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불꽃

초록 불꽃

$13.00
Type: 현대시
SKU: 9791168554443
Categories: ALL BOOKS
Description
산길에서 보았다. 앞쪽으로 길게 구부러진 줄기가 다시 반대쪽으로 몸을 기울여 나름대로 한참이나 뻗어나간 소나무를. 그러기를 여러 번 반복한 소나무의 잔가지들을. 그런대로 쓰러지지 않을 만큼의 기이한 모습으로 전체적으로 기둥의 균형을 잘 맞추고 서 있었다. 올려다보니 마치 꿈틀대는 생물인가 싶었다. 비늘처럼 보이는 표피는 생장하느라 용트림할 때마다 한 장씩 떨어질 것만 같았다.
소나무가 허공에 길을 낼 때는 우선 자기의 뿌리부터 알아야 했을 것이다. 뿌리의 위치와 너무 먼 방향으로 나갔다가도 다시 돌아와 균형을 맞추면서 다시 위로 올라가는 형상을 취했으므로. 자신의 길을 찾는다는 것은 저토록 몸통이 뒤틀리면서도 바로잡아야 하는 고달픈 과정이리라. 그 길에서 송화 꽃가루 분분하게 날리는 계절을 살며 태풍과 한파의 계절도 맞닥뜨렸으리라.
젊은 날, 나는 고통과 좌절을 겪을 때마다 우선 자신부터 살펴보며 갈 길을 정해야 했음에도 쉽지 않았으며 그것은 길고 지난한 과정이었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온 세월과 회한, 좀 더 빨리 길을 알았어도 가지 못했던 길들이 보였고 성정이 원하던 시詩를 찾아서 뒤늦게 몸담아 안정감이 찾아왔다. 소나무도 저렇게 허공의 길을 뚫고 혼란스런 와중에 찾은 자기의 중심을 아는데, 사람인들 그것을 모르랴.
어느덧, 머리는 희어지고 저 소나무의 우듬지처럼 자연의 흐름에 순응하며 하늘을 바라본다. 나무들도 생장의 길이 달라서 어떤 나무들은 일생을 곧게 뻗어 큰 나무가 된다. 그와 같은 사람은 세상에서 크고 중요한 일을 할 것이다. 그 큰 그늘 아래에서 삶을 안착하는 사람들도 숱하게 있으리라.
오늘, 나는 왠지 산길의 크고 넓은 길을 두고 소로길로 들어서서 저 구부러진 소나무의 정취에 젖는다. 자연의 품에 들어 저절로 들리는 음향, 음악이 없어도 음악 같고 그림이 없어도 그림의 정서를 풍기는 소나무 아래에서 등산에 빨라진 호흡을 가다듬는다. 언틀먼틀한 땅을 딛고 한평생 기우뚱거리면서도 오달지게 자신을 세우며 살아가는 이웃들도 저 모습이 아니랴. 변화무쌍하게 불어오는 경제 한파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알뜰하고 지독하게 살아온, 웃음 많고 인정 많은 친구들과 내 모습 같아서 그 곁에 오래 머물고 싶다.
구부러진 소나무는 어떻게 소나무로서 저렇게 멋진 자태인가, 다시 올려다본다. 어쩌면 태풍과 한파가 소나무를 더욱 소나무답게 하지 않았을까 싶다. 제 몸으로 껴안았던 시련들이 다 한 잎의 나뭇잎이 되지 않았던가. 푸르고 싱싱한 기운을 내뿜으며 성장을 멈추지 않는 소나무의 향기가 살갗으로 그윽하게 스며든다.

