랑시에르가말하는픽션의정치
:공통의세계와공통의이야기
랑시에르는철학자인가,정치학자인가,미학자인가,역사학자인가?도서관에가보면랑시에르의책은한곳에응축되어있지않고철학,사회과학,역사,예술등여러분야에흩어져있다.그만큼랑시에르는철학에도,역사에도,문학에도속하지않는글을쓴다.그는의미를제공하는전통적인철학자의지위나역사적사실을서술하는역사가의지위모두를거부하며,오히려철학,역사,문학이라는분과학문들사이의경계를가로지르는글쓰기를수행한다.정치와예술을넘나들며당대의이론적,실천적상황에논쟁적으로개입하는랑시에르의사상은현대담론에서독보적인위치를차지하고있다.
잘알려져있다시피그의사상적여정에서첫번째중요한분기점은루이알튀세르와의만남이었다.그러나1968년5월혁명이후알튀세르와불화를겪었고,결국결별했다.기본적으로알튀세르는노동자들에게착취와혁명을가르치는교사의입장이었고,이는지식인을경유하지않고서는노동자의목소리가전달될수없다는논리와같았다.랑시에르는이런지식인과무지한대중사이의나눔을문제삼았고,알튀세르와결별한뒤약8년간19세기노동자들과공상적사회주의자들이남긴기록물에서지적평등을입증하는다양한사례들을조사했다.이러한작업의결실이바로국가박사학위논문인《프롤레타리아의밤》(1981)이다.그는노동자들이스스로말할수있고,사유할수있으며,다른세상을꿈꾼다는것을밝혀냈다.랑시에르는정치적주체가특정한사회적신분이나지위에의해서미리결정되는것이아니라스스로자신의말을들리게하는주체화의과정을통해서만들어진다고말한다.
이러한맥락에서《픽션의가장자리》는랑시에르고유의사상과글쓰기전략이담긴중요한책이다.《정치적인것의가장자리에서》《불화》와같은저작에서‘몫없는자들의몫’이란개념을통해아무것도갖지못한이들의정치적주체화를끌어냈듯이,이책에서는‘보잘것없는존재’들과‘임의의순간’에대한분석으로자신의사상을펼쳐간다.랑시에르는이책에서아무리보잘것없는인간일지라도영혼의깊이를지닌주체이고,몽상이라는비활동이세계의활동과조화를이루는충만한순간이기도한임의의순간이야말로“아무것도아닌어떤삶의단순한불행을모든것으로바꿔놓을수있”다고말한다.“임의의/보잘것없는순간은지배적인시간,즉승리자들의시간의‘승리’가가장확실시되었을때조차승리자들의시간을폭발시키는힘이다.지배적인시간이말바깥,시간바깥에있는이들을밀쳐낸곳,아무것도아닌것의가장자리에서이힘은작동한다.”(248쪽)
‘아무것도아닌것’을‘모든것’으로만드는것.공통의세계와공통의이야기를구축하고자하는것.이것이랑시에르가말하는‘픽션의정치’이다.이는버지니아울프,윌리엄포크너,주앙기마랑이스호자의소설을분석하면서더자세히말하고있다.“다시말해,이감각적인모험들에의해말은육신이되어삶을그목적지에서우회시키고,밤은정상적인낮과밤의순환을동요시키며,창문을통한시선은프롤레타리아신체의분할을낳는다.또한이감각적인모험들에의해훼손된조각상들,벼룩이들끓는아이들,광대들의재주넘기는새로운아름다움을창조하고,문자기호앞에서의무지한자들의암중모색은또다른지적삶을규정한다.이와같은온갖모험들을통해계속되는것은바로아무것도아닌것을모든것으로변화시키는혁명에대한하나의동일한조사연구이다.”(19~20쪽)
새로운픽션,새로운주체의탄생
랑시에르는아리스토렐레스의《시학》에서픽션의합리성개념을이끌어낸다.아리스토텔레스가말하는픽션적합리성은1)원인과결과의연쇄[인과적시간성],2)진실임직함[개연성],3)반전[급전]이라는세가지요소로구성된다.이요소는지금까지큰영향을끼치고있다.
