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다시쓰기 (고전소설을 읽는 욕망에 관하여)

여성의 다시쓰기 (고전소설을 읽는 욕망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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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여성들의 다시쓰기 욕망은 어떻게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를 비틀고 전복해왔는가?
최초의 춘향전 영화에서 호스티스 드라마를 거쳐 웹툰에 이르기까지
여성적 다시쓰기의 변천사를 면밀히 추적한 문화연구서

어엿한 장르에서 미완의 조각난 서사에 이르기까지,
고전소설의 곁에 존재했던 무수한 읽기와 쓰기의 욕망들
20세기 초 최초의 춘향전 영화에서 1970년대 호스티스 멜로드라마를 거쳐 지금의 웹툰에 이르기까지, 고전소설의 개작 양상을 통해 여성적 다시쓰기의 변천사를 면밀히 추적한 문화연구서. 저자가 고전소설의 개작에 주목한 것은 그 텍스트들이 젠더 트라우마, 그리고 가부장제에 대한 다양한 저항의 스펙트럼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저자는 젠더적 차별과 불평등으로 인해 생기는 트라우마를 가리켜 ‘젠더 트라우마’라고 명명한다. 그러한 트라우마를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가 다시 쓰고 싶은 충동과 욕망을 불러일으킨다고 할 수 있다. 여성을 비롯한 소수자들은 ‘다시쓰기’라는 저항의 행위를 통해 서사의 주체가 된다.

고전소설, 그 가운데서도 대표적 여성 서사인 춘향전, 장화홍련전, 심청전은 가부장제의 요구와 기대에 부응하는 전형적인 여성상을 보여준다. 그 자체로 여성들이 고난을 극복하는 승리의 서사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가부장제의 규칙을 잘 따르는 여성들의 승리였다. 그런데 젠더 관계가 점점 복잡한 양상을 띠는, 즉 여성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점점 더 크게 내고 싶어 하는 20세기에 들어 이 세 편의 소설은 폐기되지 않고 개작이라는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이들 소설이 다양하게 개작될 수 있었던 것은 매우 잘 알려져 있기에 이를 통해 여성 집단이 일종의 공감과 해석의 공동체를 이룰 수 있기 때문이었다.

사실 춘향전, 장화홍련전, 심청전은 여성들의 위험한 욕망과 유교적 가부장제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는 텍스트였다. 양반의 처로 신분 상승을 이루고자 했던, 기생 딸 춘향의 욕망은 정절을 지키는 열녀로 포장되어야 했고, 가문의 인정을 받아 자기 지위를 지키고자 고투했던 장화·홍련의 계모는 전처의 아이들을 살해한 혐의로 처벌을 받아야 했고, 가난한 집안의 딸인 심청은 아버지의 허세로 인해 인신매매되었지만 ‘효’라는 명분은 심청의 희생을 미화했다. 20세기 이후 영화를 비롯한 다양한 장르에서 활발하게 창작되어온 개작 텍스트들은 이렇듯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의 허울에 가려진 여성의 욕망을 들춰내 돋을새김하고자 하는 주체적 다시쓰기의 산물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시대의 다시쓰기는 결국 젠더 트라우마의 모순적이고 분열적인 양상을 극복하고 있는 것인가. 저자는 이렇게 결론짓는다.

“앞으로도 한동안은 춘향과 장화·홍련과 심청의 변화된 모습을 다른 텍스트들에서도 발견할 수 있으리라 예측한다. 역설적이게도 이들의 모습을 더 이상 어떤 개작 텍스트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면 그것은 완전히 성차별을 극복하여 가부장제를 더 이상 새삼스럽게 비판하거나 공격할 필요가 없는 세상이 되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저자

노지승

서울대학교국어국문학과에서한국현대문학을공부했고,현재는인천대학교국어국문학과에서문학과영화를가르치고있다.문학과영화에대해연구하고가르치는것은거기에담긴누군가의말과삶을면밀히들여다보고이해하고때로는공감한뒤그것을다른이들에게해설과주석을달아전달해주는일이라생각하고있다.또한잘보이지않는사람들의삶의흔적을찾는작업혹은유명한이들의감춰진내면을새롭게발견하는작업을하고자한다.《유혹자와희생양:한국근대소설의여성표상》(2009)과《영화관의타자들:조선영화의출발에서한국영화황금기까지영화보기의역사》(2016)를썼고,번역한책으로는《페미니즘영화이론》(2012),함께번역한책으로는《여공문학》(2017)이있다.

