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분황사는 신라 초기가람으로 창간되어 지금가지 법당을 이어오고 있는 역사적 전통사찰임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사격과 가람배치 양상을 파악하지 못한 채 단편적인 조사만이 이루어졌다. 따라서 우리 연구소에서는 1990년부터 전면적인 발굴조사를 시작하였다. 7차에 걸친 발굴조사를 통해서 신라 최초의 ‘品’자형 일탑삼금당식 창건가람을 확인하였으며, 금당은 이후 3차례의 중건이 이루어졌음을 확인하였다. 그밖에 추정 강당지, 동회랑지, 석등지를 비롯하여 건물지. 담장, 배수로, 우물 등의 생활유구와 청동노지, 와요지 등의 생산유구도 다수 확인하였다. 출토유물은 암·수막새, 치미, 귀면화, 전돌 등의 와전류가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토기와 자기 등 생활용기도 다수 출토되었다. 각종 장식용 금동제품은 그 정교함과 화려함에서 사료에 나타나는 왕실원사설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현재 우리 연구소에서 진행 중인 발굴조사를 완료하면, 분황사 가람의 전모를 밝힐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1990~2003까지 7차 발굴조사 수록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지난 15년간의 발굴조사 결과를 토대로 『분황사 발굴조사보고서 Ⅰ』을 발간했다. 발굴조사보고서는 본문과 유물도판 2권으로 구성돼 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1990년부터 분황사 발굴조사를 시작했으며, 현재 8차년도 조사를 진행중이다. 이번에 발간된 조사보고서Ⅰ은 1990년부터 2003년까지 진행된 7차까지의 발굴
조사 내용을 수록했다. 분황사는 전불시대 7대가람의 하나로 알려져 있지만 전성기에 비해 사세가 크게 줄어든데다 창건부터 1400여년이라는 시간이 흐르기까지 사찰이 한번도 폐사되지 않고 지속돼왔기 때문에 수차례 가람배치의 변형이 있었다.
문화재연구소는 지금까지 품(品)자형 창건 3금당의 존재를 비롯하여 이후 3차에 걸친 금당의 변천과정을 확인했으며, 현존 석탑은 창건시의 원위치를 그대로 지키고 있음을 밝혔다. 또 현재 사역의 남북 외곽에서 당간지주·담장·축대·건물지·배수로 등의 위치를 확보했다. 미조사 지역으로 남아있는 분황사 주차장과 원효탑 부분은 중문지와 남회랑지를 비롯하여 동서 회랑지 남단 일부가 잔존할 가능성이 높은 지역이다. 문화재연구소는 향후 이 지역을 포함한 미조사 지역에 대한 조사를 빠른 시일내에 마무리하여 분황사 전성기의 가람배치와 사역범위를 밝히겠다고 전했다. 분황사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삼국사기에 수록된 “선덕왕 3년(634) 정월 연호를 인평(仁平)으로 고치고 분황사를 완성했다”는 기록이다. 초기에는 자장·원효를 비롯한 고승들이 주석하면서 왕실원찰로서 역할했으며, 8세기 중엽에는 대형 약사동상을 세우고 1차중건 금당을 건립하면서 전성기를 누렸다. 몽골의 침입이 있었던 13세기 이후에는 쇠락의 길을 걸었으며, 지금은 임진왜란 이후 17세기 초에 건립한 보광전과 일제강점기(1915년)에 수리한 모전석탑 등과 함께 사역이 대폭 축소된 상태로 남아있다.
1990~2003까지 7차 발굴조사 수록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지난 15년간의 발굴조사 결과를 토대로 『분황사 발굴조사보고서 Ⅰ』을 발간했다. 발굴조사보고서는 본문과 유물도판 2권으로 구성돼 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1990년부터 분황사 발굴조사를 시작했으며, 현재 8차년도 조사를 진행중이다. 이번에 발간된 조사보고서Ⅰ은 1990년부터 2003년까지 진행된 7차까지의 발굴
조사 내용을 수록했다. 분황사는 전불시대 7대가람의 하나로 알려져 있지만 전성기에 비해 사세가 크게 줄어든데다 창건부터 1400여년이라는 시간이 흐르기까지 사찰이 한번도 폐사되지 않고 지속돼왔기 때문에 수차례 가람배치의 변형이 있었다.
문화재연구소는 지금까지 품(品)자형 창건 3금당의 존재를 비롯하여 이후 3차에 걸친 금당의 변천과정을 확인했으며, 현존 석탑은 창건시의 원위치를 그대로 지키고 있음을 밝혔다. 또 현재 사역의 남북 외곽에서 당간지주·담장·축대·건물지·배수로 등의 위치를 확보했다. 미조사 지역으로 남아있는 분황사 주차장과 원효탑 부분은 중문지와 남회랑지를 비롯하여 동서 회랑지 남단 일부가 잔존할 가능성이 높은 지역이다. 문화재연구소는 향후 이 지역을 포함한 미조사 지역에 대한 조사를 빠른 시일내에 마무리하여 분황사 전성기의 가람배치와 사역범위를 밝히겠다고 전했다. 분황사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삼국사기에 수록된 “선덕왕 3년(634) 정월 연호를 인평(仁平)으로 고치고 분황사를 완성했다”는 기록이다. 초기에는 자장·원효를 비롯한 고승들이 주석하면서 왕실원찰로서 역할했으며, 8세기 중엽에는 대형 약사동상을 세우고 1차중건 금당을 건립하면서 전성기를 누렸다. 몽골의 침입이 있었던 13세기 이후에는 쇠락의 길을 걸었으며, 지금은 임진왜란 이후 17세기 초에 건립한 보광전과 일제강점기(1915년)에 수리한 모전석탑 등과 함께 사역이 대폭 축소된 상태로 남아있다.
분황사 발굴조사보고서 1(2005년 영인본) (양장본 Hardcover | 전 2권)
$23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