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히신문외지판 북지판: 1938∼1939 (양장본 Hardcover | 전 3권)

아사히신문외지판 북지판: 1938∼1939 (양장본 Hardcover | 전 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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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이 책에 실린 《아사히신문외지판朝 日新聞外地版)》은 1935년부터 1939년까지 5년간 당시 아사히신문규슈지사(九州支社), 현재의 서부본사에서 식민지 조선, 대만, 그리고 만주국과 중국점령지역에 배포할 목적으로 간행한 신문이다. 규슈지사는 몬지(門司)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당시 몬지는 규슈로 들어가는 현관임과 동시에 조선과 대만, 중국대륙 등의 일본제국 건설과 운영을 위한 중요한 관문이었다.
1945년 3월 당시 약 28만부를 발행하고 있었으며 규슈본사 발행 부수의 3분의 l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 이 외지판 이었다. 지리적 위치를 활용 선편으로 조선등지로 배송하고 있었으나 패전과 함께 폐간되었다.
일본 근대사 또는 한국 근대사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귀중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이 신문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1937년 조선총독부경무국에서 간행한 《조선출판경찰개요朝鮮出版뺨察槪要)》 에 따르면 당시 《경성일보京城日報)》 의 발행 부수는 약 3만부였으나, 《오사카아사히신문외지판》 은 6만 6천부였다고 한다. 즉 《아사히신문외지판》 의 구독자가 《경성일보》 의 약 2배였다는 사실이다.
전체 《아사히신문 외지판》 은 1935년에 발간을 시작하여 45년까지 10년에 걸쳐 발행한 신문이다. 당시 일제의 통치 아래 있던 조선(朝鮮)과 만주국(滿州國), 대만(台潛)판이 인쇄 배포되었다. 외지판의 원본은 아사히신문사 내 자료실과 북구주시(北九州市) 의 서부본사 보존실에 보관하고 있던 것을 연구지들을 위해 복제판으로 인쇄한 것이다. 이 신문은 전시의 일본 식민지의 실제 상황과 당시의 역사적 사실을 알아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하고 있다.
외지판은 전전(戰前)의 일본 상황과 아시아 침략에 앞서 조선을 비롯한 각국의 정세를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점령지의 일본인이 주요 구독자 였다. 1945년 3월 당시에 서부본사에서 인쇄한 외지판은 약 28만부를 발행 배포했다. 같은 시기 서부본사 발행부수의 3분의 1 이상이나 되는 부수를 찍어 냈다. 1945년 패전과 함께 외지판도 폐간되었다.