언젠가 티브이로 피아노 연주를 감상할 때였다. 연주가 시작되기 전에 젊고 유명한 여성 연주자는 피아노 앞에 앉아서 하얀 손수건으로 차분하게 건반을 닦았다. 화면 속의 관객들도 나도 차분히 그녀의 행동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녀의 연주는 물론 훌륭했지만 건반을 닦을 때의 모습이 오래 잊히지 않는다.
오늘, 설거지를 하면서 그녀를 떠올렸다. 설거지를 하는 매일의 감정은 고르지 않다. 어떤 날은 매양 미뤄두거나 또는 대충 해버릴 심사로 시종일관 설거지를 마친다. 어떤 날은 춤추듯이 몸을 흔들며 반짝거리도록 신나게 닦는다. 때론 설거지하면서 명상에 잠기고, 시의 영감이 퍼뜩, 떠오를 때도 있으며, 정화된 상념이 스르르 찾아와 풀리지 않았던 문제가 저절로 해답을 찾아가기도 한다. 드디어 깨끗하고 반듯하게 정리된 그릇들을 보면 새삼스레 신의 은총인 양 비추는 아침햇살에 감사의 마음이 일어나기도 한다. 아침 설거지는 하루의 첫 음을 쳐야 하는 일상의 연주자와 같아서 그녀를 떠올렸나 보다.
연주자로 살아가는 그녀와 피아노는 매일 한 몸 같았을 것이다. 그래도 연주는 매일 다르고 심상心想도 잔물결 같아서 흔들리지 않게 다잡아야 하며 깊게 자리한 자신의 예술성을 만족스럽게 표현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음의 첫 소절을 치기 전에, 차분하게 건반을 닦으며 잠시나마 가슴을 압박하는 긴장된 순간에서 벗어났을 것이라 짐작한다. 그 때문인지, 그녀의 손가락이 빚어내는 연주는 신탁神託을 얻은 듯이 훌륭했다.
쓰던 시가 박주가리 씨앗처럼 날개 털고 산만하게 흩어질 때, 나는 스스로에게 말한다. ‘설거지나 하자.’ 한참 동안을 그릇과 세재의 거품과 손가락의 마찰이 지나가고 나면 이상하게 마음이 안정되고 차분해진다. 끄트머리 잡히다 사라지는 시의 펄럭이는 그림자에 휘둘려 근심했던 일도, 쓰면서 잠시 기뻐했던 일도 그저 하얀 접시들 위에 반짝이는 햇살 같다. 흰 수건으로 건반을 닦던 연주자가 드디어 첫 음을 깊게 눌렀던 순간처럼 투명한 햇살 위에서 시의 잡초가 다시 솟는 것을 느낀다.

찻집에서 지인들 여럿이 만났다. 각자 살아가는 동안 마음의 창고에 저장해둔 복福을 나누어 주는 듯한 만남의 자리였다. 정담으로 오후의 태양은 기울고 시간은 쏜살 앞지르듯 지나갔다. 세월을 건너뛰며 만난 자리였지만 곧 일어나야 했다. 모두들 갓 구운 빵처럼 부드러운 집으로 달려가듯 돌아가며 내게 행복한 여운을 남겼다.
사람은 기댈 곳이 있어서 기쁨에 찬 표정도 짓는다. 안락한 삶의 배경이 되어주는 많은 것들을 말하지는 않지만 대화 속에 녹아있다. 대화 속에는 늘 그런 배후에서 넘쳐흐르는 평안이 있었다. 해서, 어쩌다 펼쳐지는 자랑도 공감도 서로에게 허물없었다.
나는 나에게 무엇을 자랑할 것인지 물었다. 몸담았던 직장도 이젠 기댈 난간이 아니다. 내 속에서 물음이 솟구칠 때 당황하고 망설인다. 마음의 책갈피를 뒤지듯 오랜 후에 대답의 실마리를 찾는다. 걷잡을 수 없는 시대의 변화에 살아남으려고 애쓰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시를 기대고 살아간다고 과연 말할 수 있을까. 더구나 시는 밥도 주식도 금도 아니다. 내 품에 간직한 자유의 일부다.
나는 내 영혼을 자랑할 것이다.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기고 크고 작은 실패와 더불어 찾아온 우울의 늪에서도 매번 벗어났으며 균형 잡힌 직립보행을 할 수 있는 이만큼, 건강하게 살아왔다는 것만을 자랑할 것이다. 내 영혼이 뿜어내는 에너지, 내 영혼이 사랑하는 그 모든 것들은 내가 자랑할 무수한 것들이다. 거기에 내 시詩가 있다.