그러나여기에는행위주체들의수가제한적이었다고랑시에르는지적한다.《오이디푸스왕》에서볼수있는것처럼,아리스토텔레스시대의행위주체는소수의행동하는인간들,즉왕이나귀족에국한됐다.나머지대다수인간은노동이나재생산의굴레에갇혀늘같은일만반복한다고여겨졌기에결코픽션의대상이될수없었다.“그들은물건을만들거나아이를양육하고,명령을실행하거나서비스를제공하며,그전날했던것을다음날되풀이한다.이모든것에는당신을하나의운명에서정반대되는운명으로이행하게할수있는어떠한기대도없고,어떠한기대의반전도없으며,범할어떠한실수도없다.그러므로고전적인픽션적합리성은극히적은수의인간및인간활동과관련되었다.”(9쪽)이때문에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진실은반복과재생산이라는어둠의세계에머무는수동적인간들이아니라행동과사건이라는빛의세계에사는능동적인간들만이도달할수있는것으로여겨졌다.
이러한아리스토텔레스의원리는근대에들어전복되었다고랑시에르는지적한다.마르크스로대표되는사회과학은아리스토텔레스의원리를따르면서도무지해도되는,즉무시해도좋은사물들과사람들의세계를진실된세계로격상시켰다.이에따라능동적인간들이몰라도되었던,혹은무시해도좋았던사람들과사물들의세계가곧진실의세계,지식을생산하는세계가되었다.반면근대문학은고전적픽션적합리성의적용범위를넓히기보다그가장자리에머물러있던것들에서,가장강렬하고가장복합적인감정을느낄수있는보잘것없는개인에서새로운픽션적합리성을발견했다.보잘것없는존재들이겪는감정과사건의세계를향해이야기구조를열어젖히고,임의의순간을통해“아무것도아닌어떤삶의단순한불행을모든것으로바꿔놓”는전략을취했다.
그렇다면작가란무엇을하는사람인가?랑시에르는제발트의소설들을분석한장에서이렇게말한다.“그작업이란죽어있는것에서삶을창조하는것,낡은것으로새로운것을창조하는것,산업적재료들로예술을창조하는것,사소한사건들과거의지워진흔적으로부터역사를창조하는것이다.요컨대파괴의활동에이의를제기하고파괴의활동을대속하는것이다.”또한작가는“시간의또다른이미지,즉연속과파괴의시간에대립하는공존의시간,평등의시간,순간들의사이-표현성의시간을창작하”(196쪽)는사람이다.
랑시에르가말하는새로운픽션이란무엇인가?“종속시키지도파괴하지도않으면서연결시키는공통감각을생산”(240쪽)하는것이다.즉고전적픽션이전제했던어디까지라는한계너머로보잘것없는삶과임의의순간들을데려가는것이다.“새로운픽션은장애인을치료하기위한해결책들을제시하지않는다.그러나새로운픽션은장애인들을수용소로보내는자들의지배를중지시킨다.새로운픽션은글쓰기의시간을통해장애인들이갇혀있게될장소로그들을보내는것을뒷받침하는근거들의시간을무한히지연시킴으로써그들을현재에붙잡아둔다.”(247쪽)
이책의구성:
문과창문을지나,문턱을넘어,기슭으로,마침내가장자리로나아가는이야기
《픽션의가장자리》는귀족과평민을구분했던분리선인‘문과창문’(1부)을지나,서사의합리성과과학의합리성이마주치는과학의‘문턱’(2부)을넘어,작가의상상력과시간성을파고드는실재의‘기슭’(3부)에머물다,픽션이그리는공동체와픽션이약속하는인간성을파헤친아무것도아닌것과모든것의’가장자리’(4부)로나아간다.
