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외 전후사(영인본) (양장본 Hardcover | 전 3권)

호외 전후사(영인본) (양장본 Hardcover | 전 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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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호외》 는 일본군의 진주만공격을 받은 미국의 반격과 일본왕의 항복 등 현대사의 귀중한 자료들을 접할 수 있다. 《호외》 는 대형사건이 일어난 당시의 현장에서 그려낸 기사와 사진이므로 그 어떤 자료보다 사실성이 있다. 역사는 대부분 지난 일을 후세에 기록한 것이어서 '신빙성이 떨어질 수 있다. 그러나 신문이라 당시의 현장기록이다. 호외 또한 작은 신문으로써 큰 사건만을 간추려 보도했으므로 내용면에서 그만큼 중요할 수밖에 없다. 《호외》 에 담긴 내용은 놀람도록 방대하다. 《호의》를 통해 당시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등 우리 생활과 밀접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저자

한국학자료원편집부

목차

1권-1945년∼1969년
2권-1970년∼1988년
3권-1989년∼1995년

출판사 서평

130년간의생생한현장기록

편집부

신문은그시대를반영하는거울이다.사건이일어난그때의생생한기록이다.과거사를가장정확하게기록한1차자료가신문이다.근대이후100여년의역사를돌이켜보면파란만장한대형사건들로짜여져있다.그때마다중요신문들은‘호외(號外)’로찍어속보速報)로전했다.호외의역사는격동의근현대사색인이라고해도지나친말이아닐것이다.
일간신문은하루한번발행호수(號數)를매긴다.그렇게매긴호수가신문의일련번호이고발행역사이기도하다.정규로발행하는신문과달리긴급사건이발생할경우정규발행을기다리기전속보용신문을비정규적으로제작해서배포하는경우가있다.이것이바로호외(號外)다.호외는일련번호가없는것이보통이다.
호외라는용어를처음사용한나라는일본이다.-명치5년(1872년)7월일본의《태정관일지》에학문보급을논한〈태정관포고문〉에서난(關)외에‘호외(號外)’라고기록한것이시원이다.
일본에서이용어를처음사용한신문은《조야신문(朝野新聞)》으로,1876년10월29일구마모토(熊本)에서발생한‘신풍련(神風連)사건을속보로전하면서였다.처음에는속보를별보(別報)또는별호(別號),별지(別紙)라고불렀다.본지와는별도로배달한다고해서‘별배달(別配達)’이라고도불렀다.
세계최초의호외는미국최초의신문인《보스턴뉴스레터》이다.당시근해를누비면서사람들의재물을뺏고살인까지저질렀던해적6인을처형한사실을호외로알렸다.
일본에서는1868년5월16일자《중외신문(中外新聞)》이《별단중외신문(別段中外新聞)》이란이름으로호수없이발행했다.당시의우에노(上野)에서‘창의대(彰義隊)사건'을호외로발행했는데이것이일본최초의호외이다.'당시에는네덜란드어의'Extra’를한자투로번역하여별단(別段)’이라고했다.현재도영자신문에서는호외를‘Extra’로표기한다.
한국에서첫호외는언제,어떤신문에서나왔을까.1894년(갑오년)7월23일자《조선신보(朝鮮申報)》룰한국최초의호외를꼽을수있다.당시이신문은인천에서발행되었는데당일오전일본군의경복궁을급습한사건을‘호외’라는이름으로발행했다.이신문은경제지성격의신문이었으나사건이크다고하여호외로발행한것같다.이신문은일본인이발행한신문이었다.한국인이발행한최초의호외는서재필이국고5천원을보조받아1896년4월7일
에창간한《독립신문(獨立新聞)》이다.2월19일미국군함메인호(號)가쿠바하바나항(港)에서폭침된사실을호외로보도했다.그리고그내용을2월22일자영문판에다시게재하기도했다.
신문호외130년을축약한《호외(號外)》는1868년일본에서호외가발행된이래1995년까지130년동안세계에서일어난중요한사건들을상세히기록하였다.전12책으로역은호외의제1권은1868년부터1912년까지명치사(明治史)를다루었다.제2권은대정사(大正史1912∼1926),제3권소화사1(紹和史11926∼1935),제4권소화사2(瓚和史21936∼1945),제5권전후사(戰後史l945∼1995)로이어진다.이렇게하여모두12책에근현대사를생생하게기록하였다.중요내용을보면제1권에는청일(淸日)전쟁의발발,영일(英日)동맹체결,러일강화조약체결같은굵직한사건들이담겨있다.제2권에서는우리교민들을학살했던관동대지진을다루었고,제3권에서는런던군축회의,“만주사변발발일본의유엔탈퇴를실었다.
또제4권에서는독일,이탈리아,일본등삼국동맹,일본군의하와이진주만공습등중요사건울기록했다.
호외는근현대사를다루었으므로우리와도무관하지않다.일본의시각으로본역사의식이지만우리가갖지못한수많은정보를담고있어학술적정보로서의가치가큰편이다.일제가조선을강제병합하는과정과청일전쟁,러일전쟁,일제의중국대륙침략남경대학살동남아시아침략에서부터태평양전쟁으로확산되는과정을수많은사진과함께자세히알아볼수있도록했다.남경대학살에관한당시의호외보도를간추려보았다.중국에서는남경대도살(南京大屠殺)이라하고일본에서는남경대학살(南京大虐殺)이라고한다.중일전쟁때중화민국의수도인난징을점령한일본군이중국민간인을대량학살한사건이다.,그때문에30만명의중국인들이학살되었다..남경대학살은1937년12월13일부터1938년2월까지6주간에걸쳐이뤄졌다.1939년4월에는1644부대가신설되어생체실험등이자행되는등일제의온갖만행이아루어지기도했다.