첫 시집 이후에 23년이 훌쩍 지났습니다. 길손의 여장을 풀고 편안히 글을 모으게 되어 기쁩니다.
산천초목에 둘러싸인 초가집에서 태어나 자연이 베풀어주는 황홀감에서 시를 몸으로 느끼게 해주신 부모님께 감사드립니다.
깊고도 높았던 시의 순간을 살게 해주신 유한근 교수님, 성촌星村에 계신 정공채 스승님께 감사드립니다.
어떻게 알았는지 말하기 전에 새 컴퓨터를 사준 아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적습니다. 첫 시집을 축하해주고 아직까지 곁을 지켜주는 친구들의 고마움을 잊지 않습니다. 시집을 낼 수 있게 살뜰하게 힘과 용기를 주신 권순자 시인님께 감사드립니다. 오랜 세월 함께한 ‘시와여백’ 문우님들께 감사드립니다.
그간에 지하철 스크린도어에 게시되었던 저의 시 〈별〉을 영문 번역해서 낭송까지 즐겨 들으셨던 분들과 가슴에 간직해 주신 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별을 보며 먼 이국異國의 고향을 떠올리는 분들처럼 저의 고향도 멀어진 세월 따라 별무리 속에서 아득합니다.
수고하신 청어출판사의 관계자 여러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경기도 예술인 기회소득’으로 힘을 얻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생계로 인해 피로해졌을 때에도 다른 한쪽이 내게 가장 자유롭고 사소한 기쁨인 시가 즐거움을 주었으니 시에게도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2026년 봄
가현산 아래서
박영신
저자

박영신

경기도포천에서태어나
2001년《시인정신》으로등단하고
2001년《한국수필》로등단했다.
2003년시집『요것들』을발간했으며
현재는한국문인협회,시와여백,
선수필문학회회원으로활동하고있다.

목차

제1부

빛 10
호야꽃속에 11
날콩같은사람 12
눈보라 13
종소리를따라가다 14
감 15
적막한여행 16
도토리 17
빛과같은외로움 18
양복을수선하며 19
알몸위에눈발 20
어머니 22
빗줄기 23
슬픔과나란히 24
핏빛샘 25


제2부

생각의나무 28
옹이 29
휴일 30
먼불빛 31
빨래송頌 32
자전거를고치는사람 33
빗소리 34
별 36
무제無題 37
햇빛징소리 38
이별 39
그나무옆에앉았다 40
겨울밤 41
겨울양지꽃 42
꽃의기억 43


제3부

노작시인勞作詩人 46
가뭄끝에내리는비 47
석양 48
말 49
새 50
가시나무 51
웃음지느러미 52
고요한방 53
생가生家 54
토란잎피는날 56
중절모를쓴눈사람 58
마음한접시 60
화사한구석 61
웃는그림자들 62
꽃눈 63


제4부

몽당빗자루 66
모기와씨앗 68
서리 69
바위에스며들다 70
주머니속에사람들 71
유리무덤산책 72
빗속의콘도 74
부재不在 75
여름의마지막날 76
적석사 78
모기눈썹 79
나무토막의자 80
수평선 81
선물 82
예스세탁소불빛 83
비는욕망을잘게부수고 84


제5부

바닥식탁 86
페트병 87
해질녘노란안개 88
말굴리기방 90
초록불꽃 92
두더지 94
뼈 96
북 98
시계의눈동자 99
유리빌딩에불붙는노을 100
나무에올라가잠들다 102
입술 104
두살 106
눈꺼풀속의고향 108
비상飛上 110
흰두루미와나 112

시인의말 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