총4부로구성된이책은작품분석을통해전개된다.1부〈문과창문〉에서는민주주의시대를연프랑스혁명이후등장한문학작품들을‘창문’이라는메타포로분석한다.‘창문’은귀족과평민을분리했던장벽을의미하는데,이시대에비로소그문이열리게된것이다.스탕달에게창문은투명한영혼의닮음을기반으로귀족과평민이만나는통로였지만,발자크의소설로넘어오면서창문은다시금창밖과안사이의시야를가로막고,귀족과평민을나누는‘불투명한’장애물이된다.보들레르의시와위고,모파상의소설을통해서는현기증나는영혼의깊이를그뒤에감춘‘가난한사람들의눈’을,프루스트의《잃어버린시간을찾아서》에나오는엿보는자의시선을통해서는‘거짓의진실’,즉앎에도달하는방식을살펴본다.릴케의《말테의수기》를통해서는거리를향해난창문바깥으로나가보는법을다시배우는시인의의미를파헤친다.
랑시에르에게사회과학과문학은모두픽션의논리에따라우리가살아가는공통의세계를지각가능하고사유가능하게하는형식들이다.바로이와같은관점에서2부〈과학의문턱〉1장〈상품의비밀〉에서는마르크스의《자본론》이,2장〈인과성의모험〉에서는추리소설이분석대상이된다.우선랑시에르는비극으로서과학의속성,그리고과학과역사의길항작용을조직하는마르크스의독특한극작법을조명한다.《자본론》에는등장인물들사이의적대감과대립구도,그리고상황의반전이라는비극의논리가작동하고있다.또상품들의교환아래‘감춰진것’과공장의현실에서‘드러난것’,공장에서일하는육체에쓰인‘지옥서사’등이《자본론》에“독특한내러티브구조”를부여한다.마르크스의극작법은생산및삶의재생산이라는어두운세계를드러내면서역사의법칙을파악한이들에게위계없는인류의장래를열어준다고랑시에르는말한다.2장에서는추리소설의변천사를짚어나가며,그변천과정에서어떻게추리소설이“평범한등장인물들,반복되는시간,중요하지않은사건들”을배척하고자했는지살펴본다.
3부〈실재의기슭〉에서는조지프콘래드와W.G.제발트의소설을분석하면서실재적인것과상상적인것의관계를다룬다.특히2장〈문서들의풍경〉에서는제발트의픽션에주목해새로운픽션의모델을그린다.제발트는반복되는여담을통해특정순간,특정장소에서일어났던,일어나는,일어났을수도있을,일어날지도모를일들을같은순간,다른장소에서,또는다른순간,같은장소에서일어났던,일어나는,일어났을수도있을,일어날지도모를일들과수평적으로연결함으로써모든다른현실적,상상적시공간을잠재적으로포함하여끝없이팽창하는‘공존의공간’을직조하며새로운픽션을창조해낸다.
4부〈아무것도아닌것과모든것의가장자리〉에서는버지니아울프,윌리엄포크너,주앙기마랑이스호자의소설을분석하며픽션의정치가어떻게새로운형상과형식을입고변주되고,확장되는지살펴본다.1장〈임의의순간〉에서는버지니아울프의소설이어떻게새로운공통감각의세계를열어젖히는지보여준다.임의의순간은공존의시공을이루는요소인동시에,그자체로‘동요의순간’이기도하다.사건의시간과의미의세계안에살아가는이들과,이시간과세계바깥에서살아가는이들이마주치는순간이다.울프는바로이순간,공통감각혹은양식의질서가해체되는순간을그림으로써다가올공통의삶,새로운공통감각의세계를예고한다.3장〈말없는자의말〉에서는윌리엄포크너의《소리와분노》에등장하는백치벤지가어떻게아무것도아닌것을모든것으로뒤바꾸는지를보여준다.벤야민이승리자들의시간에맞선시간의중지,포개짐,회귀,격돌을이야기했듯,포크너의픽션은시간을압축하고팽창시키며파편화하고혼합함으로써아무것도아닌것을모든것으로승격시킨다.4장〈한없는순간〉에서다뤄지는주앙기마랑이스호자의픽션에서는정체를알수없는인물들이어떻게고전적픽션의시간성을넘어한없는순간을만들어내는지조명한다.픽션의정치적주체는삶과이야기가만들어내는순환속에서이야기로서의삶을읽어내고,삶으로서의이야기를지어내는아무나,즉누구나임을주앙기마랑이스호자의소설은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