난징전투당시중국군지휘관은탕성즈(唐生智)장군이었다.그는일본군이난징으로진격하는동안"어떠한일이있더라도수도를지키겠다“고선언했다.삼면에서쳐들어오는일본군의포위속에서중국국민당주요관리와부유충은도시를빠져나갔다.
12월13일일본군은난징을점령하고성안으로진격하기시작했다.난징이함락되기직전결사항전을주장하던중국군사령관당성즈는양쯔강을건너도망했다.여기서피난하지못한채남아있던50~60만의시민들과군인들이일본군에게처참한학살당한것이다.6주간에걸쳐일본군은백기를들고항복하는중국군포로뿐만아니라젊은남자들을닥치는대로끌고가성의곽양쯔강하구에서기관총세례를퍼부어,무차별학살했다.
그뿐만아니라수천에서수만명단위로,중국군포로와민간인남자들을일본군의
총검술훈련용으로찌르고목을베는희생물로삼았다.여기서적지않은중국인들이총알을아끼려는일본군에의해산채로구덩이에매장당하거나칼로난도질당했다.
이번에는일본나가사키에원자탄이투하된사건을찾아보았다.제2차세계대전이끝날무렵인1945년미국은일본의나가사키와히로시마에두개의원자폭탄을투하했다.8월6일히로시마에한개8월9일나가사키에나머지한개의원자폭탄을떨어뜨렸다.
앞서미국은영국,중화민국과함께포츠담선언에서일본에게무조건항복하라고강요하였다.일본이응하지않자미국대통령해리트루먼의명령으로원자폭탄‘리틀보이(Li仕leboy)를히로시마에’팻맨(Fatman)’을나가사키에투하했다.
나가사키원폭투하6일후인8월15일일본제국의왕은무조건항복을선언했으며9월2일항복문서에서명했다.이로써태평양전쟁과제2차세계대전이끝났다.이날조선도광복을맞았으며한편독일은이미5월7일유럽에서항복을선언했다.두개의원폭투하로전후일본은"핵무기를만들지않으며갖지도않고,들여오지도않겠다는비핵3원칙을수용했다.
《호외》는일본군의진주만공격을받은미국의반격과일본왕의항복등현대사의귀중한자료들을접할수있다.《호외》는대형사건이일어난당시의현장에서그려낸기사와사진이므로그어떤자료보다사실성이있다.
역사는대부분지난일을후세에기록한것이어서'신빙성이떨어질수있다.그러나신문이라당시의현장기록이다.호외또한작은신문으로써큰사건만을간추려보도했으므로내용면에서그만큼중요할수밖에없다.
《호외》에담긴내용은놀람도록방대하다.《호의》를통해당시의정치,경제,사회,문화,종교등우리생활과밀접한정보를얻을수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