모지인 《아사히신문朝日新聞)》 은 1879년 1월 일본 오사카에서 창간한 신문으로 일본어와 한문을 섞어 썼다. 이 신문은 《요미우리신문(讀賣新聞)》 , 《마이니찌신문(每日新聞)》 과 함께 일본의 3대 신문 중 하나이며, 도쿄와 오사카 등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동시에 발행하고 있다. 현재 발행 부수는 약800만 부이다. 한국의 《한겨레신문》 과 《워싱턴포스트》 등과 제휴하고 있다. 일본 국내에서는 좌파 경향의 신문으로서 인식되어 있다.
1882년부터 일본 정부로부터 운영자금을 지원 받아 발행했고 미쓰이은행으로부터 경영자금을 원조 받기 시작했다. 1888년 7월에는 도쿄의 《메자마시신문》을 매입하여 《도쿄아사히신문》 올 창간하여 도쿄로 진출했다. 이로써 지방신문에서 중앙지로 발돋움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1889년에는 오사카 본사에서 발행하는 《아사히신문(朝日新聞)》을 《오사카아사
히신문(大阪朝日新聞)》 으로 제호를 변경하여 발행하기 시작했다. 1915년 《오사카아사히신문(大阪朝日新聞)》 이 석간을 발행하기 시작했다. 그 해에 전일본 중등학교 야구대회(현 전국 고교야구 선수권대회)를 개최하여 선풍적 인 인기를 누리며 현재까지 일본야구의 꿈나무를 키워오고 있다.
1940년 《오사카아사히신문》 과 《도쿄아사히신문》 이 제호를 《아사히신문(朝日新聞)》으로 통합했다.
《아사히신문외지판》 의 중요 기사를 통해 당시 우리나라의 정세를 자세히 알 수 있다. 1923년 9월 관동 대지진 때 조선인 폭동의 유언비어 기사를 게재하여 많은 조선인이 피해를 입었다. 일본 자경단과 재향군인회가 자행한 관동 대지진 조선인 학살사건(關東大地震 朝鮮人虐殺事件)으로 6,000명 이상의 조선 민간인이 학살 되었다.
1923년 9월 10일자 신문에서 도쿄 일원의 관동지방은 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싣고 민심과 사회질서가 대단히 혼란스런 상황을 소개했다. 당시의 내무성이 각 경찰서에 지시한 내용중에 "재난을 틈타 조선인들이 방화와 폭탄에 의한 테러, 강도 등을 획책하고 있으니 주의하라.“는 것이 들어 있었다. 이러한 내용을 《아사히신문》 , 《요미우리신문》 등 주요 신문이 게재하자 "조선인(또는중국인)들이 우물에 독을 풀고 방화와 약탈을 하며 일본인을 습격하고 있다.” 라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그러자 일본인들은 자경단을 조직하여 조선인이나 중국인으로 확인되면 죽창 등으로 거침없이 살해하는 만행을 저지르기 시작한 사건이다.
1935년 1월 5일자 남선판에서는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 조선총독의 신년사와 함께 사진을 게재했다. 그리고 총독의 일상적인 생활을 화제로 대담을 실었다. 그 외 에도 몇 가지 사건 사고로 신문을 편집했다. 같은 해 3월 6일자에서는 대구에서 신랑신부가 팔공산 정상에서 산정 결혼식을 올려 화제가 되었다는 기사가 눈길을 끈다. 당시에는 이러한 민간인의 일상적인 사건까지도 기사화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2월 17일자 만주판에서는 수도를 신경(新京 長春)으로 한다는 기사를 실었다. 이듬해인 1936년 1월 7일자에서는 영하40도나 되는 혹한에서 일본관동군이 항일군을 저지하기 위해 출전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항일군은 옛 중국부흥을 바라는 만주국 내의 항일 무장세력과 조선독립군의 활약을 말한다.
1915년부터 35년까지 당시의 조선을 비롯하여 만주, 대만판은 오사카 본사에 보관돼 있던 것들이다. 《아사히신문 외지판》 은 식민지 조선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 분야에 걸쳐 귀중한 연구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
남선판의 선(鮮)은 조선을 말한다. 식민지시대 일본인이 조선을 말할 때 약칭으로 쓰는 말이기도 하다.
이 신문은 근대사회의 동북 아시아 정세를 자세히 알아 볼 수 있는 자료인 동시에 우리에게는 귀중한 역사적 자료가 아닐 수 없다. 이 신문을 통해 조선독립군의 활약상을 확인할 수 있고, 문화적으로 일제에 협력한 친일파 문인들의 활동을 엿볼 수 있다.
기사 내용이 방대하고 당시의 기록이라 실록을 보듯 자세하다. 따라서 역사학은 물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군사, 외교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여 활용도가 높다.
복제판의 체제를 보면 4가지로 나누어 발행했는대 〈조선서북판(朝鮮西北版)〉 (북한), 〈남선판南鮮版)〉 (한국), 〈만주판(滿州版)〉, 〈대만판(台淸版)〉 등이다. 가로 세로 302 x 428mm 용지에 각권 약 300쪽 하드커버 고급 서적지에 인쇄했다. 5년간 발행한 전체 신문을 23권의 책자로 묶어 전집 형태로 출간했다. 일제의 통치 지역별로 묶었는데 조선은 조선판(朝鮮版 한국)과 조선서북판(朝鮮西北版 북한)으로 나누어 실었다. 1939년 이후에는 조선을 세 곳으로 나누어 서선판(西鮮版), 북선판(北鮮版), 중선판(中鮮版)으로 나누었다. 이로써 조선 관계 신문집만 해도 모두 11책이나 되는 방대한 자료이다.
저자

한국학자료원편집부

목차

제12권:북지판(北支版)-1938년(昭和13)
제21권:북지판(北支版)-1939년(昭和14)
제19권:북선판(北鮮版)-1939년(昭和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