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문은 어떻게 한 사람을 지우는가
표제작 「구린 맛」은 대학교 대나무숲에 올라온 소문에서 시작한다. 친구의 애인과 잤다는 음해성 글 하나로 ‘최혜진’은 순식간에 손가락질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 왜 함께 잠자리를 한 남성은 비난의 대상에서 비껴나고, 여성에게만 가혹한 낙인이 찍힐까. ‘최혜진’은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 조선시대 세종조에 정조를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처벌받았던 여성 ‘유감동’의 이야기를 꺼낸다. ‘유감동’은 강간을 당한 뒤 여러 남성과 관계를 맺었고 이로 인해 사대부 여성에서 노비로 전락했다. ‘유감동’을 처벌한 사회는 남성들의 책임은 제대로 묻지 않았다. 소설은 현재의 ‘최혜진’과 과거의 ‘유감동’을 교차해 보여주며, 시대가 달라져도 여성의 몸과 성을 둘러싼 이중 잣대가 얼마나 끈질기게 이어지는지를 드러낸다.
「재생되지 않는 것들」은 디지털 성범죄가 한 사람의 일상을 어떻게 점령하는지를 보여준다. 전 남자친구에 의해 불법촬영물이 인터넷에 퍼진 ‘임은주’는 매일 밤 지도 앱을 켜고 거리를 걷는다. 현실에서 잃어버린 자신의 자리를 가상의 지도 위에서 되짚듯, 익숙했던 길을 하나씩 따라 걷는 것이다. 피해자를 보호해야 할 사회는 그에게 잃어버린 일상을 되돌려주지 못했고, 가해자는 불구속 상태에서 벌금형을 받은 뒤 자신의 일상을 이어간다. 사건 이후에도 가해자의 일상은 계속되지만, 피해자에게는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길이 남아 있지 않다. 결국 ‘임은주’는 자신의 얼굴을 지우고 가해자의 얼굴이 선명하게 드러나도록 영상을 편집해 다시 업로드하며, 자신에게서 일상을 빼앗은 사회와 가해자에게 맞서려 한다.
누군가를 쉽게 판단하고, 손가락질하고, 약한 사람에게만 책임을 떠넘기는 일. 『구린 맛』은 그것이 얼마나 오래되고 익숙한 폭력인지 보여준다.
기록되지 않는 생을 옮기다
「지운 자리」는 병상에 누운 아버지의 메모를 바탕으로 아버지의 자서전을 쓰는 ‘나’를 그린다. 자서전 대필을 업으로 삼고 있는 ‘나’에게 권위주의적이고 장남만 앞세웠던 아버지는 평생 원망스런 존재였다. 그런 아버지는 자신의 삶을 두고 “나는 후회 없이 살았다. 누구한테도 책잡힌 적 없고 누구의 원망을 산 적이 없다”라고 말한다. ‘나’는 그 문장을 볼 때마다 지우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하지만 아버지의 삶을 깊게 들여다본 ‘나’는 끝내 그 문장을 지우지 못한다.
「영옥이」의 ‘오해정’ 역시 대필로 생계를 잇는 사람이다. 어머니 병문안을 갔다가 우연히 듣게 된 ‘영옥’의 소식을 통해 봉제공장에서 술집으로, 보험 영업으로 옮겨다닌 그의 굴곡진 인생을 다시 떠올린다. 「미자 오디세이」의 ‘오미자’는 극단, 서울의 출판사와 신문사를 전전하며 몸이 상할 때까지 일을 해왔다. 고향 부산으로 돌아와서도 통증은 그를 괴롭힌다. 그는 정신과 몸의 피로 속에서도 지도에는 없지만 자신에게는 분명히 필요한 자리를 그리며 희망을 갖는다.
세 소설은 모두 글을 쓰는 사람의 눈을 빌려 기록되지 않았던 평범한 삶의 시간을 들여다본다. 가까운 사람의 삶에는 원망이 있고 타인의 삶에는 오해와 무관심이 있지만 오래 들여다볼수록 그 삶은 단순한 평가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얼굴을 드러낸다. 작가는 누군가의 삶을 대신 판단하거나 아름답게 포장하지 않는다. 다만 천천히, 끝까지 들여다보며 미처 이해하지 못했던 삶을 조금씩 다르게 바라보게 한다.
눈물이 마른 자리에서 만난 사람들
「순자는 왜」의 ‘순자’는 두통과 발뒤꿈치 통증으로 성한 곳이 없다. 그러나 그를 가장 힘들게 하는 건 병이 아니라, 아버지의 성정을 그대로 물려받은 채 방문을 걸어 잠그고 나오지 않는 아들이다. 병원과 주민센터를 오가는 순자의 하루는 그 자체로 노년의 삶에 대한 하나의 질문이 된다. 「사막의 주기」의 ‘순영’은 남의 빚을 대신 받아 주는 일을 하며 눈물을 무기이자 밥벌이 수단으로 써 왔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그 눈물이 거짓말처럼 나오지 않는다. 낯설고 당황스러운 순간, 그는 채무자인 한 남자에게서 뜻밖의 공감을 얻으며 오래도록 외면해온 자신의 슬픔과 비로소 마주한다.
『구린 맛』에 등장하는 일곱 명의 인물에게는 저마다 쉽게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다. 낙인, 성폭력과 디지털 범죄, 가족 안의 폭력, 가난과 노동, 고립과 외로움. 그럼에도 소설 속 인물들은 상처받은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아 있지 않는다. 각 편에서 인물들이 내린 답은 모두 다르고, 때로는 불편하며, 반드시 아름답지도 않다. 하지만 안지숙 소설가는 바로 그 지점에서 사람을 바라본다. 삶에 정답이 없다고 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구린 맛』은 쉽게 나아지지 않는 삶을 위로로 덮는 대신 그 안에서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출구를 보여준다. 그리고 상처 이후에도 계속되는 삶의 다음 장면을 보여준다.
책 속에서
첫 문장 아홉 시 오십사 분. 카페 노르웨이의숲 창가 자리가 비어 있었다. 혜진은 링크를 누른 채 횡단보도 앞에 서 있었다.
_「구린 맛」
p.60 순자는 한 줄을 썼다.
제 인생이 십자가입니다.
눌러쓴 문장을 속으로 읽고 한 줄을 더 썼다.
아들이 십자가입니다.
_「순자는 왜」
p.147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나는 같은 자리에 앉았고
영상은 계속 올라왔다.
어느 날은 지우다 말고 울었고, 어느 날은 끝까지
지웠다. 지워도 남았다.
나는 노트북을 열지 않았다.
나는 구글 화면을 켰다. 지도 위에 길이 떠 있다.
나는 그 안으로 들어간다.
_「재생되지 않는 것들」
p.186 메모장을 다시 보았다.
성실하게 살았다. 후회 없이 살았다.
누구에게나 자기 이름으로 남고 싶은 문장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런 문장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_「지운 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