬부랑수염을한살바도르달리를만나겠다며여행을떠났다.교황요한바오로6세와악수한일이신문에실리기도했다.아르헨티나에정착한후에는더기묘한모험이이어졌는데…다채로운삶이마치한편의소설을읽듯생생한장면으로다가온다.
여자둘이살겁니다,앞으로도쭉
‘결혼하지않았지만혼자살지않았다’새로운가족의모양
그는결혼하지않았지만혼자살지않았다.40년이넘는시간동안동고동락한제자김란은그의수양딸이되었다.김란과김윤신은둘이서같이살고있다.스승과제자,가족과동료,생활의동반자라는여러이름사이에서김란은먹는일부터잠자는일까지잔소리처럼김윤신의하루를돌보고,김윤신은작업에몰두한다.아웅다웅잔소리도참견도많은둘의시시콜콜한이야기는아르헨티나에서도산전수전두손꼭잡고통과한다정함의증명이다.
“둘이안싸우셨어요?”
“지금도싸우는데왜안싸웠겠어요.작업하시다왜안주무시냐,그러고싸웠죠.”
(「윤신의별별잔소리꾼과예술가의건강법」중에서)
사실아르헨티나에처음갔을땐씩씩한김윤신도잠시겁을먹었다.그때란이한말.
“선생님,옛날에미술사에남은유명한사람들도다굶으면서작업해서그렇게남았어.제가선생님도와드릴테니까아무걱정말고작품만하세요.”
김윤신은그말을잊지못한다.
“그소리가하늘에서하느님이하는말같이들렸어요.열심히작업을하지않을수가없었어요.”
(「김란의이상한선생님」중에서)
신생아보다무거운전기톱을들고
나무와돌,회화와조각과하나되다
작업실도,재료도넉넉하지않았던시절김윤신은쓰러진나무를주워길거리에서전기톱을들었다.체인과연료를더하면신생아보다무겁고,전기톱은본체만5킬로그램에가깝다.굉음과진동을온몸으로버텨내고위험을감수해야하는이도구는김윤신의손에서나무를쓰러뜨리는기계가아니라조각의도구가되었다.
김윤신에게조각은나무를이기는일이아니다.나무와오래마주하고,쓰다듬고,자르고,깎으며그안의생명을꺼내는일이다.전기톱으로단단한나무를절단하는행위는생명을끊는일이아니라,나무가숨쉴수있는공간을만드는일에가깝다.그가1970년대말부터이어온‘합이합일분이분일(合二合一分二分一)’은두개체가만나하나가되고,다시나뉘며무한히확장된다는예술철학이다.난해한미술용어이기전에,나와나무,나와돌,삶과예술이잠시하나가되었다가다시각자의자리로돌아간다는김윤신의생활철학이다.
멕시코오닉스산지에머물며그라인더로단단한원석을절단하고연마한석조각은목조각과는또다른회화적깊이를보여준다.원석의상태에서는알수없던색과무늬는절단과연마의과정속에서드러난다.파리에서석판화를공부한경험은회화와조각을자유롭게오가는토대가되었고,팬데믹이후에는폐목을결합하고그표면에그림을그려넣는‘회화-조각’으로확장되었다.한국의기억과아르헨티나의색채,자연의형상과종교적상징을한데품은김윤신의작업은한사람의삶이어떻게완전히새로운조형세계가되는지보여준다.
안그라픽스기억총서첫책,
『김윤신,전기톱을든여인』
안그라픽스가새롭게선보이는‘기억총서’는한국예술사에뚜렷한발자취를남긴예술가의삶과작품세계를기록하고기억하는시리즈다.한글의첫자음‘ㄱ’에서출발해‘기억’이라는의미로이어지는이총서는작품만으로는온전히알기어려운예술가의생애를이야기로들려주며인내와영감이공존하는창작의시간을조명한다.낯설고때로는쉽게이해받지못했던길을지나끝내자신만의세계를완성한예술가들의이야기가오늘의독자에게용기를건네고,미래의기억으로이어지기를바라는마음에서이총서는출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