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세기(필사본 영인본) (양장본 Hardcover)

화랑세기(필사본 영인본) (양장본 Hard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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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신라 중대 김대문(金大問)이 쓴 화랑(花郞)들의 전기(傳記).
『화랑세기(花郞世紀)』는 진골귀족(眞骨貴族) 출신으로 704년(성덕왕 3)한산주(漢山州) 도독(都督)이 된 김대문(金大問)이 『고승전(高僧傳)』·『악본(樂本)』·『한산기(漢山記)』·『계림잡전(鷄林雜傳)』과 함께 저술하였는데, 오늘날에는 모두 전하지 않는다.

그러나『삼국사기(三國史記)』에 “현명한 재상과 충성스런 신하가 여기서 솟아나오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졸이 이로 말미암아 생겨났다”는『화랑세기』의 한 구절이 인용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삼국사기』가 찬술되었던 고려 때까지는 남아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이 화랑들의 전기는『고승전』과 함께 김대문의 가장 중요한 저술로 꼽힌다. 이와 같은 화랑의 전기를 『삼국사기』김흠운전(金歆運傳)의 사론(史論)에서는 ‘김대문의 세기’라 하였고, 최치원(崔致遠)의 『난랑비서(鸞郎碑序)』에서는 ‘선사(仙史)’라 하였으며, 각훈(覺訓)의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에서는 ‘세기(世記)’라고 하였다.

다만, 김대문은 8세기 초 사람이므로 이 전기에 소개된 화랑은 신라의 화랑 전체가 아니라, 그들의 활약이 가장 두드러졌던 진흥왕(眞興王)대로부터 통일을 완성한 문무왕(文武王)대까지의 화랑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전기를 참고했을『삼국사기』열전(列傳)에 대부분 삼국 및 통일기 초의 화랑들이 올라 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따라서, 이 전기는 화랑제도의 성격이 크게 달라졌을 것으로 짐작되는 신라 말에 최치원이 쓴 ‘선사’라든지, 고려 후기 각훈이 쓴 ‘세기’와는 달리 화랑의 본래 모습을 가장 잘 전해준 기록이라 할 수 있다.

1989년에 필사본『화랑세기』가 발견되고, 다시 1995년에는 이른바 그 모본(母本)이 알려졌는데, 여기에는 32명의 풍월주(風月主)의 계보와 그 구체적인 삶의 모습이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그 진위 여부를 둘러싸고 박창화(朴昌和)에 의한 위작설(僞作說)이 제기되는 등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박창화에 의해 위작되었다고 보는 경우, 모본 필사본 『화랑세기』를 보다 더 진본(眞本)으로 보이게 하기 위하여 초록본(抄錄本)을 따로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또한 박창화의 『화랑세기』외의 다른 저술들이 역사를 소재로 하면서 주요 모티프가 성관계라는 것이 필사본 『화랑세기』와 동일하다는 점에서 필사본 『화랑세기』를 위작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필사본 『화랑세기』가 진본(眞本)이라고 주장하는 측에서는 수록된 향가인 「송사다함가(送斯多含歌)」의 향찰 표기, 또 『화랑세기』에서의 ‘노(奴)’와 ‘비(卑)’의 용례가 조선시대의 천민 개념이 아닌 고대의 왕족을 제외한 모든 신분층을 일컫는 개념으로 쓰였다는 점을 근거로 들고 있다. 이후에도 필사본 『화랑세기』를 둘러싼 진위 논쟁은 화랑의 계보, 색공(色供)의 역사적 접근, 인용 고사에 대한 분석, 향가·향찰에 대한 고찰 등 구체적인 내용의 실증 작업을 토대로 계속되고 있다.
화랑세기 [花郎世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저자

김대문

(金大問)
김대문은삼국시대『계림잡전』,『화랑세기』,『고승전』등을저술한신라의학자·문장가·지방관이다.진골출신의귀족으로생몰년은미상이다.704년(성덕왕3)에한산주도독에임명되었다는기록외에는관직에대해알려진것이없다.『한산기』·『악본』도그의저술이다.김부식이『삼국사기』를편찬할때그의저술들이남아있었다고하는데현재는『화랑세기』필사본만전해진다.『삼국사기』열전에서는김대문이신라의다른유학자들과함께실려있어『삼국사기』편찬당시고려유학자들은김대문을유학자로파악했음을알수있다.

목차

머리말-3
해제-11
1세위화랑-21
2세미진부-28
3세모랑-33
4세이화랑-35
5세사다함-44
6세세종-48
7세설원랑-54
8세문노-62
9세비보랑-66
10세미생-69
11세하종-73
12세보리-79
13세용춘-83
14세호림-88
15세유신-92
화랑세기의등장인물을살핀다.-95
혼인실태로본화랑세기-109
찾아보기-117
화랑세기영인본-123