목차

서문

프롤로그:다시읽기와다시쓰기의여성욕망
1장누구의것도아닌춘향
2장춘향전의이데올로기와프로파간다
3장자매애와모성애다시쓰기
4장누가심청을착취하는가
5장도시로간심청혹은70년대여성프롤레타리아

에필로그:새로운시대의춘향,장화·홍련,심청

출판사 서평

춘향전:‘춘향판타지’와현실속‘춘향’들의삶
춘향은한국인이가장좋아하는‘국민연인’이라고해도과언이아니다.영화만도20여편이나만들어졌으며또다른버전으로개작된사례도셀수없을정도로많은데,이책이다루는세편의고전소설가운데남성혹은지배자의욕망이가장강하게투사되어있는것이바로춘향전과20세기개작들이다.춘향은여성의육체와사랑이어떻게모든주류이데올로기에의해보수적으로형상화되어전유될수있는지,즉젠더트라우마의양상을가장잘보여주는인물이다.최초의춘향전영화(1923)가일본인감독에의해만들어졌다는것은춘향이남성들의성적판타지의대상으로서소비되었다는것을단적으로보여준다.조선기생이일본인남성들에게조선여성의섹슈얼리티를대표하는집단으로일본인남성들이조선을관광하고자할때빼놓을수없는관광상품이었기때문이다.이러한남성들의성적판타지를충족시키기위해대부분의춘향전영화들은고전소설의스토리를충실히답습할뿐새로운장면화나새로운플롯이가미되어있지않다.북한에서제작된춘향전영화역시몇가지사회주의적요소를제외하면남한에서제작된춘향전과흡사한구성을띤다.예외가있다면〈탈선춘향전〉(1960),〈방자와향단이〉(1972),〈방자전〉(2010)같은패러디버전과〈그후의이도령〉(1936)같은스핀오프버전정도다.
하지만남성들이춘향을흠모하는이유와여성들이춘향을흠모하는이유는유사한듯하면서도다르다.남성들에게춘향이오랫동안공공연한‘사랑과욕망의대상’이었던데비해,여성들이춘향을좋아하는이유에는남성들이춘향을좋아하는이유보다훨씬복잡한측면이있다.남성들이춘향을자신들이꿈꾸는이상적여성상으로꼽았다면여성들에게춘향은숭배의대상이자일종의롤모델같은인물이었다.남성으로부터사랑을받기도하지만스스로사랑을쟁취하는여성그리고감히권력에맞선용감한여성으로서춘향은여성독자들에게각별한의미가있었다.
그러나실제현실의‘춘향’들의삶은녹록치않았다.저자는일제식민지시기여성작가들과기생들의사례를통해이러한낭만적사랑에대한판타지가가부장제사회가여성을착취하는장치에다름아니라는것을보여준다.요컨대사랑을남성지배를용인하고여성을착취하는장치로만드는남녀간의불평등한권력관계가문제라는것이다.이몽룡은신분차이를뛰어넘어춘향과의사랑을지켜내지만결코목숨이위태로워지는위기에처하지는않는다.그는상층부양반의기득권,즉세도가의딸과결혼할때누릴수있는‘특권’을내려놓았을뿐이다.반면춘향은목숨을건모험을감행한다음에야비로소그진정성을인정받는다.끊임없는도전과시험을이겨내는여성만이그가치와진정성을인정받을수있다는구도는그자체로남성권력을확인하고여성에대한지배를강화한다.
한편춘향과같은‘열녀’의이미지는1970년대와1980년대민주화투쟁의시대에또다른방식으로변형되었다.군대에간운동권애인이갑작스럽게의문사한후여러남성들사이에서방황하다노동운동에눈뜨게되는,조해일소설《겨울여자》(1975)의‘이화’나수배중인남성을숨겨주던상황에서사랑에빠져홀로아이를낳고기르는황석영소설《오래된정원》(2000)의‘윤희’의모습에서업데이트된춘향의모습을발견할수있다.이들의이야기나춘향의이야기나모두남겨진여성의이야기라는데공통점이있다.부재하는남성들은자신이부재하는상황에서도여성을소유하고싶어했다.그럼으로써때로는남성의부모및다른가족들이여성가장의부양을통해경제적실리를얻기도했다.사랑을하는여성이누군가를사랑한다는약점때문에착취되기쉽고그때문에누구보다취약할수있다는점을가부장제는아주잘이용한다.사랑이사적영역에서의혁명을위해해체되거나재구성되어야하는것은이러한이유에서다.

장화홍련전:모성애와자매애다시쓰기
가족문제를본격적으로다룬장화홍련전은인기로치자면춘향전,심청전에못지않았다.춘향전,심청전과더불어장화홍련전은일명‘딱지본’이라불리는구활자인쇄본의형태로식민지시기내내소비되었다.또한춘향전과마찬가지로1970년대까지지속적으로영화로제작되었다.그런데장화홍련전영화의제작은언제나춘향전보다후순위였다.그이유는춘향전보다장화홍련전의인기가덜했던것,특히상대적으로남성들이장화홍련전에별관심이없었던것에서찾을수있다.여성들간의친밀성이라는측면에서장화홍련전이이성간의사랑이야기인춘향전에비해남성들이이해하기어려운요소를가진것은사실이다.남성들은가족내약자로서겪는여성들의곤경을잘이해하지못하기때문이다.염상섭소설《삼대》와《광분》,그리고수많은신문기사들에서알수있듯이,남성지식인작가들에게는상상으로나마계모의입장이되어계모의시각으로가족문제를들여다보는시각이부재했다.이러한공감의부재는자연스럽게장화홍련전에대한남성들의몰이해를초래하여결과적으로장화홍련전을남성들의관심사로부터멀어지게했다.그러나이러한결과가부정적인것만은아니었다.춘향전이이데올로기와남성지배의요구에따라매우잘개작되어왔던것과달리,장화홍련전은남성들의관심에서벗어나온전히‘여성’의입장을반영한,여성의이야기로개작될가능성이높았기때문이다.
서사속에는계모가원래악녀이기때문에딸들을죽인것으로나오지만,서사의이면을잘뜯어읽어보면실은계모가악녀가된것에는분명한이유가있다.20세기의관객과독자들은주로친모를잃고계모에게학대받는장화와홍련에게감정이입했지만여성주의적시각을가진비판적인다시쓰기텍스트들은계모라는캐릭터에더주목했다.분명당연하게생각되었던가부장권력의정당성에점점더의문을품기시작했고이의문은계모는진정악녀인가라는질문으로이어졌다.식민지시기여성작가인이선희의〈연지〉와임옥인의〈후처기〉는‘왜계모는늘나쁘게그려져야하는가’라는질문에서출발하여계모의입장에서가정문제를다시읽어낸대표적인개작텍스트다.〈연지〉의금녀와〈후처기〉의‘나’는시집식구들과남편과전실의아이,그리고전처와자신을끊임없이비교하는사람들에포위되어자신이고립되었음을분명한자신의목소리로발화하고있다.이들의다시쓰기는신여성으로서작가자신의삶에대한고민,아픔과관련되어있는만큼여성들의솔직하면서깊이있는내면의풍경을잘보여준다.신여성들중‘후처’로서결혼생활을한이들이드물지않았기때문이다.1930년대세간을떠들썩하게했던이혼스캔들의주인공인나혜석도후처였고최정희는김동환과사실혼상태에있었지만끝내합법적인아내가되지못했다.
한편흥행을위해서는대중의전통적인기대에영합할수밖에없었던영화계에서도1970년대이후의미있는개작텍스트들이등장한다.1972년이유섭감독의〈장화홍련전〉은1970년대초의사회변화와함께여성의욕망을주체적으로반영하여원작의내용을일부변형하고있다.이영화는장화·홍련자매와계모간의갈등이‘상속’문제에의해불거진것임을분명히드러낸다.또한장화홍련전의21세기첫번째개작텍스트인김지운감독의〈장화,홍련〉(2003)은계모와전실딸들의갈등을심리학적이며정신분석학적인서사로풀어낸다.엄마와아내의역할을맡음으로써아버지의새아내와경쟁하려는수미(장화)의행동은정확히오이디푸스콤플렉스의여성버전과일치한다.

심청전:가장문제적인개작
이책이다루는세편의고전소설가운데20세기개작에서가장문제적인텍스트가바로심청전이다.심청이갖고있는젠더트라우마는다른고전소설의인물들보다가족내젠더불평등을직접보여준다는점,더구나인신매매와성매매와관련되어있다는점에서더폭력적이다.아버지가허황되게약속한공양미때문에심청이팔려가는신세가되었다는설정은20세기들어가족을위해돈을벌며희생하는딸들의이야기로새롭게해석되었다.그런데더욱문제적인것은남성작가들에의해개작된심청전에서도이러한폭력적상황이되풀이되고있다는점이다.
채만식의소설《탁류》와희곡〈심봉사〉가딸을불행하게만드는가부장의무능함을비판하는데초점을맞추었다면윤이상이1972년뮌헨올림픽축전오페라로작곡한〈심청〉은심봉사가파우스트처럼학문을열심히탐구했지만본질을찾는데실패하고게다가시력까지잃은비극적인운명의주인공으로설정하고있는데,그결과여성인물이겪는불행과아픔,여성의목소리는삭제되어버리고만다.한편최인훈희곡〈달아달아밝은달아〉(1978),황석영소설《심청,연꽃의길》(2007)은‘이주’의모티프를적극활용하는데,국제인신매매단에의해자행되는심청의이동은남성과제국에의해식민지와노예와여성의모빌리티가관리되고지배되는전형적인방식을보여준다.특히황석영소설《심청,연꽃의길》은남성들에의해육체를유린당하는가운데서도심청이자신의삶을적극적으로개척해나가고오히려남성들을굴복시키는인물로설정되어있다.이전의여러개작들에서심청이일방적인희생양으로그려진것과는자못다른설정이다.그런데성적고난을주체적으로극복하고오히려남성들을굴복시키는강인한여성의모습은여성의주체성을논할때종종빠질수있는함정이다.여성의성매매가발생하는근원적인사회구조나여성의신체에가해져온폭력의역사가여성의‘정신승리’라는허울속에감춰지기때문이다.
그런점에서볼때,남성작가들의개작텍스트에비해영화로개작된텍스트가여성의목소리를더욱더반영한다는사실은중요한의미가있다.1972년신상옥감독의〈효녀심청〉은모성상실과상실한모성과의재회라는여성적이슈를여성들의목소리를통해드러내고있으며,〈별들의고향〉과〈영자의전성시대〉로대표되는일명‘호스티스멜로드라마’는여성들의생애사적요소들을속도감있게압축적으로다루면서여성들이겪는삶의고통을잘묘사하고있다.호스티스멜로드라마는여성의몸을볼거리로만드는남성들의욕구를전형적으로충족시키는상업영화이지만,남성관객들의욕구와여성들의목소리가서로경합하며타협과절충을벌이는전형적인젠더트라우마의텍스트이기도하다.다시말하면호스티스드라마는가부장제를대리하는복화술의목소리와가부장제의통제에저항하는여성들의목소리가혼합되어있는텍스트이다.심청전의20세기개작양상을볼때상대적으로호스티스멜로드라마는심청의고통에보다주목했던산업화시대의심청전이라부를만하다고저자는평가한다.
마지막으로,여성인물에게가장폭력적인텍스트인심청전이21세기페미니즘시대에다시쓰기욕망에의해웹툰으로개작되는양상은의미심장하다.작가세리는아주단순한질문,즉“그녀(승상부인)는,왜심청의공양미를대신내준다고했을까”라는질문에서출발하여웹툰《그녀의심청》의서사를풀어나간다.심청과승상부인은신분을뛰어넘는우정을나누다가급기야서로에게사랑을느낀다.심청과승상부인을동성애관계로설정함으로써이웹툰은심청전의이성애중심서사를걷어찬다.이들에게동성애,자매애는여성을노예화하는가부장제질서를완전히분쇄하는강력한무기가된다.이전의개작들이주저하고적절히위장하며가부장제와타협했다면《그녀의심청》은그러한한계를날려버리고심청전을페미니즘텍스트로거듭나게만든다.
저자는《그녀의심청》만큼남성중심적젠더이데올로기를정면으로반박하고나선심청전개작은없었다고해도과언이아니라고단언한다.남성빌런들에대한통쾌한복수는또다른의미에서의판타지이지만15세소녀들의소원을가감없이성취시킨다.바로2010년대이후재부팅된페미니즘의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